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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가을의 아름다움은 자세히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사진을 여러 장 찍으니 늙어 눈이 침침해진 모양이라 놀리는 친구들이 있어 오언절구 한 수를 짓고 우리말로 옮겨 회답합니다. 半賓 〈深秋之美不必細看〉 五彩配藍天,秋情自盎然。 輝光炫老目,禿筆塞詩篇。 清晰為何求,朦朧已可憐。 只需一二句,紅葉代雲箋。 반빈 “깊은 가을의 아름다움은 자세히 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섯 가지 색채가 푸른 하늘과 어울리니 가을의 정취가 스스로 풍성합니다. 빛나는 광채가 늙은 눈을 어지럽히고 털 빠진 붓이 시편을 가로막네요. 맑아 뚜렷한 걸 무얼 위해 구합니까? 어렴풋해도 벌써 사랑스러운 것을. 한 두 구절만 있으면 되겠지요 붉은 이파리로 편지지를 대신할 테니까요.

시선(詩選) 2020.11.19

〈오랜 친구 원순의 영전에서 아프게 웁니다〉

오랜 친구 원순이 타계했다는 비보를 듣고 칠언율시 한 수를 짓고, 다시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半賓 〈故友元淳靈前痛哭〉 行善如何僅半命, 留余另半哭元淳。 埋頭經世忘為我, 獻計厚生求利民。 弱冠已懷知洛書, 從心尚遠棄紅塵。 先驅不免憂孤獨, 積德輪迴必有鄰。 〈오랜 친구 원순의 영전에서 아프게 웁니다〉 좋은 일 행함을 어찌 천명의 반에서 그치고 나머지 반을 내게 남겨 님을 위해 울게 합니까 세상 경영에 마음을 다해 자신을 잊었고 삶을 든든히 할 방법을 찾아 사람들을 도우셨지요 약관에 이미 세상의 큰 계획을 배우려는 뜻을 품었지만 마음 따를 나이가 아직 멀었는데 먼지같은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앞서 달리셨으니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덕을 쌓았으니 다시 태어나서는 반드시 이웃이 있을 겁니다

시선(詩選) 2020.11.16

"지려고 뜨는 해"

반빈 "지려고 뜨는 해" 그믐 부근 며칠 아침 해를 찬찬히 살펴봅니다 자욱한 안개 뒤로 슬며시 오르며 보이다 말다 숨바꼭질로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합니다 지려고 뜨는 해인 것 같아서 마음이 더 쓰이는 건지 빠뜨린 건 없나 그냥 가도 되나 망설이듯 망설이듯 희뿌연 얼굴이 아련합니다 질 해는 져야합니다 밤 지나 같은 해가 다시 뜬다 해도 분명히 다를 겁니다 (병신년 세밑에)

시선(詩選) 2020.11.16

어버지의 유훈

평일미사에서 늘 옆에 앉았던 노인 한 분이 돌아가셔서 장례미사에 다녀왔습니다. 말은 별로 없지만 친절해 보이는 평범한 노인이었는데, 장례미사에서 여러 신부님의 말씀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없는 노숙자에게 따듯한 식사를 제공하는 시민 단체를 만들고 지원한 것을 비롯해 참 많은 걸 베푸셨다고 합니다. 내 나이는 되어보인 아드님이 전해준 유훈은 특히 마음에 남았습니다. Preach the Gospel all the time, and if necessary you may use words as well. 늘 복음을 선포해라. 필요하다면 언어를 사용해도 좋아. 복음 선포는 발로, 마음으로,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이렇게 분명히 말해주신 분은 이 노인이 처음입니다. 아드님에게 준 유..

에세이 2016.05.01

"일흔 일곱 번? 아니면 사백 구십 번?"

"일흔 일곱 번? 아니면 사백 구십 번?" "내게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 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베드로와 그 정도로는 아주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기록한 마태오복음 18장은 자주 들어 친숙한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정확히 무엇이었고, 그걸 어떻게 읽어야하는지는 묵상할 숙제로 남는다. 우선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지금 미국에서 사용하는 매일미사는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라고 적는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란 뜻이다. 이 숫자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과 달라서 우리말 번역을 확인하니 두 가지 서로 다른 대답이 있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는..

에세이 2015.08.26

"새로운 국가모델로서의 미국"

"새로운 국가모델로서의 미국"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실제로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 새 국가의 탄생을 선포하는 독립선언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내외의 사정이 모두 신생국가인 미국의 건설을 어렵게 했다. 전후에 겪어야했던 경제난은 참으로 심각했다. 막대한 전비의 지출로 생긴 인플레와 심각한 불경기도 그랬지만 전쟁 중 망가져버린 생산과 교역의 복구도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외부로부터의 압박도 심각했다. 특히 스페인과 영국은 북미대륙에 병력을 유지하면서 신생 미국에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미국의 입지를 어렵게 했다. 복잡하게 얽혀 서로 충돌하는 미국 내의 이해관계도 조정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미국이 처음 고안한 연방정부는 이러한 어려움을 감내하고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하나로 남기 위한 미국의 노력"

"하나로 남기 위한 미국의 노력" 미국은 여러 개의 주가 모여 이룬 연방국가로, 연방의 사회적 응집력을 지켜 하나로 남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미국 역사의 이러한 특징은 우선 국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미국의 공식 국호는 “미합중국” 또는 “아메리카 합중국”이라고 번역되는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다수의 개체[중(衆)]”가 하나로 “모여[합(合)]” 만들어진 나라라는 뜻을 지닌 명칭이다. 이 이름에는 자칫하면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두 가지 의지가 담겨있다. 그 하나는 개체를 존중한다는 의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연합을 지켜내겠다는 의지이다. 물론 개체에 대한 존중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연합이 가능하지 않고, 합쳐진다는 전제 없이는 개체의 존중도 무의미하므로 이 ..

"죽어야 가는 하늘나라와 밀알"

"죽어야 가는 하늘나라와 밀알" 주일미사를 집전하던 신부가 어린이들을 제대 앞으로 불러모았다. 미국 성당의 주일미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말씀의 전례가 시작되면 신부는 제대 앞으로 모은 어린이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통해 무얼 생각해 볼지를 몇 가지 제시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주일학교 선생들의 인솔로 잠시 그 자리를 떠나 성찬의 예절에 돌아올 때까지 따로 말씀의 전례를 진행한다. 미사를 가족들과 함께 하면서 그날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린이들의 언어로 생각해보라는 배려인 것이다. 신부가 어린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중에 누가 하늘나라에 가고 싶으니?" 어린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까치발로 서서 손을 흔들어대며 대답했다. "저요, 저요, 저요." "저요, 저요. 저도 갈래요." 신부가 다시 입을..

에세이 2015.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