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가모델로서의 미국"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실제로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 새 국가의 탄생을 선포하는 독립선언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내외의 사정이 모두 신생국가인 미국의 건설을 어렵게 했다. 전후에 겪어야했던 경제난은 참으로 심각했다. 막대한 전비의 지출로 생긴 인플레와 심각한 불경기도 그랬지만 전쟁 중 망가져버린 생산과 교역의 복구도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외부로부터의 압박도 심각했다. 특히 스페인과 영국은 북미대륙에 병력을 유지하면서 신생 미국에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미국의 입지를 어렵게 했다. 복잡하게 얽혀 서로 충돌하는 미국 내의 이해관계도 조정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미국이 처음 고안한 연방정부는 이러한 어려움을 감내하고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식민지 경험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미국은 중앙집권적인 권력에 대해 극심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첫 번째로 만든 연방정부에 위기에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777년 연방의회가 초안해 1781년 3월 비준되었던 “연방규약 The Articles of Confederation”은 각각의 주가 “주권과 자유와 독립”을 유지한다고 규정하였으니 전체의 연방이 가지는 응집력보다 각각의 주가 가지는 독립적 권한이 더욱 중요했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에서 연방의회에는 세금을 부과할 권한도 교역행위를 통제할 힘도 허락되지 않았다. 국가의 건설은 차치하고 산적한 전후의 난제에 대처할 법적 근거도 경제력도 없었다. 13개의 주가 독립전쟁 중의 군사적 동맹을 넘어서 한 국가의 성원임을 자각하는 데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멀고 험한 길이 남아있었다.
어쩌면 국가건설이라는 과제를 가장 어렵게 했던 요인은 신생 미국이 따를 수 있는 모델이 없었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미국은 “신대륙”에 이주해 영국의 식민지로 살기 시작해서 독립을 이룰 때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자기들이 무엇을 꼭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희망사항이나 혐오사항은 성원의 이해관계에 따라 상당한 상호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 가는데 요즈음 말로 어디 벤치마킹할 데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할 때, 미국이 독립선언서에 담은 원칙과 헌법에 담은 권력의 상호견제를 담보하는 정부 구성은 괄목할 만 했다.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한 독립선언서의 초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과 모든 사람이 창조주로부터 삶과, 자유, 행복의 추구 등 빼앗을 수 없는 권리를 받았음을 미국이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이다. 평등함과 천부인권은 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원칙으로 이 두 가지를 한 단락에 간단하면서 확실하게 담았으니 참 멋진 글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이 그렇듯이, 독립선언서에 담은 국가의 이상 역시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두 개의 가치를 포함한다. 평등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이고, 사회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있는 자와 없는 자, 강자와 약자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 배려하고 보살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은 징수한 세금으로 사회보장을 튼튼히 해서 가진 것 없고 힘이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고 제한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세금은 자유의 침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적 민주사회에서는 이 두 가지 가치가 서로 보완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를 중시하느냐 정의와 평등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입장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흔히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시각을 “보수”라 하고 정의와 평등을 중시하는 입장을 “진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둘 모두 중요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서는 평등과 정의를 중시해 사회보장과 복지에 힘쓰는 반면, 미국과 같은 나라는 시장의 기능에 의존하도록 자유를 중시한다고 상대적으로 개괄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1776년에 만들어진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현실을 묘사한 것도 아니요 도달하고자 희망하는 목표를 그린 것도 아니다. 국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서로 상충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서로를 보완하는 가치로 가꾸어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다시 말해서 독립선언서는 미국의 국민과 정부에게 늘 가꾸고 실천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실천의 과정이 민주적 가치의 실현에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독립선언을 독립이 왜 정당한지에 대한 주장이라고 이해할 때,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이러한 민주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이념을 정당화의 이유로 내세운 것이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된 “제헌회의 Constitutional Convention”에서 초안해 1788년 비준된 미국의 헌법 역시 국가 건설의 새 모델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성취이다. 이 제헌회의에는 81세의 벤자민 프랭클린으로부터 뉴저지대표였던 27세의 조나선 데이튼까지 미국 각 지역, 각 계층의 대표들이 모여 여러 가지 상충되는 이익을 대변했고, 그런 집단이 함께 정부의 형태를 고안하는 일이 간단치 않아보였다. 그러나 이 제헌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거의 모두 참으로 명석한 정치가였다. 그들이 만든 헌법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력의 산물로 정치적 이상과 정치적 편의의 사이를 오가며 엮어낸 타협의 결과였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미국이 독립선언 후 바로 착수해서 만들었던 “연방규약 Articles of Confederation”은 권력의 중앙집권을 지나치게 혐오한 결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연방정부를 고안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한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연방정부에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면서도, 그 권한이 견제되고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 것이 새로 소집된 제헌회의의 과제였다. 우선 의회가 어떻게 13개 주의 민의를 대표할 것인지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큰 주와 작은 주, 인구가 많은 주와 적은 주, 노예 노동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주와 노예제도 자체에 대한 도덕적 혐오를 가지고 있는 주 등의 민의가 모두 공평하게 반영될 수 있는 의회의 구성이 필요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구조의 의회이다. 상원은 각 주에서 선출된 같은 수의 의원으로 구성하고 하원은 인구비례에 따라 결정된 수의 의원으로 구성하였으니 상이한 두 개의 대의방법을 채택한 것인데, 법안의 심의에서 상하원이 조정과 타협을 거치도록 하였으니 주와 주 사이의 차이를 공평하게 반영시키려는 의도였다. 노예제도의 문제는 앞에 소개한 대로 남부의 흑인인구의 3/5을 하원선거의 인구비례에 반영해주는 타협을 통해 해결했다.
이렇게 상하 양원으로 구성된 입법부에 행정부와 사법부를 더하여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이 세 개의 권력기관이 서로 견제하여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대표하는 행정부는 의회가 만든 법을 실행하지만 그 법을 거부할 권한도 가지고 있고, 연방법원의 판사와 행정부 고위 공직자를 선출하고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한이 있다. 행정부의 이런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대통령이 의회의 입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경우 재적 2/3의 찬성으로 행사된 거부권을 취소할 권한, 행정부가 체결한 조약을 승인할 권한, 대통령을 탄핵할 권한, 외국과의 전쟁을 선포할 권한 등을 입법부에 주었고, 사법부인 대법원에게는 행정법령의 위헌여부를 판단할 권한을 부여했다. 입법부는 연방법을 만들 권한이 있지만, 대통령이 그 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대법원은 법의 위헌여부를 가릴 권한이 있다. 사법부인 대법원에 대한 견제로 의회가 법원의 결정을 뒤집을 근거가 될 수 있는 헌법 수정을 제의할 권한을 가지고, 연방법원의 판사를 탄핵할 수도 있다. 연방법원의 판사를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가 인준하도록 한 규정 역시 권력기관의 상호견제를 통한 균형의 유지를 위한 장치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헌법은 국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이렇게 미국은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새로운 모델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고, 그 성공은 과정에서 지켜야할 원칙과 가치를 규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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