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가는 하늘나라와 밀알"
주일미사를 집전하던 신부가 어린이들을 제대 앞으로 불러모았다. 미국 성당의 주일미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말씀의 전례가 시작되면 신부는 제대 앞으로 모은 어린이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통해 무얼 생각해 볼지를 몇 가지 제시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주일학교 선생들의 인솔로 잠시 그 자리를 떠나 성찬의 예절에 돌아올 때까지 따로 말씀의 전례를 진행한다. 미사를 가족들과 함께 하면서 그날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린이들의 언어로 생각해보라는 배려인 것이다. 신부가 어린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중에 누가 하늘나라에 가고 싶으니?"
어린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까치발로 서서 손을 흔들어대며 대답했다.
"저요, 저요, 저요."
"저요, 저요. 저도 갈래요."
신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 그럼 하나 더 물을테니 대답해 보아라.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선 무얼 해야하지?"
평범하게 들리는 이 질문에 대한 어린이들의 반응이 신부의 예상과 달랐던 것 같았다. 손을 들고 발을 구르며 서로 먼저 대답하겠다고 아우성을 하는 게 보통인데 그날은 왠지 모두 조용했다. 예상치 못했던 어린이들의 침묵에 신부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든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든지,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한다"든지, 하다못해 "어머니 말씀을 잘 듣는다"든지 하는, 어린이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답이 많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 아닌지 모르겠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마치 천 근 무거운 짐을 들고 있기나 한 듯, 아주 느린 속도로 보일 듯 말 듯 손을 들어올린 것이다. 신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 내기는 했지만, 그게 옳은지 확신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교우들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 집중됐다. 아이가 입을 열었다.
"죽어야 해요."
그 대답은 교우 전체의 큰 웃음을 자아냈다. 거긴 내 웃음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웃기는 웃되 왜 웃는지는 그리 분명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답이어서 오히려 어른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었을까? 틀린 말은 아니나 옳은 답이랄 수도 없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죽음"이라는 말이 담긴 무게에서 오는 부담을 웃음으로 풀어낸 것일까? 신부는 짓궂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죽어야 갈 수 있는 하늘나라에 가고싶은 사람?"
그 질문에 까치발로 서서 "저요, 저요"하며 손을 드는 어린이는 없었다.
사순절 다섯째 주일, 그러니까 요한복음(12:20-33) 중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듣는 날 있었던 일이다. 신부는 조금 전 어린이들에게 했던 질문으로 어른들에 대한 강론을 시작했다. 죽어야 가는 하늘나라에 지금 당장이라도 가고싶은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강론의 나머지 말씀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생각이 그 질문에 붙들려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밀알의 죽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죽음은 아니다. 밀알에서 새싹과 뿌리가 돋아 자라나는 것이니 일반적인 죽음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 밀알의 생명이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으니, 오히려 긍정적인 재생산의 과정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바로 그 과정을 "죽는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말 번역만 그런 게 아니다. 중국어번역, 영어번역, 일본어번역 모두 "죽는다"는 의미 평범한 어휘를 사용하고 있고, 희랍문학을 전공하는 동료에게 확인해 보니 성서의 희랍어 원전에 사용된 "apothanesko" 역시 "죽는다"는 의미의 평범한 단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죽음이 아닌데 장삼이사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어휘로 밀알의 변화를 "죽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밀알의 죽음"이라는 표현으로 요한복음은 "죽음"이라는 말에 비견할 정도로 철저하고 완전한 변화를 가르치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철저하고 완전한 변화를 통해 이 땅에서 만들어야하는 곳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게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 가장 좋은 준비일 것임은 말할 것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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