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일곱 번? 아니면 사백 구십 번?"
"내게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 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베드로와 그 정도로는 아주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기록한 마태오복음 18장은 자주 들어 친숙한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정확히 무엇이었고, 그걸 어떻게 읽어야하는지는 묵상할 숙제로 남는다.
우선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지금 미국에서 사용하는 매일미사는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라고 적는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란 뜻이다. 이 숫자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과 달라서 우리말 번역을 확인하니 두 가지 서로 다른 대답이 있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는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라 하고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라고 적는다. 이 두 번역은 계산의 결과가 모두 "사백 구십 번"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엄밀히 말하면 다른 개념이다. 한 세트의 용서가 일곱 번이냐 일흔 번이냐라는 기본적인 생각의 차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해석의 차이가 생긴 것인지 생각하면서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에는 "일흔 일곱 번"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각주가 달려있다. 궁금해서 희랍어를 전공하는 동료에게 확인하니 원문에서도 일흔 일곱 번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해서 성서학자들 사이에 해석이 분분하다고 한다.
이런 저런 사실을 더 알게 되면서 한 걸음씩 더 깊이 들어가다보니 일흔 일곱 번이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냐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베드로의 질문은 몇 번 용서하면 되는지를 묻는 단순한 가르침의 요청이 아니다. 그의 생각에는 일곱 번의 용서는 차고 넘치는 너그러운 사랑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질문에는 "쉬운 일이 아닌 줄 알지만 저는 제게 죄를 지은 형제를 일곱 번 용서할 마음과 능력이 있습니다"라는 어찌 보면 자기 자랑이랄 수 있는 태도가 묻어있다.
요즈음의 선생이라면 베드로의 이런 질문에는 "그래, 일곱 번 용서하는 건 훌륭한 일이야"라는 말로 우선 칭찬을 해주고, 칭찬을 받아 마음이 흐뭇하게 열리면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용서해야 한다"란 교훈을 줄 법한 상황이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대답에 그런 배려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예수님은 이것저것 배려하지 않고 요점만 말씀하신 선생님이셨을까? 어쩌면 훨씬 더 깊은 배려가 들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간명하고 직접적인 대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일곱 번보다 훨씬 더 많은 용서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바탕을 이룬다는 점이다. 일흔 일곱 번이라도 좋고, 사백 구십 번이라도 좋으니 일곱 번보다 훨씬 더 많이 용서해라, 그럴 수 있는 힘을 주십사 기도 해라, 너희들은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는 너희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실히 믿는다. 예수님의 대답에서 그런 깊은 신뢰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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