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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속옷과 유가(儒家)의 가르침

©반빈 "빨간 속옷과 유가(儒家)의 가르침" 재작년인가 중국을 여행하다가 상하이(上海)의 한 주택가 골목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과년한 여인의 속살에 내밀하게 마주 닿아있었을 속옷이 통째로 내걸렸으니 보기에 조금 민망하고 쑥스러웠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도 사진까지 찍어 보관했다는 걸 너무 탓하지 마시라. 심각한 관음증(voyeurism)을 앓아 훔쳐보듯이 그 속옷 뒤에 숨어있었을 몸뚱이를 상상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믿기 어려울지 몰라도 문득 유가(儒家)에서 가르치는 "인(仁)"과 "예(禮)"의 문제에 생각이 다다랐고, 그 이야기를 꺼낼 좋은 화두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행을 불러세우고 핀잔을 들을 걸 무릅쓰면서 카메라를 꺼내 찍어둔 것이다. 이 장면처럼 속옷이, 그것도 선명한 빨강색의 여..

에세이 2010.05.25

환상의 조합

"환상의 조합" 셋에 여섯을 더하면 아홉이고, 거기서 둘을 빼면 일곱이다. 숫자는 그렇게 늘 일정한 값을 공평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이고, 거기서 다섯을 빼면 또 아홉, 그 아홉의 양 옆에는 여덟과 열이 있다. 이렇게 보면 숫자의 값은 정말 한결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숫자의 가치가 그렇게 늘 일정한지는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지 않다. 백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만원이 생길 때와 만원밖에 없는 사람에게 이만원이 생길 때, 그 이만원이 꼭 같지만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백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만원에 대해 가지는 애착이 만원밖에 없는 사람이 자신이 가진 돈이 세 배로 불어나는 데 대한 애착에 비해 작다는 뜻은 또 아니다. 있는 사람일수록 악착같을 수 있..

에세이 2010.05.18

거렁뱅이 닭

"거렁뱅이 닭" 구걸한 음식으로 연명을 해야하는 사람들을 걸인, 거지, 또는 거렁뱅이라고 한다. 지금은 음식을 구걸하는 걸인을 잘 볼 수 없지만, 음식대신 돈을 구걸한다고 해도 그 돈이 고픈 배를 채우는 데 많이 쓰일 것으로 짐작한다. 걸인들은 음식과 가장 멀면서도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 누군가 적선을 해주지 않으면 먹을 음식이 없을 테고, 그래서 팔을 뻗어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에 음식이 있다고 느낄 것이니 그 둘 사이의 거리는 참 멀고도 멀다. 그러나 음식이 멀리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음식이라는 화두가 마음과 머리를 떠날 날이 없을 것이므로 둘 사이의 관계는 뗄 수 없이 가깝기도 하다. 그래서 "거지"와 이야기가 맞닿아 있는 음식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음식 귀한 줄을 아는 사람들이라..

"멍멍이 노래 #4: 힘과 지위의 문제"

멍멍이 노래 #4 "힘과 지위의 문제" 압니다 다 알아요 물론 모두 내 탓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깨워 주실 것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짧지 않은 세월을 그렇게 살았는데 제 버릇을 개에게 주겠습니까 걸핏하면 책장을 뒤적거리지요 그 속에 꼭 답이 있지도 않다는 건 겪을 만큼 겪어 알 만도 한데 말입니다 결국 또 책으로 손이 갔습니다 그냥 생긴대로 얼싸안고 살면 되는 건데 왜 그랬지요 처음엔 쉽게 생각했어요 앉으라면 앉고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그러면 되는 거 아냐 하면서 멍멍이 훈련과정에 등록을 했습니다 배울 건 많았습니다 멍멍이가 배울 것보다 우리가 배울 게 많아서 문제였지요 우리가 잘못하면 우리 탓 멍멍이가 잘못해도 우리 탓이라는 게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책에 손이 간 겁니다 달리 방도가 없었고 그렇..

멍멍이 노래 2010.05.01

새로운 계급투쟁

"새로운 계급투쟁" 안다. 가뜩이나 시절이 뒤숭숭 하수상한데 말을 함부로 써서야 쓰겠는가. 특히 "계급투쟁" 같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역사이론에 등장하는 어휘를 제목에서부터 써 대면 누군가 "빨"자나 "좌"자 딱지를 내 이마에 붙이려할 것 아닌가. 연좌가 없어졌다고는 해도 그게 정말인지 아직 안심이 되지 않으니, 나뿐 아니라 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칠지 모르지 않는가. 아무튼 그런 딱지가 붙으면 좋을 게 없다는 건 현대사를 통해 우리가 절절히 배워온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몸살을 설명하는 데 이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새로운 계급투쟁" 속에 있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수 있고, 또 어쩌면 앓고 있는 그 몸살을 떨치..

에세이 2010.04.25

"홍사오(紅燒)" 조리법

"홍사오(紅燒)" 조리법 "Good Friend"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중국어 옥호는 "好友記"라고 했다. 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와 프린스턴대학으로 가려면 프린스턴정션(Princeton Junction)이라는 역에서 내려 대학갬퍼스 안의 딩키스테이션까지 가는 두 칸 짜리 전차를 타는데, 그 중국집은 프린스턴정션 역의 주차장 바로 밖에 있었다. 삐걱거리는 문과 마루, 표면이 조금 끈끈하다는 느낌을 주는 테이블 등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다. 아직까지 성업중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내가 자주 드나든 게 프린스턴대학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었으니 20년이 훨씬 지난 일이고, 그 당시 벌써 주인장의 나이가 지긋했으니 이제는 없어졌을 수도 있겠다. 아직 있다고 해도 그 때와는 주인도 음식도 다르지 않겠나 짐..

"술지게미"

"술지게미" 술이나 식초를 만들고 생기는 찌꺼기를 중국말로 "짜오(糟)"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무슨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우리말로 "제엔장"이나 "제기럴" 정도의 뜻을 내뱉고 싶을 때도 사용한다. 보통 "떡"이라는 뜻의 "까오(糕)"를 덧붙여 "짜오까오!"라고 하는데, 뜻은 별로 다르지 않다. 술찌꺼기를 떡처럼 뭉쳐놓은 걸 뜻하는 것일 테니 여전히 술찌꺼기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입에서 "제기럴", 조금 젊은 세대 사람이라면 "씨X" 정도의 말이 나올 상황에서 중국사람들은 "술지게미!"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테니스 게임에서 더블폴트를 했거나, 방에 열쇠를 둔 채로 방문을 잠가 낭패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이 말이다. 이 말을 미국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이해를 ..

메뉴와 음식주문

"메뉴와 음식주문" 서양음식점은 고급일수록 화려하게 인쇄된 메뉴를 갖추고 있다. 가죽으로 멋드러지게 제본을 해서 손에 들고 있기만해도 기분이 싱숭생숭해질 정도인 곳도 있다. 음식메뉴뿐 아니라 와인리스트가 따로 준비되어 있기도 한다. 와인의 선택은 대부분 그 날의 주빈이나 호스트의 임무인 경우가 많아 모인 사람 모두가 와인리스트를 검토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두툼하고 묵직한 두 권의 책을 수험생 입시공부하듯 자세히 들여다 보며 무얼 어떻게 시켜 먹을지 궁리하는 모습은 그런 음식점에서 흔히 보이는 정경이다. 글로 인쇄된 메뉴를 공부하는 것으로 다 끝나지 않는다. 그날 그날의 특별메뉴가 준비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서너 가지 요리의 재료와 양념, 조리법 등을 설명하는 웨이터의 말이 뒤따르는 게 보통이다. 외운..

미국 중국음식이 중국음식?

"미국 중국음식이 중국음식?" 언제 기회가 있어 파리나 카이로, 리우데자네이로, 또는 케이프타운 같이 아주 먼 곳에 가게 되면 현지의 고유한 음식은 물론 그곳의 중국음식을 먹어볼 계획이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중국음식"은 세상 어느 구석엘 가나 있기 마련인데, 가는 곳 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을 보인다. 중국음식이 처음 소개된 시점의 사회상황이나 그 후의 정착의 과정을 반영하고 있는 듯 해서, 음식을 먹으며 해볼 수 있는 이런저런 생각이 음식만큼이나 맛있고 흥미진진하다. 그런 점에서는 중국의 바로 이웃인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요즈음은 조금 생소해졌는지 몰라도 "청요리"라는 말이 있었다. 그 때, 그러니까 우리 어렸을 적의 중국음식은 끼니로 먹는 음식과 "청요리"라고 불리던 조금 호사스러운 음..

영토와 영향력의 확장

"영토와 영향력의 확장" 이제 건국해서 독립한지도 이백 몇십 년이 되었으니 미국의 역사는 길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나 짧다고 할 수만도 없다. 적어도 국가의 행태나 정서의 틀이 만들어지고 드러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났다. 그 역사 속에서 미국의 행태나 사고가 보여준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토의 확장과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확장의 속도나 규모가 참으로 경이적이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에 의한 북미대륙 "개척"의 역사는 16세기 말 경 로아노크 Roanoke에 식민지를 열어 정착을 시도하면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지역을 따라 형성되었던 13개의 지역이 18세기 후반 "아메리카 합중국"이라는 이름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을 거쳐, 19세기 중반에는 서쪽으로 태평양을 바라보는 광활한 땅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