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환상의 조합

반빈(半賓) 2010. 5. 18. 16:51

"환상의 조합"

 

    셋에 여섯을 더하면 아홉이고, 거기서 둘을 빼면 일곱이다.  숫자는 그렇게 늘  일정한 값을 공평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이고, 거기서 다섯을 빼면 또 아홉, 그 아홉의 양 옆에는 여덟과 열이 있다.  이렇게 보면 숫자의 값은 정말 한결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숫자의 가치가 그렇게 늘 일정한지는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지 않다.  백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만원이 생길 때와 만원밖에 없는 사람에게 이만원이 생길 때, 그 이만원이 꼭 같지만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백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만원에 대해 가지는 애착이 만원밖에 없는 사람이 자신이 가진 돈이 세 배로 불어나는 데 대한 애착에 비해 작다는 뜻은 또 아니다.  있는 사람일수록 악착같을 수 있다는 게 우리 사회에서 보고 느끼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숫자의 의미와 가치는 그 숫자가 나타나는 맥락에 따라, 또 사용하는 사람의 사정이나 가치관에 따라 아주 다를 수도 있다.

 

    여러가지 숫자가 주는 느낌 또한 문화에 따라 사뭇 다르다.  우리를 포함한 중국문화권에서느 넷이라는 숫자를 그리 즐기지 않고, 서양에서는 열셋을 아주 싫어한다.  또 서양에서는 일곱을 행운의 숫자라고 해서 "럭키 세븐"이라는 말까지 있지만, 중국에서 일곱은 그리 좋은 숫자가 아니다.  모든 게 엉클어져 어지러운 걸 "롼치빠짜오(亂七八糟)"라고 하는 걸 보면 아마 일곱과 여덟은 분별이 어려울 정도의 숫자가 아니었나 싶다. 

 

    숫자들 중, 둘과 셋은 여러 문화에서 폭넓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둘이라는 숫자가 각별한 건 쉽게 이해가 된다.  앞뒤, 위아래, 남녀, 음양, 안팍, 좌우 등 두 개만 가지고도 전체를 포함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만 보아도 둘이 예사의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셋이라는 숫자도 참 많이, 특별하게 쓰인다.  어린시절 말타기든지 술레잡기든지의 놀이에서 무언가 공평한 결정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대부분 "삼세번"이란 과정을 거쳤다.  그 옛날 일본선수 아베를 두발당수로 눕히던 장영철선수나 안토니오 이노끼에 박치기로 맞서던 김일선수의 시합을 보면서 우리는 "삼판양승제"라는 말을 배웠다.  다 짜고 하는 일이었으면서도 그렇게 셋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설득력을 빌렸던 것이다.  그것도 결국 삼세번이었다.  그냥 어린 아이들의 놀이나 운동경기 뿐 아니라 법원의 삼심제도도 삼세번이다.  셋이라는 숫자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도덕경(道德經) 42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고 했는데 셋이라는 숫자에게 만물을 낳는 특별한 힘을 부여했다.

 

    셋이 모여서 "환상의 조합"을 이루는 경우도 참 많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믿음, 희망, 사랑"도 셋이고, 누가누가 예쁜가 미스코리아 경염에서도 "진선미"를 가린다.  심지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훈도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라고 했다.  꼭 셋을 고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합"이 정말 "환상적"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불만이나 의문이 없지 않다.  우선 셋 사이에 우열이나 상대적 가치가 있어서 그 조합이 환상적이라고 할만큼 완전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믿음과 희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니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랑이 제일이다.  그러니 나머지 둘은 그 성경귀절에서는 결국 들러리에 불과하다.  나는 내놓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마음 속에서 종종 강한 믿음과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 정말 사랑이 결여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진선미"는 더하다.  셋 사이의 불균형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등수 매기는 데 쓰일 때도 "" ""보다, "" ""보다 높지만 그 세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환상의 조합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참되다()"는 말은 확신을 가지고 이해하기 어려워 범접할 수 없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물론 그런 느낌은 "좋음()"이나 "아름다움()"라는 말에서도 받기 마련이기는 하지만, "참되다"는 말은 쓸 수밖에 없어서 쓰는 경우에도 늘 뒤통수가 써늘해지는 기분이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교훈의 경우는 셋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가 훨씬 덜하다.  자유, 문화, 평화가 모두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셋 가운데 우열이나 상대성 중요성이 없는 듯 하지만, 이 셋에 못지 않게 중요한 가치들이 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셋의 경우에는 둘보다 환상적인 조합을 만드는 게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남이 만들어 놓은 조합에 대한 흠만 잡지 말고, 내가 만든다면 어떤 세 가지가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내 조그맣고 우둔한 머리로 세상사를 두루 아우르는 조합을 만들어낸다는 건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니, 그냥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이 글은 참 좋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가치 중에서 셋을 고르라면 무엇을 포함시킬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셋이 똑같이 중요해서 하나도 빠뜨릴 수 없고, 셋 각각이 나름대로 지닌 가치가 중요한 것을 내 일상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지금 고르라면 "깊이있고 (profound)", "멋있고 (beautiful)", "재미있다는 (humorous)" 세 가지를 갖추면 그 조합이 환상이겠다.  그런 책을 즐겨 읽고, 그런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중국의 문명이  장자(莊子)라는 사람을 만들어 부여해 놓은 조합이 그렇다.  장자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중 장자를 자기 나라 재상으로 모시겠다고 사람을 보낸 이야기를 보자.  물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생각에 잠겨있는 장자에게 사신이 와서 재상으로 오십사는 왕의 말을 전했다.

 

"당신네 나라에 깨끗한 헝겊에 쌓여 신전에 모셔져 있는 죽은 거북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신성한 거북이가 있지요."

"당신이 거북이라면 그렇게 죽어 말라비틀어져 헝겊에 싸여 제단위에 모셔지는 게 좋겠소, 아니면 살아서 꼬리를 진흙에 끌고 돌아다니는 게 좋겠소?"

"그야 살아있는 게 물론 좋겠지요."

"그럼 전하시오.  나는 살아서 진흙에 꼬리를 끌고 다니며 살겠다고 하더라고."

 

이 대화를 하는 동안 아마 장자는 고개를 돌려 사신들에게 눈을 주지 않고 낚싯대를 응시하고 있었으리라 상상한다.

 

깊이있게 생각하도록 자극하면서 멋드러지고, 멋이 있으면서 재미있고, 또 재미있으면서 깊이있는 생각이 담겨있는 좋은 글이다.  배우고 싶은 태도이고 글쓰기이다.  내가 고른 세 가지가 만든 조합이면서 정작 내가 글을 쓸 때는 그 조합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내 둔한 재주로 그걸 이루는 게 어디 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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