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와 음식주문"
서양음식점은 고급일수록 화려하게 인쇄된 메뉴를 갖추고 있다. 가죽으로 멋드러지게 제본을 해서 손에 들고 있기만해도 기분이 싱숭생숭해질 정도인 곳도 있다. 음식메뉴뿐 아니라 와인리스트가 따로 준비되어 있기도 한다. 와인의 선택은 대부분 그 날의 주빈이나 호스트의 임무인 경우가 많아 모인 사람 모두가 와인리스트를 검토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두툼하고 묵직한 두 권의 책을 수험생 입시공부하듯 자세히 들여다 보며 무얼 어떻게 시켜 먹을지 궁리하는 모습은 그런 음식점에서 흔히 보이는 정경이다. 글로 인쇄된 메뉴를 공부하는 것으로 다 끝나지 않는다. 그날 그날의 특별메뉴가 준비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서너 가지 요리의 재료와 양념, 조리법 등을 설명하는 웨이터의 말이 뒤따르는 게 보통이다. 외운 걸 읊어대기 때문인지, 아니면 전문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건지, 말의 속도가 빠르고 온갖 음식재료의 이름이 어려워서 주의해서 들어도 잘 모르겠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그냥 건성으로 듣기로 마음먹는다고 해도, 최소한 경청하는 것 같은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게 예의이다. 전채에서 시작해 샐러드, 수프를 거쳐 주요리까지 주문하는 과정이 상당히 까다로와서 때로는 번잡스럽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음식을 주문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경험이 풍부한지 어떤지를 알 수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먹는 일본요리는 꼭 반대의 경우이다. 특히 고급이라는 집일수록, 메뉴랄 게 없을 뿐 아니라, 주문을 위한 대화도 별로 필요치 않다. 모이기로 한 사람들이 도착하는 동안 일찍 온 사람들이 맥주 한두 잔 하면서 대화를 하다가 올 사람이 다 오면 "준비해 주세요" 하거나 "이제 먹지" 하는 정도의 말로 주문이 끝난다. 그런 경험이 많았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먹은 음식은 늘 만족스러운 편이었기 때문에, 좋은 식사 경험을 위해 복잡한 주문의례가 꼭 필요한 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어쩌면 서양음식점에서 행하는 주문 방식의 의미는 음식과의 관계에서 보다 그 의례 그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에서 찾아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상당한 값을 치르면서 하는 식사이니 도대체 무엇을 먹게 되는지 미리 알고 싶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과정을 예정해 놓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게 꼭 좋다고 할 수만은 없겠다. 예상치 못한 걸 만났을 때 느끼는 짜릿한 맛 역시 즐거움이다.
이런 두 가지에 비하면 중국음식점에서의 음식주문은 방식이나 예절이 아주 다르다. 내가 경험한 주문방식은 대개 세 가지 유형이었다. 80년대 초, 타이완의 학계 어른 들이 즐겨 출입하시던 "후에이삔러우(會賓樓)"라는 음식점에서의 경험이 가장 전통에 가까웠다는 느낌이다. 이름이 "손님과 만나는 집"이라는 음식점에 붙이기 아주 적절한 뜻이어서 중국 여러 도시에 같은 이름의 음식점이 있지만, 내가 유학하던 1980년대 초반 타이베이에 있었던 "會賓樓"는 아주 특별했다. "씨먼띵(西門町)"이란 지역의 "중화로(中華路)"에 있었는데, 대학교수들이 즐겨 찾아 먹물냄새가 물씬 나는 집이었다. 나도 그 음식점을 잘 아시는 은사님들을 따라 몇 번 간 기억이 있다. 많은 중국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소탈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함께 갔던 은사님들이 조리사를 불러 대화하면서 그날 먹을 음식을 정하는 절차가 정말 격의없어서 인상깊었다. 그 때 경험한 음식주문 절차는 소탈하면서도 내용이 있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대화였다. 우선 메뉴라는 뜻으로 쓰이는 중국어인 "차이딴(菜單)"이란 단어의 의미가 전혀 달랐다. 그 음식점에서 제공할 수 있는 음식을 모두 열거해 놓고 그 중에서 먹고 싶은 걸 고르라는 메뉴가 아니라, 그날 은사님을 따라 함께 갔던 일행을 위해 조리하겠다고 생각한 예닐곱 가지 음식의 이름을 적은 리스트였다. 그냥 음식이름 몇 개를 끄적거려 놓은 메모지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했다. 그게 주방장 혼자의 의견인지, 아니면 장소를 예약하면서 은사님이 미리 귀뜸을 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물론 나를 데리고 갔던 은사님들은 그 집의 단골손님임이 분명했으니 주방장이 손님의 선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거기다 계절의 음식이나, 그날의 구할 수 있었던 특별한 재료를 반영시켰을 것이다. 나를 데리고 갔던 선생님들은 그집을 자주 찾아주는 단골일 뿐 아니라, 중국의 고대 예학(禮學)이나 문학사의 권위자이시면서도 음식에 대해 아주 소상한 지식을 가지고 계셔서 주방장이 늘 배우는 자세로 대화에 임했다. 일행이 모두 자리를 찾아 앉았을 때 주방장이 나왔고, 은사님은 그와 그 종이쪽지를 사이에 두고 이 말 저 말을 주고 받았다. 한두 가지가 수정되고 두 접시의 매콤한 음식이 추가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려놈(高麗幇子: 까올리빵즈)"이 하나 끼었으니 매운 게 좀 더 있어야겠다는 선생님의 장난스런 너털웃음이 기억난다. 그것도 참 고마운 배려 아닌가. 꼭 여기 소개한 방식은 아니지만 나도 자주 다니는 중국집에서는 비슷한 방식으로 음식을 주문한다. 우선 오늘 신선한 야채는 무엇이 있는지, 어떤 생선이 좋은지 물어 먹을 음식의 재료를 정하면, 그런 재료를 어떤 양념으로 조리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이 따르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주문이 끝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음식주문은 아마 지금도 중국의 많은 음식점에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음식문화가 달라짐에 따라 주문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우선 중국의 고급 음식점이 커다란 빌딩을 전부 사용할 정도로 대형화했다.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이 귀에 무전기나 전화를 달고 누군가와 소통하면서 3층으로 가야할지 4층으로 가야할지를 알려주어야 하는 음식점이 많아졌으니, 주방장이 손님을 위해 메모해놓은 식단을 가지고 나와 상의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 음식점의 메뉴는 서양의 고급음식점을 방불할 정도로 두툼하게 장정되어 있다. 한가지 다른 게 있다면 음식 하나하나의 모습이 칼라사진으로 인쇄되어 있어서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주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리 즐겁지도 않고 신뢰할 수도 없는 방법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입구에 밀랍으로 만든 음식의 모형을 진열해놓은 분식집과 그리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음식점의 대형화와 주문방식의 단조로움에 대해 중국은 중국 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언제부터인가 잘 알려져있는 음식점에 가면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음식재료를 쭉 늘어놓은 진열대가 등장했다. 싱싱한 재료를 눈으로 보고 선택하면 그 재료로 음식을 조리해서 제공한다는 개념인데, 손님이 선택한 재료는 그 당장 들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어항에 활어나 새우, 게 따위를 넣어놓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 마치 시장을 방불케 하는 재료진열대가 음식점 한쪽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실질을 중시하는 중국인 다운 발상이다.
아늑하기는 해도 어둑어둑한 환경에서 촛불에 의지해서 공부하듯 메뉴를 읽고 웨이터의 설명을 듣는 쪽과 마치 장보듯 음식재료를 들여다 보면서 골라야 하는 쪽, 달라도 정말 참 다른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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