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새로운 계급투쟁

반빈(半賓) 2010. 4. 25. 20:36

"새로운 계급투쟁"

 

    안다.  가뜩이나 시절이 뒤숭숭 하수상한데 말을 함부로 써서야 쓰겠는가.  특히 "계급투쟁" 같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역사이론에 등장하는 어휘를 제목에서부터 써 대면 누군가 "빨"자나 "좌"자 딱지를 내 이마에 붙이려할 것 아닌가.  연좌가 없어졌다고는 해도 그게 정말인지 아직 안심이 되지 않으니, 나뿐 아니라 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칠지 모르지 않는가.  아무튼 그런 딱지가 붙으면 좋을 게 없다는 건 현대사를 통해 우리가 절절히 배워온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몸살을 설명하는 데 이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새로운 계급투쟁" 속에 있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수 있고, 또 어쩌면 앓고 있는 그 몸살을 떨치고 일어날 힘을 그러한 이해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잘 알면서도 위험한 어휘에 손이 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계급투쟁은 "새로운" 계급투쟁으로, 칼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계급투쟁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계급투쟁"에 대해 한두 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자.  그가 이야기한 계급은 그냥 막연하게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사회적 계급이 아니라, 자본주의체제에서 생산의 수단과 어떠한 관계를 가졌느냐에 따라 정의되는 계급이다.  그래서 크게 보면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가치의 생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계급과, 소유한 자본을 이용하여 잉여가치를 확보하려는 계급의 두 계급으로 나뉠 뿐이다.  이 두 계급을 노동자(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부르주아지)라고 부른다.  물론 크게 나누어 본 이 두 계급 사이에 나타나는 계급도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은 노동자이면서도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계급이 있는데 그걸 쁘띠 부르주아지(petit bourgeoisie)라고 부른다.  노동자를 관리 감독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나 사무직원, 또는 생산이나 사무설비의 경비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할 수 있다.  그들은 물론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기 때문에 노동자이지만 노동자와 자본가의 사이를 매개하는 직무때문에 두 계급의 중간 어디쯤에 속한다고 보기도 한다.  노동자임이 분명한데 자본가를 위해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계급의 배반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매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계급 사이의 조화를 이루어낼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역사의 경험에서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대부분 자본가를 위해 일할 뿐 아니라, 자신들을 자본가에 가까운, 그래서 노동자들보다 나은 계층으로 착각한다.  그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배반자"로 분류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가치의 생산에 노동과 자본이 필요하다고 할 때, 재화의 생산으로 생기는 잉여가치는 노동과 자본의 몫이겠는데, 그 잉여가치를 노동자와 자본가의 두 계급이 나눈다고 할 때 그 두 몫의 합은 당연히 일정하다.  어느 한 쪽의 몫이 커지려면 다른 한 쪽의 몫이 줄어드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많이 주면 자본가의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때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공평한 몫을 나누어주면 별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윤의 극대화를 속성으로 하는 자본가는 자신의 몫을 늘리기 위해서는 노동자에게 공평한 몫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임금을 조금 주면서 일은 많이 시키려 하고, 노동자의 작업환경이나 복지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 자기 몫으로 돌아오는 액수를 늘이려고 하는 것이 자본가 계급의 기본적 속성이다.  물론 이러한 속성이 근시안적이어서 결국 자신들에게 해악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자본가가 이해하면 별 문제가 없다.  자본가가 "자신의 이윤"과 "사회정의"의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경험하고 이론화한 자본가는 이윤의 추구라는 개념에 의해서 정의되고, 그들의 이윤 추구는 장기적인 고려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생기는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관계를 사회주의 역사용어로 "착취(exploitation)"라고 한다.  물론 한 쪽이 착취하고 다른 한 쪽이 착취를 당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다친 놈에게 욕까지 한다고, 그렇게 착취를 하면서도 자기들이 자본을 투자했기 때문에 일자리가 생기는 것이니 감지덕지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계급 사이의 투쟁이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사정은 사회주의 역사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계급투쟁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  용산의 경험을 예로 들어보자.  투쟁에 나섰다 불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나, 그 투쟁에 참여했다고 붙들려가 재판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소자본이기는 하지만 자본가가 많다.  자기 자본을 투자해 호프집, 국수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분명 몇 명이라도 종업원을 "거느린" 사장님이고 그래서 자본가이지만, 그들이 창출하는 가치의 많은 부분이 자신이 제공한 노동의 결과이다.  또 그렇게 해서 창출될 것으로 기대하는 잉여가치가 노동자의 임금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 사람들은 또 자신의 자본보다 훨씬 큰 자본에 예속되어 있다.  예컨대 그 사업을 위해 임대한 장소의 소유주는 호프집이나 국수집 사장님들의 머리꼭대기에 앉아 있는 더 큰 자본이다.  물론 그들은 또 건물을 짓고 운영하기 위해 대출했을 자금의 출처인 각종 금융자본에 예속되어 있다.  더 큰 자본을 향해서 올라가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호프집에 고용되어 크고 작은 일을 하면서 보잘 것 없는 임금이라도 그걸 귀하게 여기면서 사는 노동자들을 잊을 수 없다.  이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을 한다고 할 때 그 상대가 소자본으로 호프집을 내 운영하는 "사장님"일 것 같지 않은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이 때 이렇게 얽혀있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 생길 수 있는 투쟁을 생각해보기 위해 두 계층으로 대분해 본다면 어디에 금을 긋게 될까?  예컨대 그러한 상황에서 그 건물뿐 아니라 그 근처의 넓은 땅에 다닥다닥 들어있는 비슷한 사정의 건물들을 싹 쓸어 없애버리고 다시 개발한다고 하자.  그 때 이익을 볼 사람과 손해를 볼 사람으로 구분해 본다면 국수집, 호프집 사장님들은 어디에 속하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용산의 경험으로 분명해졌다.  국수집이나 호프집의 사장님은 말이 좋아 사장이지 권리금으로 들어간 돈의 반의 반도 건지지 못하고 내쫓기는 게 다반사인 것이다.  건물 한두 채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러한 개발이 이루어질 때, 손해를 보지 않거나, 아니면 작은 이익을 볼 수도 있다.  어마어마한 이익은 건설이나 금융회사라는 대자본이 독점한다.  어머어마한 이익을 예상하고 있으면서 국수집 하나 열어놓고 일해서 밥벌어 먹고 살던 사람들을 거의 빈손으로 쫓아내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내쫓기게 되면 당연히 투쟁을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누구가 누구를 상대로 싸우는 투쟁인가?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 깊은 생각없이 쉽게 말하면, 중산층과 중산층에 끼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아무리 안간힘을 써보아도 그게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냥 하루하루 사는 사람들, 말하자면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사람들 중 어떤 일로 피해를 보게 된 사람들이 돈과 힘이 불필요할 정도로 많으면서 자기들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는 투쟁으로 보인다.  물론 국가의 권력이 돈과 힘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편이니 국가도 투쟁의 상대로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관찰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투쟁의 정체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오늘 우리 사회의 투쟁은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투쟁이 아니라,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투쟁이고, 그 국가권력이 그 수단으로 기껍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없는 사람들이 하는 저항도 투쟁이라할 수 있지만, 그건 당하고 살면서 꿈틀하는 것이니 특이할 게 없다.  있을 것 다 있고, 필요한 정도의 몇 백 곱절이 있는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투쟁을 하고 있으니 그게 특이한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투쟁"이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 싸움에 장소에 가 보면 나의 이 관찰은 쉽게 증명이 된다.  단순히 물리력이나 무력의 크기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돌로 쌓은 성벽을 방불케 하고 실제로 성벽의 구실을 하기도 하는 든든하게 무장된 버스를 타고, 조금 밀리고 얻어맞는다고 해도 아프지 않게 투구와 방패, 방충복을 착용하고, 쇠붙이로 심을 박은 곤봉과, 화학무기, 물대포로 무장을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나중에라도 잡아갈 "증거"를 채집한다며 온갖 카메라까지 준비한 쪽과, 종이컵 안에 촛불을 꽂아 들고 나온 쪽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싸우자고 나온 것인지 분명해지지 않는가.  당하고 억울해서 싸우는 걸 "투쟁"이라고 해야 어법이나 어감에 맞는데, 그러한 투쟁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싸우러 나온 모습이 꼭 "투쟁"을 하러나온 모습이니 보통 머리로는 쥐어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회가 아닌가.

 

국가권력이 왜 아주 많이 가진 사람들의 편을 드는 것인지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있는 사람들과 국가권력이 투쟁하는 상대는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별로 가진 게 없는 사람들 뿐 아니다.  가진 것도 조금 있고, 직접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해도 사회 대다수를 생각하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이야기하고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투쟁의 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진보"라는 용어가 그럴 듯 하게 들려 탐이 나는지, 그 말 대신 "좌"나 "빨"자를 붙여 그들을 매도하고, 트집을 잡아 수사하고, 구속하고, 기소하면서 그 과정에서 자기들이 정해놓은 룰도 지키지 않는 게 너무 흔하게 되지 않았나.  그렇게 법이 적용되는 걸 보면서 그 법이 투쟁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또 하나 있다.  왜 대다수라면서 국민들이 민주적인 선거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가.  문제, 정말로 큰 문제는 "착각"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착각이 힘있고 돈 많은 사람과 국가가 한 편이 되어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투쟁하는 게 가능하게 하는 이유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수단으로 벌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면 나도 돈이 많아지지 않겠나 하는 착각, 하버드대학을 나온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으면 내 아이도 하버드대학에 갈 수 있겠지 하는 착각이 없었다면 지난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의 결과에 대해 어떻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할 수가 있는가.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있을지도 모르는 투쟁의 싻을 자르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 국가권력이 그 투쟁에 앞장서 헌신하는 시대에 살기 위해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우리들이 그런 착각을 떨쳐버릴 수 있기를 진정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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