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빨간 속옷과 유가(儒家)의 가르침

반빈(半賓) 2010. 5. 25. 09:15

 

©반

 

"빨간 속옷과 유가(儒家)의 가르침"

 

재작년인가 중국을 여행하다가 상하이(上海)의 한 주택가 골목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과년한 여인의 속살에 내밀하게 마주 닿아있었을 속옷이 통째로 내걸렸으니 보기에 조금 민망하고 쑥스러웠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도 사진까지 찍어 보관했다는 걸 너무 탓하지 마시라.  심각한 관음증(voyeurism)을 앓아 훔쳐보듯이 그 속옷 뒤에 숨어있었을 몸뚱이를 상상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믿기 어려울지 몰라도 문득 유가(儒家)에서 가르치는 "인(仁)"과 "예(禮)"의 문제에 생각이 다다랐고, 그 이야기를 꺼낼 좋은 화두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행을 불러세우고 핀잔을 들을 걸 무릅쓰면서 카메라를 꺼내 찍어둔 것이다.  이 장면처럼 속옷이, 그것도 선명한 빨강색의 여자속옷이 일습으로 구색을 갖춰 덩그러니 내걸린 건 조금 특별했지만, 중국을 여행하다보면 세탁한 속옷을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긴 대나무 막대기로 꿰어 창문 밖으로 내걸어 말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유가의 예법이 생겨난 땅, 그 영향을 깊이 받지 않을 수 없었을 땅인 중국에서 이런 장면이 흔히 연출된다는 게 조금 이상하지 않은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꼭 그렇게 오랜 철학전통까지 가져다 대지 않더라도 그냥 수줍음이나 부끄러움을 생각한다면 어찌 태연하게 이런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논어(論語)》〈안연(顔淵)〉편에 기록되어 있듯이, 공자(孔子)님은 분명히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고 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보고 사진까지 찍어대면서 난리를 친 내 행동이 예에 철저히 어긋났던 것인지, 또 내 반응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런 장면을 연출해 나로 하여금 그런 비례를 범하게 한 여인도 예에 어긋난 짓을 한 것인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볼만 했다.  물론 유가의 가르침도 일정불변이 아니어서,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이 달랐다.  예를 들어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땅의 패권을 향해 여러 나라가 싸우면서 통일을 향해 매진하던 기원전 3세기까지, 즉 선진(先秦)시대의 가르침, 한대(漢代)에 들어서 통일제국의 통치이념을 제공하던 시기의 가르침, 훈고학과 경전주해에 몰두하던 당대(唐代)까지의 가르침, 그리고 소위 성리학(性理學) 또는 도학(道學)으로 알려진 새로운 유학이 성립된 후의 가르침이 각각 사뭇 달랐다.  때로는 사람을 억누르기도 하고 잡아매기도 하고, 또 해방시켜주기도 한 것이 유가의 가르침이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걸려있던 속옷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건 선진시대 유가의 가르침이었다.

 

우선 맹자(孟子)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군자는 부엌을 멀리한다(君子遠庖廚也)"는 말이 있다.  《맹자(孟子)》의 첫편인 〈梁惠王〉상편에 나오는데, 흔히 이 말을 전후맥락에서 떼어내어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말아야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근거로 부엌일은 여자의 몫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엉터리 해석이다.  우리 가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사내아이가 부엌에 들어가면 무엇이 떨어진다는 말도 아마 맹자의 이 말에서 연유한 게 아닌가 싶은데, 그것 역시 엉터리 주장에 불과하다.  군자가 왜 부엌을 멀리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 말의 전후맥락을 살펴보자.

 

맹자를 만나 무언가 배울 기회라고 생각한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당부한다.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에 대해 들었으면 합니다만…"

 

나라를 지혜롭게 다스려 제나라와 진나라를 각각 춘추시대 오패(五覇)의 위치로 이끌었다고 칭송을 받은 두 사람에 대해 물은 것이니 진선왕의 이 당부에는 "나도 무언가 조금 아는 사람"이라는 자랑이 들어있고, 그래서 질문 자체에 맹자와의 힘겨루기란 측면이 포함되어있다.  너나 네가 칭송하는 공자의 문하에서 그런 훌륭한 사람이 나왔느냐는 힐난으로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맹자가 대답한다.

 

    "공자님의 제자들은 환공과 문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로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듣지 못했습니다.  당부하신 말씀을 해드릴 방법이 없으니, 대신 [진정한] '왕'에 대해 말씀드려도 좋겠습니까?"

 

맹자가 어찌 제환공과 진문공에 대해 듣지 못했고, 아는 것이 없었을 것인가.  더구나 《논어(論語)》〈헌문(憲問)〉에 엄연히 "진문공은 사술이 있어 바르지 못하고(譎而不正), 제환공은 바르면서 사술이 없다(正而不譎)"는 공자의 말이 기록되어 있는 걸 보아도 공자의 문하에서 환공과 문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맹자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분명 삐딱하게 물어온 질문에 대해 삐딱하게 응답했을 뿐이고, 한편으로는 그 두 사람이 진정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 꼭 알려고 할 필요가 없겠다는 역사적 평가를 담았다.  아무튼 이렇게 서로 견제구를 하나씩 던지고나서 제선왕과 맹자의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루어진다.

 

    "어떤 덕을 갖춰야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나요?"

    "백성을 편안하게 하면 왕입니다.  [그런 덕을 갖추면] 무엇도 막을 수 없습니다."

    "과인같은 사람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시지요?"

    "호흘(胡齕)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왕께서 대청 위에 앉아 계실 때 소를 끌고 대청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을 보시고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으시니, 종(鐘)이 완성되어 낙성제사에 쓰려고 끌고 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왕께서 '그만 두거라.  벌벌 떠는 모습을 참아 볼 수가 없다.  마치 죄도 없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 같구나'하고 말씀하셨고, 그 사람이 '그러면 종의 낙성제사는 하지 말까요'하고 되물으니, '어찌 제사를 하지 않을 수 있느냐?  양 한 마리로 바꾸어 해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면 왕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왕께서 아까워서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왕께서 안타까워서 그랬다는 걸 압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백성이 있었습니다.  제나라가 작고 좁다고 해도어찌 소 한 마리를 아까워 했겠습니까?  벌벌 떠는 소가 마치 죄없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 같아 참을 수 없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양으로 바꾸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왕께서 아까워서 그랬다고 생각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 하셨으니, 그 뜻을 백성들이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왕께서 죄없이 죽으러 가는 게 마음 아파서 그러셨다면, 소나 양이나 다를 게 무엇입니까?"

 

이 말에 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웃음은 자신도 자신이 취한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었겠다.

 

    "정말 그게 무슨 마음이었지요?  재물이 아까워 양으로 바꾼 건 아니지만, 백성들이 내가 아까워서 그랬다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다."

 

선왕의 이 말에 맹자가 이렇게 결론을 내 정리한다.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仁)을 행하는 방법입니다.  그 소는 왕께서 보셨고, [그 소를 대체한] 양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짐승에 대한 된사람(君子)의 입장입니다.  살아있는 걸 보았으면 차마 죽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차마 그 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된사람은 부엌을 멀리합니다."

 

    이렇게 정리한 후에도 선왕과 맹자 사이의 대화는 백성이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왕의 언행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주제로 이어지면서 계속된다.  그러나 여기 소개한 이 이야기 한 꼭지는 "선생께서는 참으로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습니다"라는 맹자에 대한 선왕의 칭찬으로 끝이 난다.  간단히 말하면 먹기는 먹어야 하는데, 살아있는 것을 본 짐승이 죽어서 상에 오르는 것은 "인"의 방법이 아니니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않기 위해 부엌에 가까이 가지 말아야한다는 뜻이다.  맹자의 이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두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한다.  첫째는 내 눈으로 스스로 보고, 내 귀로 친히 들었다는 사실과 "인의 방법(仁術)"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의 문제이고, 둘째는 그런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먼저 스스로 보고 듣는 것이 "인(仁)"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아보자.  "인"은 "정명(正名)"과 함께 선진 유가사상의 핵심이 되는 개념이다.  흔히 "인자함"이나 "사랑"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그런 번역만을 가지고는 정확한 이해에 이르기 쉽지 않다.  어떻게 해야 인자한 것이고, 사랑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인"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뜻의 "정명"을 알아야 한다.  "정명"이 공자에게 무척 중요했다는 사실은 《논어》 여기저기에서 확인이 된다.  〈자로(子路)〉편에 기록된 공자와 자로의 대화가 좋은 예이다.  위(衛)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다 국사를 맡기려 하는데, 가시면 무슨 일을 먼저 하실 예정이냐는 자로의 물음에 "먼저 이름을 바르게 하겠다"고 대답하는데, 자로는 그 대답에 대해 조롱에 가까운 웃음으로 반응한다.  말하자면 "아니 선생님도 참 촌티를 내시네.  도대체 그걸 바르게 해서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정도의 반응을 보인 것이다.  공자가 제자 자로의 이러한 반응에 얼마나 당황했는지는, 또 공자에게 "정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계속되는 공자의 대답이 얼마나 길고 장황한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번 찾아보시라.  아무튼 공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기의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를 이름과 실질이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자신의 학습프로그램을 그런 분석의 토대 위에 세웠다.  다시 말하면, 극심한 사회적 혼란의 원인에 대한 분석을 담은 정명이론이 흔들리면 자신의 주장이 통째로 흔들릴 터인데, 그걸 자식과 가장 가까운 제자 몇 사람의 하나인 자로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롱하는 태도까지 보였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논어(論語)》〈안연(顔淵)〉편에 기록된 대화를 보자.

 

제나라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다스림(政)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임금이 임금이고(君君), 신하가 신하이고(臣臣), 아버지가 아버지이고(父父), 자식이 자식이면(子子) 다스려집니다"고 대답했다.  경공이 말했다. "좋은 대답입니다.  임금이 임금이 아니고(君不君), 신하가 신하가 아니고(臣不臣),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고(父不父), 자식이 자식이 아니면(子不子), 설령 곡식이 있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먹게 되겠습니까?"

 

〈옹야(雍也)〉편에는 더 재미있는 말이 실려있다.

 

고(觚)가 고(觚)가 아니면, 그게 고(觚)냐, 그게 고(觚)냐?

 

고(觚)는 청동기로 만든 술을 담는 제기인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天圓地方)는 중국 고대 천문의식을 담아 정사각형의 아랫부분이 위로 갈수록 점차 둥글게 변해 맨 위는 커다란 원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박물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제기이니 한 번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시기 바란다.  그런데 이 제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공자가 이렇게 한탄을 자아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그런대로 그럴 듯한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는 네모난 받침을 점차로 둥글게 다듬어내어 제기를 만드는 일이 성가시고 힘이들어 아예 위도 아래도 둥글게 만드는 일이 많아진 것을 한탄했다는 설명이다.  사실 박물관에 "고"라는 이름을 달고 진열되어 있는 제기중에 바닥이 네모라기보다는 원에 가까운 것도 상당히 눈에 뜨인다.  제사의 행위가 하늘과 땅의 뜻을 바르게 받을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를 위해 사용되는 제기의 모습이 엉터리이니 잘못됐다는 뜻이다.  또 이 제기는 대개 술 두 되 정도를 담을 수 있는 크기여야 하는데, 제사 후 제주를 더 많이 마시기 위해 점점 크게 만들었고, 그런 세태가 공자의 한탄을 불렀다는 설명도 있다.  어쨌든 이름과 실질이 부합해야한다는 공자의 뜻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 쉽지 않은 것은 이름과 실질을 어떻게 부합하게 하느냐는 방법의 문제이다.

 

바로 거기서 "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유가의 가르침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친(親)"이라고 한다.  피를 나누었다는 뜻이니, 둘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가깝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반영할 수 있으면 예에 합당하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의(義)"라고 한다.  이 말을 "의로움"이라는 말로 번역하거나 혹 영어로 "justice" 또는 "rightness"로 번역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임금과 신하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에 그런 용어로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것이 더 쓸모있을 듯 하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별(別)"이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구분이 있다든지" 등의 언어로 구체화하려는 노력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구분이 있어서 어떻게 해야하는 건데라는 질문이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가장 이상적인 부부의 관계를 "별"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생각해 둔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도 이 맥락에서 등장하는 말이다.  흔히 이 말을 어른(長)과 아이(幼) 사이에 순서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한 형제 중에 나이의 많고 적음을 알고 그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냥 형이 먼저하고 아우가 나중에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면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의 "서(序)" 역시 "형제간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에 붙은 이름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친구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신(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물론 이 글자는 "신의" 또는 "믿음"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그런 해석은 유가의 가르침을 너무 좁게 이해한 것이다.  "믿음"말고도 이상적인 친구 사이에 지키고 가꾸어여할 많은 덕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러한 설명에 대해 "이상적인 관계"라는 불확실한 말로 핵심을 피해갔다고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건 내가 그렇게 한 게 아니고 공자님이 그렇게 했다. 《논어》에 기록된 많은 대화에서 제자들은 확실한 지침을 받기 위해 반복해서 "인(仁)"이 무엇인지, "효(孝)"가 무엇인지, "정(政)"이 무엇인지, "예(禮)"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스승은 제자들의 그런 답답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지 않고 관계에 합당하게 하라는 원칙을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반복한다.  "효"에 대한 질문에 "얼굴빛이 어렵다(色難也)"라고 한 것이 《논어》를 통해 구체적인 행동방법의 제시에 가장 가까이 간 대답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모에게 무얼드리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기껍고 즐거운 표정으로 드려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도록 하라는 뜻이니 그만하면 매우 구체적이다.   물론 공자님이 일부러 핵심을 피한 것은 아니다.  "관계에 합당한 행동"이라는 말의 기초에는 인성(人性)에 대한 인식론적인 낙관이 들어있다.  다시 말해 내가 이 사람과의 관계를 정확히 (다시 말해서 정명이론에 합당하게) 이해한다면 그 관계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는 당연히 알 수 있다는 낙관론이 들어있다.

 

"인(仁)"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설명한 것이 좋은 예이다.  "예"는 항상 사람들의 사이의 행동원칙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관찰하고 행동방식을 결정할 게 아니라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그 관계에 합당한 몸가짐을 가지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인"에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온갖 경우의 수가 포함되어 있다.  아내와 관계, 남편과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제자들과의 관계, 스승과의 관계, 매일 보는 사람과의 관계, 일주일에 한두 번 보는 사람과의 관계, 일년에 한번 볼까말까한 사람과의 관계, 학교를 같이 다닌 사람과의 관계, 친구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 심지어 한번 만나지도 않았고, 만날 것 같지도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까지를 포함한다.  물론 그런 많은 경우의 수에는 경중의 차이와 원근의 차이가 있다.  내 몸가짐이나 행동은 그렇게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야기를 맹자의 부엌으로 되돌리자.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않았다.  얼굴을 본 짐승과의 관계가 얼굴을 보지 않은 짐승과의 관계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인술(仁術)"의 근본이라는 주장이 담겨있는 것이다.  내 앞에 돈이 없어 굶고 있는 사람이 둘 있고, 내 주머니에는 단돈 만 원밖에 없다고 할 때, 한 사람은 매일 보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십년에 한번 볼까말까 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 그 돈 만원을 주어야할까.  이 질문에 대한 맹자나 공자의 대답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에 대한 내 행동방식을 결정할 때, 얼굴을 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매우 중요한다.  본 적이 있다면 몇 번을 보았고, 얼마나 자주 보는 사이인지가 또 중요해진다.

 

이제 이야기를 창밖으로 내걸린 빨간속옷으로 되돌리자.  속옷의 주인인 그 여자는 나와 면식이 없다.  그러므로 그 여자와 나 사이는 "예"고 뭐고 따질 게 없는 관계라는 것이 생각이 유가의 "예"이다.  잘 아는 사이라면 감출 것을 감추는 것이 "예"이고 "인의 방법"이겠지만,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기에 속옷을 그렇게 통째로 내걸어도 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런 장면을 보았다고 해서 내가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라"는 유가의 가르침을 거스른 것도 아니다.  이 설명에 과장이 들어있다는 건 물론 바로 인정한다.  그러나 핵심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예"에 합당한 방법을 찾아 "예"를 설명한답시고 우물쭈물하다가 오히려 "유가의 예"를 잘못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유가의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다.  중생이 모두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華嚴)불교의 "연기(緣起)"사상이나, 모두에게 두루두루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한다는 묵자(墨子)의 "겸애(兼愛)"사상에서 보면 유가의 가르침에서 이야기하는 세밀하게 구분된 인간의 관계는 혼란의 해결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여자 속옷 한 번 보고 참 별 생각을 다했다.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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