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詩選) 240

“깊은 가을의 아름다움은 자세히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사진을 여러 장 찍으니 늙어 눈이 침침해진 모양이라 놀리는 친구들이 있어 오언절구 한 수를 짓고 우리말로 옮겨 회답합니다. 半賓 〈深秋之美不必細看〉 五彩配藍天,秋情自盎然。 輝光炫老目,禿筆塞詩篇。 清晰為何求,朦朧已可憐。 只需一二句,紅葉代雲箋。 반빈 “깊은 가을의 아름다움은 자세히 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섯 가지 색채가 푸른 하늘과 어울리니 가을의 정취가 스스로 풍성합니다. 빛나는 광채가 늙은 눈을 어지럽히고 털 빠진 붓이 시편을 가로막네요. 맑아 뚜렷한 걸 무얼 위해 구합니까? 어렴풋해도 벌써 사랑스러운 것을. 한 두 구절만 있으면 되겠지요 붉은 이파리로 편지지를 대신할 테니까요.

시선(詩選) 2020.11.19

〈오랜 친구 원순의 영전에서 아프게 웁니다〉

오랜 친구 원순이 타계했다는 비보를 듣고 칠언율시 한 수를 짓고, 다시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半賓 〈故友元淳靈前痛哭〉 行善如何僅半命, 留余另半哭元淳。 埋頭經世忘為我, 獻計厚生求利民。 弱冠已懷知洛書, 從心尚遠棄紅塵。 先驅不免憂孤獨, 積德輪迴必有鄰。 〈오랜 친구 원순의 영전에서 아프게 웁니다〉 좋은 일 행함을 어찌 천명의 반에서 그치고 나머지 반을 내게 남겨 님을 위해 울게 합니까 세상 경영에 마음을 다해 자신을 잊었고 삶을 든든히 할 방법을 찾아 사람들을 도우셨지요 약관에 이미 세상의 큰 계획을 배우려는 뜻을 품었지만 마음 따를 나이가 아직 멀었는데 먼지같은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앞서 달리셨으니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덕을 쌓았으니 다시 태어나서는 반드시 이웃이 있을 겁니다

시선(詩選) 2020.11.16

"지려고 뜨는 해"

반빈 "지려고 뜨는 해" 그믐 부근 며칠 아침 해를 찬찬히 살펴봅니다 자욱한 안개 뒤로 슬며시 오르며 보이다 말다 숨바꼭질로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합니다 지려고 뜨는 해인 것 같아서 마음이 더 쓰이는 건지 빠뜨린 건 없나 그냥 가도 되나 망설이듯 망설이듯 희뿌연 얼굴이 아련합니다 질 해는 져야합니다 밤 지나 같은 해가 다시 뜬다 해도 분명히 다를 겁니다 (병신년 세밑에)

시선(詩選) 2020.11.16

“歲寒曲 (추운 시절의 노래)”

갑오년이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이 더 지났습니다. 갑오년을 맞으며 한시를 한 수 썼던 게 기억납니다. 소람하세요. 〈歲寒曲〉 風簌簌,能不觫,家遠人自惑, 雲陰陰,客喑喑,日斜當痛飲。 孤燈雖昏奔萬里,睡夢恐僅爬一寸。 鼓凍殘聲漫縈繞,歲寒遊子仍交困。 (二賓寫於甲午前夕) 〈세한곡〉 풍속속, 능불속, 가원인자혹, 운음음, 객음음, 일사당통음. 고등수혼분만리, 수몽공근파일촌. 고동잔성만영요, 세한유자잉교곤. (이빈사어갑오전석) 〈추운 시절의 노래〉 휘익 휘이익 부는 바람, 떨지 않을 수 있을까? 집은 멀고 나는 홀로 갈팡질팡. 침침한 구름 속, 목소리 잃은 객— 해가 기울면, 물론 통쾌히 마셔야겠지. 외로운 등불 희미해도 만리를 달리지만, 깊은 잠 꿈속에서는 한 치나 길 수 있나 두렵다. 북소리 얼어붙어 잦아..

시선(詩選) 2014.07.25

"정말?"

잠시 귀국한 사이 마침 고등학교 졸업 40주년 기념 "추억의 수학여행"이란 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 많이 만났습니다. 만찬 중 회장의 부탁으로 즉석에서 이런 시를 하나 써 읽었습니다. ---------- "정말?"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에 정말? 아아, 그랬구나. 참 잘 됐네. 축하해. 내 술 한 잔 살께. 정말? 아아, 그랬구나. 걱정이 많았겠다. 지금은 괜찮지? 그래도 그만한 게 다행이야. 힘내. 정말? 벌써 세월이 그렇게 지났나? 이제 시집만 보내면 되겠네. 짝은 있대? 정말? 그새 손자를 봤어? 다행히 할머니 닮았지? 그런데 할머니하고 자는 기분은 어때? 정말? 나는 따님을 모시고 온 줄 알았어. 비결이 뭐야? 늘 이고 다니시는 모양이지? 아무튼 부러워. 정말? 그래, ..

시선(詩選) 2014.06.02

"동짓날 개기월식"

"동짓날 개기월식"(*) 동짓날 밤 보름달이 뜬다는 게 우선 흔치 않은 일이겠지만 바로 그 밤 그 보름달이 우리들 그림자로 가득 찬다는 개기월식은 사백 오십 몇 년 만에 처음이랍디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그렇게 한 열 번은 더 세어야 하는 길고 긴 세월 동안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잔치라길래 핑계 삼아 술 부어가며 기다렸지요. 늘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하다못해 구름이라도 잔뜩 끼는 계절인데 달 뜨기를 기다려 어쩌자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월식은 못 본다고 해도 마신 술은 남지 않겠느냐고 대꾸했습니다. 억지였지요. 이번엔 마신 술이 없어지지 어떻게 남느냐는 핀잔이 왔습니다. 왜 말꼬리를 잡느냐는 목청 돋운 핀잔으로 되돌려 준 후 헤헤 웃음을 섞어 얼렁설렁 넘겼습니다. 잠들 시간을 훌쩍 넘어서..

시선(詩選) 2010.12.24

"북한산"

산행은 북한산으로 더 많이 했으면서 지리산 산행에서 쓴 시만 한 수 올릴 수 없어서 북한산 걸은 후 쓴 시도 하나 올리지요. ----- 북한산 대남문 주위로 일요일 아침 내내 새소리는 없이 사람들 아우성이 가득하지만 그 사람소리가 바로 새소리입니다. 멀리로 여기저기 가지런히 줄을 맞추어 늘어선 도심의 묘비들을 뒤로하고 바람을 찾아 북한산을 오른 것이 새들이고 사람들입니다. 나도 너를 모르고 너도 나를 모르지만 서로 재잘댈 수 있는 것이 한가지입니다. (2002년 6월)

시선(詩選) 2010.11.23

"지리산"

벌써 여러 해 전에 쓴 습작입니다. 고향떠나 살기 시작한 후로 귀국할 기회가 있으면 꼭 친구들을 졸라 산행을 합니다. 지리산 "종주"라는 것도 여러 번 했지요. 한 7-8년 전에 쓴 걸 다시 보니 기억에 새롭습니다. ---------- "지리산" 이른 저녁 뱀사골 대피소 거친 숨소리 비릿한 땀 냄새 사이에서 여섯 살 쌍둥이 자매를 만났습니다 엄마아빠를 따라 지리산 주능 백리길을 걷는다는데 울퉁불퉁 바윗길은 그냥 걸어도 해질녘 아우성 속에서 잠을 청하려면 엄마 아빠 품을 하나씩 차지해야 한답니다 내일아침부터 이틀 여섯 살 쌍둥이 뒤꽁무니를 따라 이번 산행은 동요를 부르며 하겠습니다. (2002년 6월)

시선(詩選) 2010.11.15

"가을 벚나무"

재작년인지 가을나무를 보고 써 두었던 시 한 수를 이번 가을 바람에 선 바로 그 나무를 다시 보며 조금 고쳤습니다. ----- "가을 벚나무" 끝으로 치닫는 길목에 선 저 손짓도 꽃이라고 부르지요 향긋하지도 화사하지도 않고 흰 꽃잎 흩날린 그 때 같은 흥분도 흥겨움도 없지만 못할 것도 없지않나요 일찌감치 붉게 탄 꼭대기와 바래가는 초록을 움켜쥐고 버틸 때까지 버티려는 안간힘 사이로 여긴 맑게 저긴 깊게 때론 진하게 때론 옅게 갖가지 갈색 노랑색이 어우러진 게 꽃처럼 좋지 않아요 하긴 비내리고 바람불면 흩어져 없어질 것도 한 이치 아닌가요 저 손짓도 꽃이라고 부르지요 마음에 새겨두기에는 오히려 더 좋은 듯 하네요 (2007년 11월 청우재에서) (2010년 11월 수정)

시선(詩選) 2010.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