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개기월식"(*)
동짓날 밤
보름달이 뜬다는 게
우선 흔치 않은 일이겠지만
바로 그 밤 그 보름달이
우리들 그림자로 가득 찬다는
개기월식은 사백 오십
몇 년 만에 처음이랍디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그렇게 한 열 번은 더 세어야 하는
길고 긴 세월 동안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잔치라길래
핑계 삼아
술 부어가며
기다렸지요.
늘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하다못해 구름이라도 잔뜩
끼는 계절인데 달 뜨기를 기다려
어쩌자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월식은 못 본다고 해도
마신 술은 남지 않겠느냐고
대꾸했습니다. 억지였지요.
이번엔 마신 술이 없어지지
어떻게 남느냐는 핀잔이 왔습니다.
왜 말꼬리를 잡느냐는
목청 돋운 핀잔으로
되돌려 준 후
헤헤 웃음을 섞어
얼렁설렁 넘겼습니다.
잠들 시간을 훌쩍 넘어서는 사이
이태백을 불렀습니다.
아직 달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술잔 들어 청하려는 달이 나타나기를,
찬 술잔이 비고, 다시 채워지듯
숨었다 나타나기를 기다리기에
더없이 좋은 짝인 듯했지요.
깊은 밤 창밖
뿌연 구름 안개 뒤로
보일 듯 말 듯 걸려 있었습니다.
벌써 반도 넘게 지워져버린
달을 보고 있으니
꼭 몇백 년 전 사람들 쉬던 숨을
내가 쉬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은 무얼 근심했을까.
기쁜 일도 좀 있었을까.
얼마 후 임진년이면 닥쳐올 난리를
까맣게 모른 채 흥청망청 했을까.
미리 내다보고 전전긍긍 했을까.
아니면 하루하루 끼니걱정에
그런 생각은 아예 접고 살았을까.
아마 너나 나처럼
술잔 들고 달을 집적거리며
그냥 한 세상 지낸 사람도 있었을 테지—
이태백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한 오백 년쯤 뒤 어느 동짓날엔
떠오른 보름달이
다시 우리 그림자로 차지 않겠습니까.
그럼 누군가 또 그 달을 붙들고
또 이태백을 부르겠지요.
그 사람은 누구의 숨을 쉴까요.
어쩌자고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대포쏘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
누구 좋으라고 하는
누구에게 쏘는 연습이었는지
고개 갸우뚱거리며
이지러졌다 다시 차는 달에게도
이태백에게도 캐묻지 않을까요.
내게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하지요?
(2010년 동짓날 밤에)
(*) 2010년 동짓날의 개기월식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오밤중에 진행되었습니다. 지구 그림자에 거의 모두 잠식을 당해 겨우 그믐달 만큼 남게 되었을 때는 이미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