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詩選) 226

“歲寒曲 (추운 시절의 노래)”

갑오년이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이 더 지났습니다. 갑오년을 맞으며 한시를 한 수 썼던 게 기억납니다. 소람하세요. 〈歲寒曲〉 風簌簌,能不觫,家遠人自惑, 雲陰陰,客喑喑,日斜當痛飲。 孤燈雖昏奔萬里,睡夢恐僅爬一寸。 鼓凍殘聲漫縈繞,歲寒遊子仍交困。 (二賓寫於甲午前夕) 〈세한곡〉 풍속속, 능불속, 가원인자혹, 운음음, 객음음, 일사당통음. 고등수혼분만리, 수몽공근파일촌. 고동잔성만영요, 세한유자잉교곤. (이빈사어갑오전석) 〈추운 시절의 노래〉 휘익 휘이익 부는 바람, 떨지 않을 수 있을까? 집은 멀고 나는 홀로 갈팡질팡. 침침한 구름 속, 목소리 잃은 객— 해가 기울면, 물론 통쾌히 마셔야겠지. 외로운 등불 희미해도 만리를 달리지만, 깊은 잠 꿈속에서는 한 치나 길 수 있나 두렵다. 북소리 얼어붙어 잦아..

시선(詩選) 2014.07.25

"정말?"

잠시 귀국한 사이 마침 고등학교 졸업 40주년 기념 "추억의 수학여행"이란 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 많이 만났습니다. 만찬 중 회장의 부탁으로 즉석에서 이런 시를 하나 써 읽었습니다. ---------- "정말?"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에 정말? 아아, 그랬구나. 참 잘 됐네. 축하해. 내 술 한 잔 살께. 정말? 아아, 그랬구나. 걱정이 많았겠다. 지금은 괜찮지? 그래도 그만한 게 다행이야. 힘내. 정말? 벌써 세월이 그렇게 지났나? 이제 시집만 보내면 되겠네. 짝은 있대? 정말? 그새 손자를 봤어? 다행히 할머니 닮았지? 그런데 할머니하고 자는 기분은 어때? 정말? 나는 따님을 모시고 온 줄 알았어. 비결이 뭐야? 늘 이고 다니시는 모양이지? 아무튼 부러워. 정말? 그래, ..

시선(詩選) 2014.06.02

"동짓날 개기월식"

"동짓날 개기월식"(*) 동짓날 밤 보름달이 뜬다는 게 우선 흔치 않은 일이겠지만 바로 그 밤 그 보름달이 우리들 그림자로 가득 찬다는 개기월식은 사백 오십 몇 년 만에 처음이랍디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그렇게 한 열 번은 더 세어야 하는 길고 긴 세월 동안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잔치라길래 핑계 삼아 술 부어가며 기다렸지요. 늘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하다못해 구름이라도 잔뜩 끼는 계절인데 달 뜨기를 기다려 어쩌자는 것이냐고 묻더군요. 월식은 못 본다고 해도 마신 술은 남지 않겠느냐고 대꾸했습니다. 억지였지요. 이번엔 마신 술이 없어지지 어떻게 남느냐는 핀잔이 왔습니다. 왜 말꼬리를 잡느냐는 목청 돋운 핀잔으로 되돌려 준 후 헤헤 웃음을 섞어 얼렁설렁 넘겼습니다. 잠들 시간을 훌쩍 넘어서..

시선(詩選) 2010.12.24

"북한산"

산행은 북한산으로 더 많이 했으면서 지리산 산행에서 쓴 시만 한 수 올릴 수 없어서 북한산 걸은 후 쓴 시도 하나 올리지요. ----- 북한산 대남문 주위로 일요일 아침 내내 새소리는 없이 사람들 아우성이 가득하지만 그 사람소리가 바로 새소리입니다. 멀리로 여기저기 가지런히 줄을 맞추어 늘어선 도심의 묘비들을 뒤로하고 바람을 찾아 북한산을 오른 것이 새들이고 사람들입니다. 나도 너를 모르고 너도 나를 모르지만 서로 재잘댈 수 있는 것이 한가지입니다. (2002년 6월)

시선(詩選) 2010.11.23

"지리산"

벌써 여러 해 전에 쓴 습작입니다. 고향떠나 살기 시작한 후로 귀국할 기회가 있으면 꼭 친구들을 졸라 산행을 합니다. 지리산 "종주"라는 것도 여러 번 했지요. 한 7-8년 전에 쓴 걸 다시 보니 기억에 새롭습니다. ---------- "지리산" 이른 저녁 뱀사골 대피소 거친 숨소리 비릿한 땀 냄새 사이에서 여섯 살 쌍둥이 자매를 만났습니다 엄마아빠를 따라 지리산 주능 백리길을 걷는다는데 울퉁불퉁 바윗길은 그냥 걸어도 해질녘 아우성 속에서 잠을 청하려면 엄마 아빠 품을 하나씩 차지해야 한답니다 내일아침부터 이틀 여섯 살 쌍둥이 뒤꽁무니를 따라 이번 산행은 동요를 부르며 하겠습니다. (2002년 6월)

시선(詩選) 2010.11.15

"가을 벚나무"

재작년인지 가을나무를 보고 써 두었던 시 한 수를 이번 가을 바람에 선 바로 그 나무를 다시 보며 조금 고쳤습니다. ----- "가을 벚나무" 끝으로 치닫는 길목에 선 저 손짓도 꽃이라고 부르지요 향긋하지도 화사하지도 않고 흰 꽃잎 흩날린 그 때 같은 흥분도 흥겨움도 없지만 못할 것도 없지않나요 일찌감치 붉게 탄 꼭대기와 바래가는 초록을 움켜쥐고 버틸 때까지 버티려는 안간힘 사이로 여긴 맑게 저긴 깊게 때론 진하게 때론 옅게 갖가지 갈색 노랑색이 어우러진 게 꽃처럼 좋지 않아요 하긴 비내리고 바람불면 흩어져 없어질 것도 한 이치 아닌가요 저 손짓도 꽃이라고 부르지요 마음에 새겨두기에는 오히려 더 좋은 듯 하네요 (2007년 11월 청우재에서) (2010년 11월 수정)

시선(詩選) 2010.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