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12)
"두보(杜甫, 712-770) 이야기 (1): 시인의 습유(拾遺)라는 이름표"
중국의 고전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공부해야하는 작가나 시인이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같은 사람을 여러가지 이름으로 알아야 하니 좀 성가시기도 합니다. 그냥 두어 가지 호칭을 더 공부해야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심한 경우는 열 개를 훌쩍 넘어 스무 가지 이름표를 달았던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칭 하나하나의 의미나 그러한 호칭이 생기게 된 연유를 공부하다 보면 재미있는 걸 많이 알게 되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중국어로 이름을 명자(名字)라고 하는데 이는 명(名)도 있고 자(字)도 있어서 그 두 가지가 합쳐져 만들어진 명사입니다. 명보다 자로 알려진 사람도 상당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로 통했다 (以字行)"라고 하는데, 내 선친이 그랬습니다. 선친의 형제들과 달리 이름에 돌림자가 없어서 의문이었는데, 나중에 족보를 보니 "자로 통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호칭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게 호(號)인 듯합니다. 아호(雅號)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스스로에게 주어 어느 시점 자신의 정서나 가치관을 담는 자호(自號)도 있지만, 스승이나 친구가 지어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도 여러 개의 이름표가 있습니다. 책상에 정신 산란하게 여러 권의 책을 늘어놓고 이 책에서 조금 저 책에서 조금 베끼고 인용하는 식의 공부를 지양하라는 뜻에서 스승이 지어주신 호가 일서(一書)입니다. 포틀랜드로 직장을 정하고 이사와 보니 늦가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 봄까지 늘 부슬비가 내리는 날씨였습니다. 그것이 지긋지긋해 지은 호가 청우재(聽雨齋)입니다. 좋아도 싫어도 빗소리를 들어야 했으니까요. 요즈음 사용하는 반빈(半賓)은 객지 생활이 30년을 훌쩍 넘어 고향에서 산 세월보다 밖에서 산 세월이 길어지면서 쓰게 되었습니다. 살고 있는 객지에서도 반쯤은 손님 신세, 잠시 귀국해 고향에 있어도 반쯤은 손님 대접을 받는 신세에 대한 탄식을 담은 이름표입니다. 하잘 것 없는 나도 대여섯 개의 이름표를 지니게 되었으니 중국의 시인, 문장가에게 이름표가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중국의 시인 두보(杜甫)는 "시성(詩聖)"이라고 불립니다. 일생의 한가운데 안록산의 난을 겪은 기구한 삶, 그 난리통에 미관말직을 하며 산 가난한 삶의 번민, 또 그 번민에 투영되는 나라의 쇠퇴를 보는 회한을 시에 담았습니다. 그 주옥같은 작품을 통해 깊이 사색했으니 "시성"은 참으로 두보의 삶에 걸맞는 이름표라고 하겠습니다. 두보는 또 사실(寫實)적인 태도로 시를 통해 시대의 참상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고 해서 "시사(詩史)"라고도 불립니다. 시를 통해 역사를 서술했다는 뜻이겠습니다. "시성"이든 "시사"든, 모두 두보의 업적에 어울리는 호칭입니다. 그러나 그런 호칭은 그의 시를 기려 훗날 세워진 중국문학사의 기념비일 뿐입니다. 그런 호칭에 비하면 두보의 삶 속에서 실제로 사용된 이름표는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두보는 자(字)를 "자미(子美)"라고 했습니다. 그건 이름(名)인 "보(甫)", 즉 "좋은 남자", "아름다운 남자"라는 뜻을 다른 표현에 다시 담아 자를 짓는 중국의 오랜 관습을 따라 지은 것이니 논외로 쳐도 되겠습니다. 나머지 이름표는 하나 같이 소박합니다. 예를 들어 조상이 살던 곳의 지명을 따른 "두릉(杜陵)"이나 그 부근의 작은 언덕에 살았다는 사실을 담은 "소릉(少陵)"이 모두 그렇습니다. 이런 이름표가 붙은 후에 생겼던 이름표도 하나같이 비슷한 정서를 표현합니다. 이렇다 할 벼슬을 하지 못한 미욱한 사람이라는 뜻의 "포의(布衣)", 한데에 사는 늙은이라는 뜻의 "야로(野老)" 등 자조에 가까운 자칭이 따랐습니다. 초라한 초가집에 살았다고 해서 붙인 "초당(草堂)"이라는 이름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중에 공부(工部)에서 원외랑(員外郞)이라는 6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했다는 연유로 붙여진 "공부"가 그 중 체면을 세운 이름표처럼 들리지만, 이 역시 그리 내세울 만한 벼슬도 아니었습니다. "원외"라는 말이 정원을 넘어서 허락한 벼슬자리라는 뜻이니 요즈음 말로 하면 "비정규직"이라는 냄새가 나는 이름표입니다. "시성"이나 "시사"라는 호칭과는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 중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름표가 "습유(拾遺)"입니다. "습유"는 "주울 습(拾)"에 "남길 유(遺)"이니 글자의 뜻대로 읽으면 "남긴 걸 줍는다"는 뜻으로, 당나라 때 관직의 하나입니다. 문하성(門下省)에 속한 직책을 좌습유라고 하고, 중서성(中書省)에 속하면 우습유라고 했는데, 둘 다 그리 높은 직책이 아니어서 8품에 해당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무얼 남기길래 그걸 주우라고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이 직책은 참으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이나 임금의 뜻을 담은 문서에 무언가 부족한 것, 빠뜨린 것이 있는지 살피고 그런 게 발견되면 고칠 수 있도록 지적해야하는 직책이었고, 그래서 "간관(諫官)"의 하나였습니다. 이 벼슬은 송(宋)대에 이르러서는 "정언(正言)" 으로 개칭되었으니 바로 "바른 말을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습유"를 "Reminder"라고 번역합니다. 임금이 빠뜨린 것, 잘못한 것을 찾아 일깨워 주는 직책이라는 뜻으로 상당히 합당한 번역이라 평하고 싶습니다.
임금의 말이나 행동이 무언가가 부족하고 잘못될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직책이니 그런 제도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참 흥미롭고, 나아가서는 부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어마어마한 책무를 겨우 8품에 해당하는 하급 벼슬아치의 어깨에 얹어 놓았다는 걸 생각하면 실제로는 구색을 맞추려고 했을 뿐 정말로 "남긴 걸 찾아 주워라"하는 뜻은 아니지 않았나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문제는 두보 같이 충직한 사람이 그 직책을 맡게 되는 경우였습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만든 제도라는 설명이 그에게 먹힐 리 없었겠기 때문이지요.
두보는 상당한 곡절 끝에 좌습유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록사의 반란군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진입하는 상황이 되자 임금은 소위 "몽진(蒙塵)", 즉 피난을 하게 됩니다. 임금이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의 어휘로 이렇게 표현한 걸 보아도 총망하게 떠난 황망한 길이었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너무 서둘러 떠난 피난길이라 많은 신하들이 임금의 몽진에 동행하지 못하고 장안에 남아있다가 안록산 반란군에게 붙들렸고, 그 중 작지 않은 수가 그 반란정부에서 직책을 맡기도 했습니다. 상당한 위협 아래 불가피하게 맡은 관직이라고 해도 그걸 응낙했다는 사실로 해서 지조나 기개를 의심받게 될 상황이었음을 또한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두보 역시 장안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두보가 안록산 아래서 벼슬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게 꼭 두보의 절개 때문이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 때까지 두보는 정말로 하급의 관리에 불과했고, 안록산이 그에게 관심을 두어 데려다 억지로 관직을 맡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숙종이 즉위한 이듬해, 즉 지덕(至德) 2년 (757)년에 이르러 피난 중인 당의 조정은 영무(靈武)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봉상(鳳翔)에 이르렀으니, 바로 오늘날의 섬서(陝西)성 봉상현입니다. 이 때 두보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해 봉상으로 가서 당의 조정에 합류했습니다. 전투지역을 통과해 임금이 있는 곳으로 간 충심을 인정받았는지, 두보는 그 피난정부에서 좌습유라는 벼슬을 받게 되었습니다. 8품에 불과했다고 해도, 그 벼슬을 받은 경위나 벼슬이 요구한 책무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습니다.
두보가 습유라는 직책을 그냥 조정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형식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무언가 임금이 떨어뜨리고 빠뜨린 것을 주우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중 조정이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했다는 이유로 방관(房琯)을 처치하려 하자, 두보는 그것을 임금이 "남기는" 실수로 판단하고 주워 들었습니다. 사실 그 때의 조정은 전임 황제인 현종(玄宗)의 사람들과 재위하고 있는 숙종(肅宗)의 사람들 사이의 알력으로 긴장되어 있었고, 그래서 두보는 방관을 처치하려는 것이 패전의 책임을 묻기보다는 전임 황제의 사람을 제거한다는 새로 득세한 사람들의 의중에서 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방관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나섰습니다. 그게 임금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두보는 그 일로 "습유"의 직책을 떠나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말로 하면 긴 휴가를 얻은 것이고, 조금 나쁘게 이야기하면 직위해제가 되어 백수가 되었던 것이지요.
숙종의 입장에서 볼 때는 충직한 신하를 잃은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중국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두보가 벼슬을 잃어 생긴 그 시간을 이용해 가족들을 찾아 멀리 여행했고, 그 길에서 경험한 참담한 현실을 바탕으로 "북쪽으로의 여행길(北征)"이라는 작품을 포함해 중국문학사의 기념비를 여럿 더 세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정"은 140행의 긴 오언고시로 대부분 일부를 발췌 소개할 뿐 전체를 대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한 번 읽어 보시지요.
杜甫 두보
北征 "북쪽으로의 여행길"
北歸至鳳翔,墨制放往鄜州作。
조정이 북쪽으로 돌아와 봉상에 이르렀을 때 황제의 명으로 부주에 가서 지었습니다
皇帝二載秋, 임금님(숙종황제) 즉위하시고 이듬해 가을
閏八月初吉。 윤 팔월 초하루
杜子將北征, 소신 두보는 북쪽으로 여행길에 올라
蒼茫問家室。4 전란 중 아픔을 겪는 집 식구들을 찾았습니다
維時遭艱虞, 어렵고 근심이 많은 때라
朝野少暇日。 조정 안팎에 한가한 날이 없던 때였는데
顧慚恩私被, 소신 혼자만 은혜를 입어
詔許歸蓬蓽。8 집으로 돌아가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拜辭詣闕下, 궁궐에 가서 하직을 고하니
怵惕久未出。 황공하고 불안해 오래 나오지 못했습니다
雖乏諫諍姿, 과감하게 간언을 올리는 기백은 없었지만
恐君有遺失。12 임금께서 무언가 빠뜨리실까 걱정했습니다
君誠中興主, 임금께서는 참으로 중흥을 이룰 군주이시니
經緯固密勿。 날줄과 씨줄을 모두 조밀하게 만드십니다
東胡反未已, 동쪽 오랑캐의 반란이 아직 끝나지 않아
臣甫憤所切。16 소신 두보는 참으로 분노합니다
揮涕戀行在, 눈물로 행궁 쪽을 바라보니
道途猶恍惚。 길 떠나는 마음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乾坤含瘡痍, 하늘과 땅 사이가 상처로 가득하니
憂虞何時畢。20 근심 걱정이 언제나 끝날까요
靡靡逾阡陌, 터벅터벅 밭고랑 길을 걷는데
人煙眇蕭瑟。 사람도 밥 짓는 연기도 드물어 쓸쓸합니다
所遇多被傷,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처를 입어
呻吟更流血。24 신음하며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回首鳳翔縣, 고개를 돌려 봉상현을 보니
旌旗晚明滅。 깃발이 나부끼는 저녁입니다
前登寒山重, 앞으로 겹겹 차가운 산길을 오르는데
屢得飲馬窟。28 말 먹이는 물구덩이가 여럿 보입니다
邠郊入地底, 빈주의 들판은 땅이 낮아
涇水中蕩潏。 경수의 물이 넘쳐 흐릅니다
猛虎立我前, 사나운 호랑이가 내 앞에 섰는데
蒼崖吼時裂。32 그 포효에 푸른 절벽이 갈라지는 듯합니다
菊垂今秋花, 흐드러진 국화는 지금 피는 꽃인데
石戴古車轍。 돌길에 새겨진 건 지난 날의 수레바퀴 자국
青雲動高興, 푸른 구름이 흥취를 돋우지만
幽事亦可悅。36 숨어 은거하는 일도 역시 즐겁겠지요
山果多瑣細, 산 과실은 거의 작고 하찮지만
羅生雜橡栗。 도토리와 밤도 늘어서서 자랍니다
或紅如丹砂, 어떤 것은 붉은 흙같은 빨간 색이고
或黑如點漆。40 어떤 것은 옻칠을 한 듯 검습니다
雨露之所濡, 비와 이슬에서 자양분을 얻어
甘苦齊結實。 단 것도 쓴 것도 모두 열매를 맺습니다
緬思桃源內, 멀리 도화원경을 그리며
益嘆身世拙。44 더욱 답답한 신세를 탄식합니다
坡陀望鄜畤, 구비구비 언덕에서 부주의 언덕을 향하니
巖谷互出沒。 봉우리와 골짜기가 번갈아 나타납니다
我行已水濱, 나는 벌써 물가에 다다랐는데
我仆猶木末。48 내 종은 아직 나무 끝에 있나 봅니다
鴟鳥鳴黃桑, 부엉이가 누런 뽕나무에서 울고
野鼠拱亂穴。 들쥐는 어지러운 굴 앞에 합장하고 섭니다
夜深經戰場, 깊은 밤 싸움터를 지나는데
寒月照白骨。52 찬 달빛이 흰 뼈를 비춥니다
潼關百萬師, 동관의 백만 군사들은
往者散何卒。 어찌 그리 금세 흩어져
遂令半秦民, 중원 땅 백성의 반을
殘害為異物。56 무참히 죽게 했을까요
況我墮胡塵, 게다가 나는 오랑캐 땅에 떨어졌고
及歸盡華髮。 돌아왔을 때는 백발이 성성했습니다
經年至茅屋, 한 해가 지나는 동안 내 초가집에서는
妻子衣百結。60 아내와 아이들이 백 조각 덧댄 옷을 입었습니다
慟哭松聲回, 통곡하며 우는 소리가 소나무 메아리로 돌아와
悲泉共幽咽。 슬픈 샘물과 함께 낮게 흐느낍니다
平生所嬌兒, 평생 예쁜 짓을 하던 아이는
顏色白勝雪。64 눈보다 흰 낯빛으로
見耶背面啼, 애비를 보자 돌아서 우는데
垢膩腳不襪。 때가 낀 발에는 버선조차 신지 않았습니다
床前兩小女, 침상 앞의 두 딸은
補綴才過膝。68 누더기 치마가 겨우 무릎을 가립니다.
海圖坼波濤, 바다 그림은 파도가 찢어져
舊繡移曲折。 여러 번 기웠는지 구불구불 휘었거
天吳及紫鳳, 저고리 위의 천오와 자색 봉황의 자수는
顛倒在裋褐。72 위 아래가 바뀐 채 붙어 있습니다
老夫情懷惡, 이 늙은 서방은 심사가 뒤틀려
嘔泄臥數日。 구토하고 설사하며 며칠을 몸져누었습니다
那無囊中帛, 봇짐 속에 어찌 옷감이 없어
救汝寒凜栗。76 추위에 떠는 너희들을 구하지 못하겠느냐
粉黛亦解苞, 보따리를 풀어 분과 화장품도 꺼내고
衾裯稍羅列。 이불과 옷을 늘어 놓습니다
瘦妻面復光, 깡마른 아내의 얼굴에 다시 빛이 돌고
癡女頭自櫛。80 철 없는 딸아이들은 머리를 빗습니다
學母無不為, 에미에게 배워 하지 않은 게 없었는지
曉妝隨手抹。 날이 새도록 손을 놀려 화장을 합니다
移時施朱鉛, 한참을 연지를 찍다 분도 바르며
狼藉畫眉闊。84 눈썹을 넓게 그린 꼴이 엉망입니다
生還對童稚, 살아 돌아와 어린 아이들을 대하니
似欲忘饑渴。 배고픔도 목마름도 잊습니다
問事競挽鬚, 수염을 당기며 이것저것 묻지만
誰能即嗔喝。88 누가 바로 성을 내겠습니까
翻思在賊愁, 적에게 잡혀 근심하던 걸 생각해
甘受雜亂聒。 달갑게 떠들썩한 북새통을 참아냅니다
新歸且慰意, 막 돌아와 마음에 위안을 얻었으니
生理焉能說。92 살아갈 일을 어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至尊尚蒙塵, 지존께서 아직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계시니
幾日休練卒。 언제나 군사 훈련을 쉴 수 있을까요
仰觀天色改, 우러러 하늘 색이 바뀌는 걸 보고
坐覺祆氣豁。96 요망한 기운이 흩어지는 듯합니다
陰風西北來, 음산한 바람이 서북쪽에서 불어
慘澹隨回鶻。 참담하게 회흘을 따라갑니다
其王願助順, 그 왕이 돕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其俗善馳突。100 그 사람들은 달리고 싸우기를 잘 한답니다
送兵五千人, 군사 오 천 명을 보내면서
驅馬一萬匹。 말 만 필을 몰고 왔습니다
此輩少為貴, 이들은 적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는데
四方服勇決。104 사방이 그들의 용맹함에 탄복합니다
所用皆鷹騰, 그들이 사용하는 건 모두 매처럼 빨리 달려
破敵過箭疾。 적을 부수는 것이 화살보다 빠릅니다
聖心頗虛佇, 임금님은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려 하지만
時議氣欲奪。108 조정은 그걸 걱정합니다
伊洛指掌收, 이수와 낙수의 땅도 쉽게 찾을 수 있고
西京不足拔。 장안도 따로 애쓸 것 없을 듯합니다
官軍請深入, 관군은 깊이까지 공격하도록 허락을 청하는데
蓄銳何俱發。112 힘을 비축하고 있어 발휘할 수 있습니다
此舉開青徐, 이 공격으로 청주와 서주를 열 수 있고
旋瞻略恒碣。 돌아서면 항산과 갈석산이 보입니다
昊天積霜露, 가을의 하늘에는 서리와 이슬이 쌓이고
正氣有肅殺。116 바른 기운에는 엄정한 힘이 있습니다
禍轉亡胡歲, 재앙을 돌려 오랑캐를 무찌를 때
勢成擒胡月。 기세를 만들어 오랑캐를 잡을 때
胡命其能久, 오랑캐의 목숨이 어찌 길겠습니까
皇綱未宜絕。120 황국의 기강은 끊어질 수 없지요
憶昨狼狽初, 지난 날 낭패가 시작되던 때를 기억하면
事與古先別。 지금 사정은 그 때와 다릅니다
奸臣竟菹醢, 간신은 다져 소금에 절였고
同惡隨蕩析。124 그 나쁜 무리는 모두 소탕했습니다
不聞夏殷衰, 하나라와 은나라 같은 쇠퇴를 듣지 못한 것은
中自誅褒妲。 포사와 달기를 처형했기 때문입니다
周漢獲再興, 주나라와 한나라가 다시 흥할 수 있었던 것은
宣光果明哲。128 선왕과 광무제가 명철했기 때문입니다
桓桓陳將軍, 용맹하신 진원례(陳元禮) 장군
仗鉞奮忠烈。 큰 도끼를 들고 충렬을 다 하셨습니다
微爾人盡非, 장군이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끝났겠지요
于今國猶活。132 이제 나라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凄涼大同殿, 처량한 대동전
寂寞白獸闥。 적막한 백수달
都人望翠華, 성안의 백성은 황제의 깃발을 기다립니다
佳氣向金闕。136 좋은 기운이 궁궐을 향하기를 기다립니다
園陵固有神, 앞선 임금님들의 능에 신령이 있었음이니
掃灑數不缺。 물 뿌리고 청소함에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煌煌太宗業, 휘황한 태종 임금님의 창업은
樹立甚宏達。140 굳게 서서 넓게 퍼질 것입니다
"임금이 남긴 실수를 줍는 직책"인 "습유", 참으로 부러운 제도입니다. 오늘날 "습유"라는 자리가 있고, 그 자리가 두보와 같은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어떤 일들을 주울까요? 여러 해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민의를 취합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긴 안목의 검토를 거절한 채 큰 강들을 파헤치는 걸 지적할까요? 부자일수록 일하지 않고 더 부자가 되고 있는 현상을 파헤칠까요? 잘 하고 있는 걸 애써 숨겨 나라가 잘못되라고 기도하는 것 같은 언론권력의 행태를 주울까요? 주울 것이 너무 많을 테니 "왼쪽 습유(左拾遺)" 하나, "오른쪽 습유(右拾遺) 하나, 그렇게 둘만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백 명, 천 명에 달하는 큰 무리의 습유가 있으면 어떨까요? 대통령이 그들이 주워 올리는 자신과 정부의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고, 당나라 숙종처럼 습유를 면직시킨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혹시 좋은 문학작품이 많이 만들어지는 부산품이라도 있을까요?
(2021.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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