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9)
"주선(酒仙)의 경지"
글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원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쉬어가는 셈 치고 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선 북송 때의 시인 소식(蘇軾, 1037-1101)의 작품을 하나 읽지요. 이 시인은 우리에게는 소동파(蘇東坡)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소개할 이 작품은 큰 범주로 보면 요즈음의 말로 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시(詩)가 아니라 사(詞)입니다. 사(詞)라는 형식의 문학은 장단구(長短句)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긴 구절과 짧은 구절이 섞여있는 형식입니다. 한 구절의 길이가 모두 다섯 음절로 되거나 일곱 음절로 된 시(詩)와 달리 길고 짧은 구절이 섞여 있으니 언뜻 보면 요즈음의 자유시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겉으로만 보면 형식이 자유로워 보이고 그래서 형식의 제약이 비교적 적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행의 길이가 모두 같은 시(詩)에 비해 사(詞)는 훨씬 제약이 많고 자유롭지 않은 형식입니다. 길고 짧은 행 하나하나의 길이가 정확히 규정되어 있어 시인이 제멋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래를 짓는 사람은 어느 행이 몇 글자로 되어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외에도 알아야 하는 조건과 규정이 매우 많습니다. 당나라 중기에 출현하기 시작해 청나라 때까지 600개가 넘는 형식이 만들어 졌는데, 그걸 사패(詞牌)라고 합니다. 그 중 6-70 가지는 상당히 자주 쓰였습니다. 짧은 것은 30여 글자, 긴 것은 100 글자가 넘었고, 200글자를 넘는 사패도 있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채상자采桑子〉라는 사패는 두 연으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연은 4행, 그 4행은 각각 7글자, 4글자, 4글자, 7글자이니 두 연을 합하면 모두 44자입니다. 〈채상자〉라는 사패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 전체가 7-4-4-7, 7-4-4-7 음절의 8행으로 되어야한다는 건 알고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 사실입니다. 그 외에도 어느 행의 마지막 글자에 운을 맞추는지, 각 행에서 어떤 성조(聲調)의 글자를 사용해야 하는지 등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사패 하나를 잘 안다고 해서 다른 사패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많이 사용되는 사패를 적당히 공부한다고 해도 4-50개의 사패를 각각 공부해 그 형식적 규칙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소동파 같은 송나라 때 시인들은 어떻게 어떻게, 아니면 왜, 그렇게 많은 사패를 알고 사용했는지 궁금해 집니다. 그건 아마 사(詞)라는 형식이 음악과의 관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설명이 가능합니다. 사(詞)는 연회에서 지은 시를 음악적 훈련을 받은 기녀들이 부르면서 형성되었고, 발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사패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그 형식만을 배우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사패에 맞춰 지은 작품을 통해 그 형식적 요소를 배웠기 때문에, 귀로, 눈으로, 또 입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좋은 작품을, 좋은 음악과 그걸 부르는 아리따운 기녀의 목소리를 통해 들었기 때문에, 비슷한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그 사패를 배워 쓰고 싶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기부여가 특별했기 때문에 사(詞)라는 형식이 부과하는 형식적 장애를 극복했고, 심지어 이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연회의 장소에서, 유흥의 장소에서 생겨 발전한 시형식이기 때문에 사랑과 술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글에서 술의 이야기를 하면서 문학의 새로운 형식이 생기고 발전하는 한 가지 패턴을 이야기하는 건 이런 연유에서 입니다.
우선 소동파의 노래를 들어 보시지요.
明月幾時有,
把酒問靑天。
不知天上宮闕,今夕是何年。
我欲乘風歸去,
唯恐瓊樓玉宇,
高處不勝寒。
起舞弄淸影,
何似在人間。
轉朱閣,
低綺戶,
照無眠。
不應有恨。何事長向別時圓?
人有悲歡離合,
月有陰晴圓缺,
此事古難全。
但願人長久,
千里共嬋娟。
밝은 달은 언제부터 있었나?
술잔을 잡고 검푸른 하늘에 묻습니다.
천상궁궐에서
오늘 저녁은 어느 해인지 모르겠네요.
바람을 타고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나 달나라 玉누각은
너무 높은 곳, 견딜 수 없이 춥겠지요.
일어서 춤추며 맑은 그림자와 노니,
이것이 어찌 인간세상 같겠습니까.
붉은 누각을 돌며,
창 아래로 스미는 달빛,
잠을 이룰 수 없어요.
한스러워 하지 말아야지요,
헤어져 있을 때 이처럼 항상 둥근 것이 또 있나요.
사람에게는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이,
달에게는 흐리고 맑은 하늘, 차고 이지러짐이 있으니,
예로부터 완전함은 없습니다.
그저 오래오래 살고.
멀리서도 아름다운 달을 함께 즐기길 바랄 뿐 입니다.
작품이 사용한 사패는 〈수조가두水調歌頭〉입니다. 두 연으로 되어있고, 두 연이 형식적으로 같지 않지만 두 연의 마지막 다섯 행은 같은 형식입니다. 그건 둘째 연의 첫 부분, 즉 세 글자로 된 세 행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다시 말하면, 시인이 그 부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잘 관찰하는 것이 이 사(詞)하고 노는 좋은 방법이리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한자의 음을 잘 아는 사람들은 첫 연의 둘째, 세째, 여섯째, 여덟째 행의 마지막 글자인 天,年,寒,間, 둘째 연의 세째, 네째, 일곱째, 아홉째 행의 마지막 글자인 面,圓,全,娟이 운을 맞춘 글자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운을 맞춘 글자를 한 단위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작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두 번째 읽으면서 시상의 전개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생각해 보면 재미있을 겁니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다 보면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읽게 되는 일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동파의 이 작품이 그래서, 수업을 준비하면서 몇 번 이 시를 읽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매번 같은 생각을 하며 읽을 수는 없어서, 새로운 생각을 찾아 보게 되는데, 최근에는 詩와 술(酒)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시를 읽는 사람들, 특히 해설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철학적인 생각 비슷한 게 보이면 바로 읽기를 그쪽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고, 수업에서 학생들이 제시하는 읽기에서 그런 반응을 흔히 보았습니다. 그런 읽기와 한번 겨루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기는 철학적으로 읽으라고 유인하는 듯한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달이 언제부터 하늘에 있었느냐는 말이 그렇고, 천상의 궁궐과 시인이 사는 이 땅이 전혀 다른 시간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그렇습니다. 달에 흐리고 맑은 하늘, 차고 이지러짐이 있듯이, 사람에게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이 있다는 생각은 더욱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그렇게 읽었다기 보다, 어디선가 그런 해설을 읽었을 가능성이 컸겠지요. 그래서, 강의 때 여러분들이 속은 건 아닌지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이 시는 시선(詩仙) 이태백이〈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혼자 술을 마시기 심심해서 잔을 들어 달더러 오라고 청하고, 그림자까지 끌어들여 함께 셋이 된다고 한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주선(酒仙)의 경지를 한걸음 더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어쩌면 은근히 당신보다 내가 정말 주선입니다 라는 경쟁심리가 작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동파가 이 시에 붙여 놓은 서문에서 〈병진년(1076) 추석에 새벽이 되도록 즐겁게 마셔 크게 취한 후 이 시를 짓는다. 아울러 동생 자유(子由)를 그리워한다. (丙辰中秋,歡飮達旦,大醉,作此篇,兼懷子由。) 〉 라고 썼습니다. 이 노래를 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사(詞)의 첫째 연에서 술 취한 상태가 대여섯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니 한번 찾아 보라고 숙제를 내기도 했습니다. 많이 취했다는 느낌을 작품의 어디에서 처음 볼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도 했습니다. 한번 대답을 찾아 보시지요.
취흥은 첫 행부터 분명합니다. 밝은 달이 언제부터 있었느냐는 술기운에 해야 어울리는 질문입니다. 술기운이 없이 하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첫 행에 나타나는 소동파의 모습이 취흥의 첫 번째 상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 대답을 검푸른 하늘에게 듣겠다는 생각 역시 취흥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술잔을 들어 하늘에게 그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무슨 철학적 사고를 따지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술을 마신다는 건 어쩌면 술 마시고 이런 엉뚱한 질문도 하고, 같이 마시는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해도 미친놈이라 하지 않도록 하는 수양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상치 못한 사고의 전환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에 비례하는 걸까요? 세째 행의 엉뚱한 질문이 바로 계속되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천상궁월에서 오늘 저녁이 1076년인지 2021년인지, 아니면 이태백이 살던 8세기 어느 해인지 알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네째부터 여섯째 행에 또 다른 두 상태가 보입니다. 〈바람을 타고 돌아가고 싶다〉 했는데, 그건 거기 가면 거기가 지금 어느 해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바람을 타고 천상궁궐에 가겠다는 생각 뿐 아니라, 그것을 〈돌아간다(歸去) 〉고 한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거기 하늘나라 사람인데 어쩌다 이 땅으로 귀양을 온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많이, 재미있게 취한 거지요. 거긴 높아서 추울 테니 그만두지 하고 술기운에 생긴 생각을 술기운에 또 쉽게 버리는 것도 참 재미있습니다. 일껏 여러 개의 질문을 하고 해답을 찾을 방법까지 생각하다가 한꺼번에 쉽게 포기하는 것, 역시 취흥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반전입니다. 술과 시가 만나 만들어내는 마술이라 하겠습니다.
일곱 째와 여덟 째 행에서, 일어나 맑은 그림자를 파트너 삼아 춤추는 모습은 취흥의 또 다른 상태입니다. 술에 밥에 잘 먹고 마시고, 이차로 노래방으로 달려가는 것과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요? 물론 이태백이 앞에 언급한 〈월하독작〉에서 벌써 해본 짓이기는 해도, 바람을 타고 달나라 옥궁궐을 보는 것만 신선의 세계가 아니라는, 이 세상에도 신선 세상은 얼마든지 있다는, 그런 생각이 뒤를 받쳐주는 재미있는 시상입니다.
이런 취흥은 둘째 연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바뀝니다. 둘째 연의 뒷부분에 가면 아우를 만날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그래도 달은 같은 달이니 그것을 보며 서로를 생각하자고 기약하는 내용을 보면서 술이 깼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둘째 연의 앞부분, 세 글자로 된 세 행이 반복되는 부분에 주목합니다. 사(詞)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이렇게 같은 길이인 세 음절의 짧은 행의 반복은 빠른 템포의 음악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작품의 이 부분에서 영화를 보다가 빠르게 감아 앞으로 건너 뛰는 효과를 느끼기도 합니다. 정말로 세째 행에서 이야기하듯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인지,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새 술이 깬 것인지 모르겠지만, 앞 연에서 보인 하늘 나라 신선의 세계는 이미 잊고 현실세계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맨 마지막 행이 중요합니다. 천리 길을 떨어져 살아도, 같은 달을 본다는 말로 동생과 헤어져 사는 슬픔을 달래는 모습은 중국시에 종종 보이는 모티브이지만, 지금도 쓸만한 생각입니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 만나 즐겁게 술 마시며 좋다고 희희덕 거리지 말고 태평양 건너 달 바라보며 여러분들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가끔 생각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주선은 이태백이나 소동파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남송 때의 시인 신기질(辛棄疾, 1140-1207)도 내공이 깊습니다. 한 수를 소개하니 이 사람이 도달한 주선의 경지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관찰하며 놀아 보시기를 권합니다. 첫 수는 겉모습으로 보기에는 칠언율시 같지만, 옥루춘(玉樓春)이라는 사패에 맞추어 지은 사(詞)입니다.
三三兩兩誰家女,
聽取鳴禽枝上語.
提壺沽酒已多時,
婆餠焦時須早去.
醉中忘却來時路.
借問行人家住處.
只尋古廟那邊行,
更過溪南烏臼樹.
둘씩 셋씩 모여있는 게 어느 집 딸 들이야?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는다.
술병 차고 술 사러 나온지 벌써 상당히 됐지?
마누라 빈대떡 잘 구워 졌을 때 얼른 돌아가야지.
취했나? 내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안 나네.
길 가는 사람에게 묻는다, "우리 집이 어디쯤이지?"
"그냥 오래된 사당을 찾아 그 길로 쭉 가세요.
냇물 남쪽 오구나무를 지나면 거기가 영감님 댁입니다."
참 재미있어서 영어로도 번역했습니다. 한번 같이 보면서 다시 한 번 노세요.
Xin Qiji (1140-1207)
To the Tune of Yulouchun ("Spring in the Jade Tower")
Who are these girls, in twos and threes?
I listen to chirping birds palaver on the branch.
I left home a while ago, jug in hand to buy the wine.
I must hurry back before my wife's cake is done.
Smashed, I forget how I made it here.
I ask a guy where I live.
Just look for an old shrine, he says, and follow the road
Then pass a tallow tree south of the brook.
(2021.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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