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14)
"내면의 갈등과 시인의 목소리: 굴원(屈原)과 어부(漁父)"
내 연구실 한쪽 벽에는 왕농(王農, 1926-2013)이라는 화가의 작품이 한 폭 걸려 있습니다. 20세기 전반의 저명한 화가 서비홍(徐悲鴻, 1895-1953)의 제자로 스승처럼 역동적인 모습의 말을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나도 사실 말을 그린 그의 작품을 소장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건 조금 너무 흔하지 않느냐는 느낌이 들어 중국민속신앙에서 신의 반열에 올라있는 종규(鍾馗)를 그린 작품을 골랐습니다. 악귀를 쫓아내는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작품을 부적으로 생각해 걸어둔 것은 아닙니다. 종규를 형상화한 그림 중에 어떤 것은 그를 술 취한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림 속의 종규가 그런 모습입니다. 대취해서 술통을 베개 삼아 베고 골아 떨어져 있습니다. 그 옆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맑은 정신인데 나만 홀로 취했다(世人皆醒我獨醉)"라는 화제가 붙어 있습니다. 바로 그 화제를 보고 그 그림을 고른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쩌면 친구들은 모두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데 나만 타향 땅을 떠도는 신세이니 그게 바로 "나만 홀로 취한 상태" 아니냐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상하지 않았던 효과도 있습니다. 그림의 그 화제가 학생들에게 전고(典故 allusion)를 가르칠 때 아주 적절하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문학서적을 좀 읽으신 분들은 그 화제가 굴원(屈原, 340?-278 BCE)의 "어부(漁父)"라는 작품에서 왔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러나 굴원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고 한 번 비틀었지요. 먼저 굴원의 작품을 읽어 보시지요. 누구의 어떤 목소리가 등장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屈原
漁父
屈原既放,游於江潭,行吟澤畔,顔色憔悴,形容枯槁。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與?何故至於斯?」
屈原曰:
「舉世皆濁我獨清,眾人皆醉我獨醒,是以見放。」
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而能與世推移。
世人皆濁,何不淈其泥而揚其波?
眾人皆醉,何不餔其糟而歠其釃?
何故深思高舉,自令放為?」
屈原曰:
「吾聞之,新沐者必彈冠,新浴者必振衣。
安能以身之察察,受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而蒙世俗之塵埃乎?」
漁父莞爾而笑,鼓枻而去。
歌曰:
「滄浪之水清兮,可以濯吾纓;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
遂去不復與言。
굴원
"어부"
굴원이 쫓겨나 강과 호수 사이에서 시를 주절거리며 물가를 헤맬 때 얼굴색이 초췌하고 모습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무슨 연유로 이 지경에 이르신 건가요?"
굴원이 말했다.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고, 사람들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서, 그래서 쫓겨났다네".
어부가 말했다.
"성인은 사물에 얽매여 굳어지지 않고, 세상과 함께 움직일 수 있다 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탁하면, 왜 흙탕물을 휘휘 저으며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시나요?
사람들이 모두 취했으면, 왜 그 술지개미도 먹고 걸쭉한 술도 들이키지 않으시나요?
대부께서는 도대체 왜 심오한 생각과 고매한 행동을 고집해 스스로를 쫓겨나게 하셨나요?"
굴원이 말하기를:
"나는 이렇게 들었네.
머리를 감은 사람은 모자를 털어 쓰고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을 털어 입는다고.
어찌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나?
차라리 상강 흐르는 물로 가서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를 치르겠네.
어찌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함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쓰겠나?"
어부는 묘한 웃음을 웃고 노를 저으며 노래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을 수 있지요"
그렇게 가면서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영역도 했으니 한 번 더 천천히 보시면서 굴원의 심사를 생각해 보시지요.
Qu Yuan (343-277 BC?)
"Fisherman"
When the banished Qu Yuan wandered among rivers and lakes, he was mumbling poems, walking by the marsh, with a languished face and a wasted body.
A fisherman saw him and asked:
"Aren't you the Minister of Three Royal Families?
What happened? How have you become like this?"
Qu Yuan answered:
"The entire world is murky, and I alone am clear;
Everyone is drunk, and I alone am sober.
That is why I got banished."
The fisherman said:
"Sages do not get stuck by earthly things. They can move along with the world.
If people in the world are murky, why don’t you bob in and out, riding on muddy waves?
If everyone is drunk, why don't you too eat the dregs and drink the wine?
Why did you, with profound thoughts and lofty conduct, allow yourself banished?"
Qu Yuan said:
"I have heard this:
Those who have just washed the head dust off their hats;
Those who have just bathed the body shake off their clothes.
How could I allow my clean body to be polluted by filthy things?
I would rather jump into the Xiang River, and bury myself in the fish belly.
How could I allow my spotless integrity to be covered by worldly dust?"
The fisherman smiled a delicate smile, stroking the paddle, and sang:
"When the water in the Canglang River is clear, I can wash my hat strings.
When the water in the Canglang River is turbid, I can wash my feet."
He went on without saying anything anymore.
왕농이 종규를 술 취한 모습으로 그리고, 그 그림에 스스로 붙인 화제로 굴원의 말을 비틀어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려대부 굴원이 모함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호숫가를 배회하면서 무언가 주절거리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어쩌면 그 때 그렇게 물가를 헤매며 입 속으로 주절거린 시에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고, 사람들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혼자 깨어있다 (舉世皆濁我獨清,眾人皆醉我獨醒)"는 구절이 섞여 반복되고 있었겠다고 상상합니다. 답답한 마음을 잘 담아낸 표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 말만 가지고는 이 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들이 기억해줄 정도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스타덤에 올려 놓은 건 세상을 답답해하는 이 양반이 탔던 배를 저어주던 어부입니다. 그 어부의 말, 즉 무릇 성인은 꼭 막힌 사람이 아닐 테니 세상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흙탕물에 발을 담글 줄 알아야 하고,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으면 술지개미라도 먹고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과 이루는 대조가 굴원이 주절거렸을 구절이 오래 기억되게 했을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 입장인지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에 앞서 고려할 것은 굴원과 그 어부와의 대화가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는 점입니다, 굴원이 쫓겨 갔던 머나먼 변방의 땅 뱃사공 어부가 삼려대부를 알아보았다는 것부터가 이상합니다. 관복을 입고 있었을 리도 없고, 풍채가 좋아 고관대작 같아 보일 리도 없었을 겁니다. 멀리까지 쫓겨 온 신세이고 몸과 마음이 모두 상해 삐쩍 말라 초췌한 모습이었을 텐데 그 모습을 보고 대부인지 알았다고 하니 그 이야기가 허구라는 심증을 갖게 합니다. 무슨 연유에서이든 삼려대부를 알아보았다고 해도 어부가 대부와 그렇게 말을 섞었다는 것도 매우 이상합니다. 굴원이 이런 문제를 몰랐을 리 없는데 그렇게 써 놓은 걸 보면 의심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굴원이 "어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대화가 자신과 자신의 배를 젓던 어부 사이에 있었던 실제의 대화가 아닐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화를 어떻게 읽는 것이 좋겠습니까. 세상이 모두 취했는데 나 홀로 멀쩡하다는 굴원의 말과, 세상이 혼탁하다고 해도 흙탕물에 발을 씻지도 못할 정도로 꼭 막힌 사람이냐는 어부의 힐난이 사실은 시인 자신의 내면에서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충돌하고 있는 두 개의 목소리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러한 번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면에서 치열하게 부딪치고 갈등하는 목소리를 잘 분리해 적었다는 것은 굴원이 "어부"에서 이룬 성취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이상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쓰는 자신의 이야기이면서도 작품 전체에 "굴원"이라는 이름이 달린 목소리는 삼인칭으로 나타나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의 목소리를 포함해 세 목소리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서" 답답하다고 토로하는 목소리가 각광을 받는 듯하지만 사실 정말 그런가 의심할 이유도 많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마무리 부분을 어부에게 주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더 이상 굴원에게 직접 특정한 입장을 권하지는 않고 말없이 노를 젓는 것으로 마무리 하지만, 바로 그 부분에 이르면서 부르는 노래는 물이 맑을 때 취할 입장과 물이 탁할 때 취할 입장이 따로 있다는 어부의 생각을 담았고, 그 노래는 계속 메아리치고 공명합니다. 내면의 갈등이 쉽게 마무리 되지 않을 것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굴원의 "어부"를 읽으며 생각해 볼만한 문제는 또 있습니다. 그건 굴원이 직접 피력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을 담아둔 읽기라고 하겠습니다. 그건 바로 왕농이 굴원의 말을 비틀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굴원이나 어부나 양쪽 모두 오늘을 사는 입장과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기도 하지요. 왕농이 굴원의 말을 비틀어 "세상 사람들이 다 깨어 있는데 나만 혼자 취해 있구나 (世人皆醒我獨醉)"라고 한 것, 내가 그 화제에 정신이 팔려 왕농의 특징인 말 그림을 제쳐두고 그 화제가 적힌 그림을 사서 소장했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어부"라는 작품에 담은 굴원과 어부의 입장이 모두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이 취해 있건 취해 있지 않건, 세상이 맑건 흐리건 간에, 나 자신은 분명히 취해 있고 또 그래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은 오랜 역사에서나 지금 우리네 삶에서나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기본 전제는 "나는 취했다(我醉)"입니다. 거기에 "홀로"라는 뜻을 더해 "나만 홀로 취했다(我獨醉)"고 했으니, 소외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상황을 상정합니다. 소외의 상태는 말 그대로 답답한 상태인데 세상이 그런 상태인 이유를 그런대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답답함이 조금 덜할 것입니다. 굴원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굴원처럼 "나만 홀로 깨어있다"는 푸념으로는 답답한 이유를 분석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나 상황은 많이 있을 겁니다.
물론 "나만 홀로 취했다"는 말을 화제로 삼은 것은 비슷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내가 그 그림을 연구실에 걸어 놓고 "나만 혼자 취했어"라고 소리치면 어딘가에서 "나도 역시 홀로 취했다(我亦獨醉)"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말은 논리적으로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남깁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침이 몇 번이고 계속된다면 "우리들도 역시 홀로 취했어(我等亦獨醉)"로 확대되어 모순 투성이의 말로 변해가겠지요. 모순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소외를 느끼는 사람이 분명 많아지고 있는 세상이고, 그건 스스로 "나만 홀로 깨어 있어(我獨醒)"라고 뻐기는 사람들이 많아야 가능하겠지요.
그럼 너희들은 깨어 있어라,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저는 홀로라도 좋으니 취해 있지요.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홀로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은 있습니다.
(2021.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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