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장애물에 담긴 기회 (2)"

반빈(半賓) 2021. 10. 17. 08:15

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10)

 

"장애물에 담긴 기회 (2)"

 

중국 고전시 중, 절구의 경우, 칠언절구는 28자, 오언절구는 20자뿐이라는 심각한 공간의 제한이 시적 표현의 장애물로 작용하기 쉽지만, 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시의 맛이 오래 남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찾아낸 방법은 형식적 조건이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시에 동원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정형시의 전통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표현 수단이나 공간을 제한하는 장애를 설정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극복하여 오랫동안 여운이 남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박목월시인의 〈불국사(佛國寺)〉가 오래오래 붙들고 놀아볼 좋은 예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작품을 읽어 보시지요.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 안개

물 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불국사를 가 본 사람들이 많겠지만, 박목월시인이 이 시에 담고 있는 정취는 불국사를 참관한 경험을 바탕으로는 쉽게 공감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몸으로 받은 느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겠기 때문입니다. 나도 불국사는 상당히 여러 번 가 보았습니다.  단체의 일원으로 가서 빡빡한 일정에 따라 마치 목동에 몰리는 양떼처럼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다녀온 일도 있었고, 정해진 일정에 쫓기지 않고 여유 있게 산책하며 이곳 저곳을 둘러 본 일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가서 어떻게 보았든 불국사는 늘 사람으로 붐비는 곳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심지어 캄캄한 밤중에 일어나 일출을 보겠다고 올랐던 토함산에서도 그랬습니다. 산길을 오를 때도 군인들 행군하듯 앞뒤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올라가서도 앞에 선 사람의 머리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겨우 떠오르는 해를 보았을 정도로 복잡하고 부산스러웠습니다. 그 이른 시간 토함산이 그랬으니 낮 시간 청운교, 백운교, 다보탑, 석가탑 부근이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박목월시인이 그려낸 불국사는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시인 자신조차도 거기 없다고 느낄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듯한 경치입니다.  글자 그대로 시인이 자기 자신도 잊고 선정에 든 듯한 무아지경(無我之境)입니다. 그것이 시인이 방문해 스스로 불국사를 본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인지, 아니면 마음속으로 그려 본 이상적인 불국사를 담은 것인지, 아니면 워낙 좋은 시를 많이 쓴 시인이어서 사람들 없는 시간에 사람들 없는 곳을 둘러보며 사색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있었는지 분명히 알기 어렵고, 또 그리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 마음 속의 불국사가 하나일 수 없듯이, 불국사를 그리는 시에 담기는 정취 역시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의 짓기와 읽기에 대한 이론을 모색한다는 관점에서, 시인의 〈불국사〉는 불국사를 직접 본 사람들만 읽는 게 아니라는 점도 고려할 수 있겠습니다.  시인에게 현장감이 중요했는지 알 수 없으나, 불국사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 〈불국사〉를 읽을 때 불국사를 그 작품 안에 그려진 그런 모습으로 상상할 것이라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박목월시인은 가능하면 말을 줄이고, 마지못해 하는 듯한 그 몇 마디 말이 많은 반향을 일으켜 시적 효과가 여운으로 남아 계속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건 어찌 보면 스스로 설치한 장애물이고, 그 장애물에 담아 놓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시인이 어떤 연유로 말을 줄여야 자신이 생각하는 불국사를 잘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사실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독자가 자신이 그 몇 마디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스스로 관찰하고 논의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남이 무엇을 왜 했는지의 문제와 비교하면 그래도 확신을 가지고 논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자의 한사람으로 나는 〈불국사〉를 어떻게 읽었는지 한번 되돌아 보겠습니다.

 

우선 자하문에서 시작해, 대웅전과 범영루를 거쳐 다시 자하문으로 돌아오는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부분은 네 행, 모두 열여섯 행입니다. 전체 열여섯 행에서 네 글자로 이루어진 세 행을 제외하면 모두 한 행이 세 글자 뿐인 짧은 작품입니다. 이 시는 열여섯 행으로 이루어졌지만 모두 합해 쉰한 자에 불과합니다. 정말 작은 공간만이 허용된 작품입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16행 51자라는 통계가 시사하는 것보다 더 짧습니다.  한 부분의 네 행은 앞의 두 행과 뒤의 두 행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두 행은 이야기할 장소를 제시하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어서 그 장소에 대한 묘사는 뒤에 있는 두 행, 그러니까 여섯 글자에서 일곱 글자라는 정말로 제한된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어쩌면 무슨 말로 묘사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세 곳을 둘러보는 네 부분이 제시하는 그 세 곳에 대해서 한 말은 범영루에 관한 부분의 "흐는히 젖는데"를 제외하면 특정한 장소에만 적용된다고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서로 바꾸어 놓아도 해석이나 감상에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자하문, 대웅전, 범영루라는 이름 뒤에 紫霞門,大雄殿,泛影樓 등 한자 이름을 첨가해 둔 것도 관심을 끕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54년에는 독자들이 한자에 더 익숙했을 터이니 그냥 한자로만 표기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처음 발표했을 때의 텍스트를 구하지 못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시인이 이름에 담긴 뜻이 전달되지 않을까 조바심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한자이름을 병기한 것도 그런 우려나 조바심을 반영한 때문인 듯하고, 한자 이름의 병기로 부족했는지 가뜩이나 좁은 공간의 상당한 부분을 그 이름의 뜻을 풀이하는 데 할애합니다.  "대웅"은 부처님의 존칭이니 "대웅전(大雄殿)/큰 보살"이란 두 행은 동어 반복에 가깝고, "뜬 그림자" 역시 "범영(泛影)"의 순 우리말 해석이니 "범영루(泛影樓)/뜬 그림자" 역시 동어 반복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첫 두 행인 "흰 달빛/자하문(紫霞門)"이 관심을 끕니다. 그냥 동어 반복이 아닐 뿐 아니라, 두 가지 다른 색깔을 병렬시켜 묘한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자하문"이라는 한자말에서 보라색을 연상하는 독자가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이름은 연한 보라색 안개가 고풍스러운 문을 에워 싸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하문을 보라색은 제쳐두고 "흰 달빛"과 짝을 지었습니다.  달빛이 희다 못해 보라색으로 보이는 신비스런 느낌을 준다는 말인지, 두 가지 색깔이 어울리는 정취를 담고 싶은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는 과정을 거치며 시에 대해 사색하게 됩니다. 그런데 네 부분의 첫 두 행에서 동어반복, 혹은 동어반복을 비트는 기법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 작품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감각기관에만 의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작과정에 머릿속의 꿍꿍이가 개입한 듯하고 그 점이 재미있습니다.  분명 "대웅전(大雄殿)/큰 보살"이나 "범영루(泛影樓)/뜬 그림자"에는 시적 효과를 배가시키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면 지극히 감성적으로 보이는 작품이면서 그 배경에 주지주의적 경향을 담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하문, 대웅전, 범영루의 세 곳의 느낌을 담은 언어는 시인이 자신의 표현을 옥죄는 듯한 장애물이면서, 그 장애물을 기회로 이용하는 창의적 지혜를 보여줍니다.

 

달 안개

물 소리

 

바람 소리

솔 소리

 

흐는히

젖는데

 

바람 소리

물 소리

 

세째 부분의 "흐는히/젖는데"를 제외하면 모두 청각과 시각으로 받는 느낌을 짧게 명사에 담았습니다.  사실은 "흐는히/젖는데" 역시 동사가 사용되기는 했지만 어떤 움직임을 서술하는 기능보다는 어떤 상태의 어떤 느낌을 담는 기능이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나머지 세 부분의 명사들과 효과가 비슷합니다.  명사에 의존하는 표현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해 쉽게 소실되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당나라 때 시인 왕유(王維, 699-761)이 지은 오언율시 "향적사를 지나며(過香積寺)"의 한 연을 통해 이런 효과를 논의해 보겠습니다.

 

泉聲咽危石,    샘 소리 깎아지른 바위에 울먹이고

日色冷青松。    햇빛 푸른 소나무에 차갑습니다

 

번역은 일단 이렇게 했지만, 이 두 행은 여러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선 두 구절이 댓구를 이루고 있음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소리와 내려 쬐는 햇빛이 드러내는 색깔이 짝을 이루었고, 위태위태할 정도로 높은 바위 절벽과 푸르른 소나무가 짝을 이루었습니다.

 

두 개의 명사 사이에 낀 "울먹이다(咽)"와 "차갑다(冷)"는 언뜻 보면 하나는 동사, 다른 하나는 형용사로 짝을 이루지 못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 두 글자는 참 여러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울먹이다"는 목적어가 없는 자동사이지만, 이 싯구에서는 "울먹이게 하다"라는 타동사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타동사로 읽는다고 해도 샘 소리가 높은 바위를 울먹이게 한다고 읽을 수도 있고, 바위가 흐르는 샘물을 막아서 흐르는 모습이나 소리가 울먹이게 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리는 햇빛이 푸른 소나무를 차갑게 보이게 한다고 읽으면 "차갑다(冷)"는 형용사로 보다는 타동사로 보는 것입니다.  햇빛과 푸른 소나무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으면 햇빛 아래서 소나무가 스스로 차갑게 보인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푸른 소나무가 햇빛을 차갑게 느끼게 만든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이 두 구절의 해석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흐르는 샘물이 바위를 만나서 만드는 소리가 시인에게 울먹이는 듯 들려 자신도 그런 정서에 공감한다는 뜻도 있을 수 있고, 시인에게 울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흐르는 샘물이 깎아지른 바위를 만나 만드는 정경과 소리를 우울한 모습으로 보게 한다는 뜻도 됩니다.

 

햇빛과 푸른 소나무, 싸늘한 기온이나 분위기가 만드는 경치는 무엇이 무엇을 어떻게 나타나게 하는지의 해석에 여러가지 조합이 가능하게 합니다.  게다가 그런 경치를 보고 있는 시인도 그 경치에 담긴 느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에이전트의 하나라고 할 때, 조합의 수는 더욱 많아집니다.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예를 몇 가지 열거할 테니 마음에 드시는 걸 골라 보시지요.

 

1. 햇빛 속에 찬 푸른 소나무

2. 햇빛에 푸른 소나무가 차갑습니다.

3. 싸늘한 햇빛 아래 푸른 소나무

4. 햇빛과 푸른 소나무 내 마음을 차갑게 합니다

5. 내 마음때문인지 햇빛과 푸른 소나무가 차갑습니다.

6. 햇빛, 차가움, 푸른 소나무

 

필요하면 몇 가지 더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멈추지요.  이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이 시를 읽는 과정일까요.  사람에 따라, 같은 사람이라도 때나 기분에 따라 무엇을 고를지가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 시인은 이 여러가지 가능한 해석의 사이를 반복해서 오랫동안 오가는 읽기를 권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렇게 언어에 의지하는 읽기의 마지막에는 시각적 상상을 동원해 햇빛 내리쬐는 오솔길 옆에 선 푸른 소나무가 서있는 싸늘한 날의 풍경을 내면에 그려보는 것이 좋을까요?

 

이런 읽기는 이 두 구절이 대부분 명사로 되어있고, 명사 사이에 끼어 두 명사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동사나 형용사가 단지 명사의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만들에 내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향적사라는 절을 찾아가며, 아니면 그 절을 떠나며 품었을 마음과 주위의 경치가 서로 공명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적합한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언어를 붙들고 많이 생각한 끝에 시각적, 청각적인 느낌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박목월시인이 〈불국사(佛國寺)〉에서 쓰고 있는 언어의 특징이 아닌가 싶습니다.  많이 생각하게 하지요.  말을 가능하면 적게 해야지, 그렇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공명을 느끼면 좋겠네, 뭐 그런 계획으로 장애물을 설치하고 그 장애물에서 시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회를 찾았다고 읽으면 어떨까 합니다.  시인이 쉰 한 글자로 쓴 작품에 이렇게 긴 해설을 붙이는 게 적절해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한마디 덧붙이고 싶네요.  전체 작품에서 유일하게 동사적 요소가 있는 "흐는히/젖는데"가 어디에 등장하는지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나머지 부분과 다른 부분이 하나뿐이라면 그 부분에 주의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읽기입니다.  "흐는히/젖는데"는 분명히 범영루 뜬 그림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그 두 행은 시가 처음 시작한 자하문으로 돌아가는 준비이기도 합니다. 시 전체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움직임, 다시 말해, 떠있는 듯한 그림자가 흐르는 정경은 그 미묘한 움직임을 따라가게 합니다. 한 바퀴 휘익 돌아 다시 자하문으로 가는 것이지요.  자하문에 다시 도착해 바람 소리, 물 소리를 듣고 달 안개를 보면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요?  차 세워둔 주차장으로 가는 건가요? 아니면 시가 시작한 곳으로 다시 갔으니 다시 대웅전과 범영루로 계속 움직이는 걸까요?  짧고 성근 시이지만 읽기가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2021.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