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장애물에 담긴 기회 (3): 율시(律詩)의 경우"

반빈(半賓) 2021. 10. 25. 07:49

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11)

 

"장애물에 담긴 기회 (3): 율시(律詩)의 경우"

 

표현의 공간을 극히 제한하는 장애물을 절제되고 함축적인 시적 언어의 사용으로 극복하여 여운을 길게 남기는 것이 절구의 짓기와 읽기에서 중요한 미학적 원칙이라고 앞에 쓴 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이라는 특정한 문화적 특성에 근거해 생긴 원칙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공간적 제한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른 문학에서도 비슷합니다. 일본의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하이쿠(俳句) 한 수를 예로 보시지요.

 

古池や        ふるいけや

蛙飛びこむ        かわずとびこむ

水の音        みずのおと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들며

나는 물 소리

 

열일곱 음절 뿐인 짧은 형식의 시이지만, 거기 담긴 정취가 오래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개구리가 연못으로 뛰어들 때 나는 퐁당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기억에 남아 잘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꼭 개구리가 연못으로 뛰어 들며 만드는 물소리 뿐 아니라, 우리 경험이나 상상 속의 많은 물소리까지 이 작품의 감상에 개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 갠 후 처마에서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 한적한 산사에서 나뭇잎 스치는 바람과 어우러지는 샘물 졸졸 흐르는 소리, 이런저런 많은 물 소리를 이 작품의 감상에 불러들이는 건 연상의 힘이겠지요. 공간의 제한이 시적 여운을 제한하지 못하는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의 율시에서 사용되는 댓구(對句)는 아주 다릅니다. 언어를 통한 표현 뿐 아니라, 사물의 관찰과 시상(詩想)의 전개까지 한자 문화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댓구는 율시에만 사용되는 수사법이 아닙니다. 율시가 형성되기 훨씬 전의 작품에서도 댓구와 유사한 수사법이 많이 쓰인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로 사령운(謝靈運,385-433)이 쓴 "연못가 누대에 올라(登池上樓)"를 보시지요.

 

潛虬媚幽姿,飛鴻響遠音。

薄霄愧雲浮,棲川怍淵沉。

進德智所拙,退耕力不任。

徇祿反窮海,臥疴對空林。

衾枕昧節候,褰開暫窺臨。

傾耳聆波瀾,舉目眺嶇嶔。

初景革緒風,新陽改故陰。

池塘生春草,園柳變鳴禽。

祁祁傷豳歌,萋萋感楚吟。

索居易永久,離群難處心。

持操豈獨古,無悶征在今。

 

물에 잠긴 용, 아름답고 그윽한 모습;

하늘을 나르는 기러기, 멀리까지 들리는 울음소리

 

하늘 가까이엔 떠도는 구름이 부끄럽고;

물가에서는 깊은 못이 두렵습니다

 

나아가 관직을 하려니 지혜가 무디고;

물러나 농사를 지으려 하니 힘이 부칩니다

 

녹봉을 쫓다가 외진 바닷가로 돌아왔고;

누워 앓으면서 빈 수풀을 마주 봅니다

 

이부자리 속에서는 계절을 모르다가

창문을 열고 잠시 내다 봅니다

 

귀를 기울여 파도소리와 물소리를 듣고;

눈을 들어 높은 봉우리와 험한 능선을 봅니다

 

이른 봄이 남아 있는 바람을 밀어내고;

새로운 양기가 묵은 음기를 바꿉니다

 

연못에는 봄 풀이 돋아나고;

버드나무 정원에는 새 소리가 달라집니다

 

많기도 해라 빈나라 아픈 노래;

무성하기도 해라 초나라 슬픈 읊조림

 

혼자 지내려 하니 오래 지속되기 쉬울 것 같고;

무리를 떠나려 하니 마음을 다잡기 어렵습니다.

 

절개를 지키는 게 어찌 오직 옛날의 일

피해 살아도 답답함이 없음을 지금도 증명합니다

 

다섯 째 연을 제외하면 모두가 두 구절이 언어의 의미로 볼 때 짝을 이루는 구조입니다. 첫 연부터 물 속의 용과 하늘의 기러기, 모습과 소리가 짝을 이루었습니다. 계속해서  떠도는 구름과 깊은 못이 짝을 이루었고, 벼슬과 농사, 지혜와 힘이 짝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보이는 댓구는 엄격한 의미의 댓구는 아닙니다.  의미와 어법적 기능에서는 댓구를 충분히 이루는 듯 보이지만, 글자의 발음에 있어서, 즉, 평성(平聲)과 측성(仄聲:上聲,去聲,入聲을 합해 그렇게 부릅니다)으로 짝을 이루어야 한다는 댓구의 또 하나의 조건은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둘째 연이 그렇습니다.

 

薄霄愧雲浮,棲川怍淵沉。

 

이 두 구절에서 霄(하늘)와 雲(구름),川(시내)와 淵(깊은 못)의 네 글자가 모두 평성(平聲)자인 것은 댓구의 기본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무리가 아닙니다. 사실 중국어에는 옛부터 성조가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중국사람들이 그 사실을 절실하게 알게 된 것은 불교의 전래와 관계가 있습니다. 조금 믿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는 성조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성조를 실천할 뿐, 이론적으로 잘 알지 못했습니다.

 

불교는 중국에 소개된 후 빠른 속도로 중국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한나라가 망한 3세기 초부터 당나라 중기까지 중국은 계속해서 불교에 매혹되어 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 불경의 번역이었습니다. 불경을 읽고 번역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번역이 불가능해 보이는 어휘가 많았다는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산스크리트어나 발리어로 쓰여있는 불교의 많은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번역이 어려운 많은 어휘를 만났고, 그런 어휘의 상당수는 번역되기 보다 음역(音譯)되었습니다. 붓다를 불(佛)이라 하고, 니르바나를 열반(涅槃), 뿌랏냐를 반야(般若)라고 기록한 것은 그 어휘들이 중국어에서 쉽게 뜻이 같은 말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 소리를 따라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원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나 발리어를 잘 알아야 했지만, 중국어의 음운학적 특성을 아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몇 세기에 걸친 불경의 번역작업을 통해 중국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인 중국어의 음운현상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음운학적 특성을 시에서 어떻게 이용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실험이 있었고, 그런 과정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율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중국어에 평성, 상성, 거성, 입성의 네 가지 성조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 네 가지의 성조를 어떻게 조합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음악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를 많은 실험을 통해 연구했습니다.  결론만 말씀 드리자면, 대조의 극대화(maximum contrast)를 선택했습니다. 두 음절을 한 단위로 하여 첫 구절에서 대조의 극대화를 이루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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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기초로 하고 리듬의 변화를 주기 위해 반 단위인 한 음절을 이 기초에 넣어 배치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오언구는

 

측측평평측

 

또는

 

측측측평평

 

입니다. 다시 말해서 리듬의 변화를 주기 위해 더하는 한 음절은 오언구의 세째나 다섯째 위치에 배치합니다.

 

여기서 다시 대조의 극대화 원칙을 적용하여 앞의 두 가지 오언구와 짝을 지을 구절을 만들어 합하면 다음의 두 가지 경우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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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측측평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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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연 안에서 두 구절을 짝짓는 원칙이 대조의 극대화라면, 연과 연 사이의 관계는 대조(對)가 아닌 연결(黏)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째와 둘째 구절의 사이는 대조, 둘째와 세째 구절의 사이에는 연결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조금 엄밀히 말하자면 둘째와 세째 구절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첫 두 구절이 이루는 첫째 연과 다음 두 구절이 이루는 둘째 연 사이의 관계이겠습니다.  네 구절로 이루어지는 절구의 경우 첫째 구절의 처음과 끝이 측성이냐, 평성이냐에 따라 대개 네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측측평평측

평평측측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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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측측평평

 

율시는 이 네 구절을 그대로 한 번 반복해 여덟 구절로 만들면 기본형식을 이루게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여기서 모두 다 논의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냥 요점 하나만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각 구절의 둘째와 네째 글자만 보시면 이렇습니다.

 

〇측〇평〇

〇평〇측〇

〇평〇측〇

〇측〇평〇

〇측〇평〇

〇평〇측〇

〇평〇측〇

〇측〇평〇

 

이 중 짝수 구절의 마지막 글자는 운을 맞추어야 하고 율시에서의 운은 평성으로 맞추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배열이 됩니다.

 

〇측〇평〇

〇평〇측평

〇평〇측〇

〇측〇평평

〇측〇평〇

〇평〇측평

〇평〇측〇

〇측〇평평

 

정리하면 한 구절 안의 둘째와 네째 글자는 평측의 대조되어야 하고, 첫째 구절과 둘째 구절의 둘째 글자와 네째 글자도 평측이 대조되어야 합니다.

 

이런 음성적인 특성과 앞에 소개한 의미나 어법 기능상의 대조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 율시에서의 댓구입니다. 그 댓구는 대부분 세째 구절과 네째 구절 사이, 다섯째 구절과 여섯째 구절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조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덟 구절로 이루어진 율시에서는 두번의 댓구가 사용되는데, 대부분 첫번째 댓구는 세째, 네째 구절에, 두번째 댓구는 다섯째, 여섯째 구절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꼭 댓구를 써서 음운적으로는 대조되는 성조로, 어의, 어법적으로는 같은 범주의 말로 짝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율시에서의 댓구는 장애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짝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이정표나 안내문으로 생각한다면 꼭 장애물이라고 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율시에서의 댓구는 시를 짓는 사람만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읽는 사람도 댓구를 어떻게 썼는지 흥미를 가지고 읽습니다.  말하자면 댓구는 율시하고 노는 방법 중 상당히 쓸모 있는 방법입니다.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한 수 예로 들겠습니다.

 

〈旅夜書懷〉

 

細草微風岸,

危檣獨夜舟。

星垂平野闊,

月湧大江流。

名豈文章著?

官應老病休。

飄飄何所似?

天地一沙鷗。

 

“객지의 밤에 마음을 풀어 씁니다"

 

강 언덕의 가는 풀과 잔잔한 바람

단 한 척 밤배의 높다란 돛대

 

별 떨어지는 평평한 들은 넓고

달 솟아오르는 큰 강이 흐릅니다

                   

내 이름, 어찌 글로만 드러내겠습니까

내 공직, 늙고 병들어 물러났습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나, 무엇을 닮았나요

하늘과 땅 사이 기러기 한 마리

 

객지로의 여행은 특히 시인이 살던 시절에는 늘 고생길이었습니다.  특히 밤은 더욱 외로움을 달래야 하는 시간이었겠지요. 그런 환경에서 밤은 현재의 상황 뿐 아니라 삶 전체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의 복잡한 심사를 가운데 두 연, 즉 댓구를 사용하는 세째와 네째 구절, 다섯째와 여섯째 구절에서 시인과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그걸 댓구의 훌륭한 사용의 덕으로 생각합니다. 별과 달, 떨어지는 동작과 솟아오르는 동장, 들과 강, 넓게 탁 트이는 듯한 느낌과 쉬지 않고 흐른다는 느낌이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한문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평측의 안배를 별로 공감하지 못 하겠지만, 세째와 네쩨 구절의 둘째와 네째 글자인 垂, 野, 湧, 江는 각각 평성, 측성, 측성, 평성으로 음운학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읽는 사람은 이 두 구절 사이를 왕복하며 댓구를 감상하는 사이에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별과 달, 강과 들이 있는 광활한 땅, 유장한 움직임을 함께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댓구로 이루어진 두 구절 사이를 왕복하는 시간을 "서정적 순간(lyrical moment)"이라고 하는데, 이 순간은 언제나 현재로 남아 독자들이 들어가 경험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말하자면 누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들어가 스스로 느끼는 시간입니다.

 

이어지는 다섯째, 여섯째 구절의 댓구도 매우 깊은 사색으로 초대합니다. 두보가 평생을 생각한 이름(명예)와 공직(사회에 대한 기여)이 짝을 이루었고, 자신이 매달려 온 문학과,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늙은 나이와 병이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그냥 두 구절에 담는 것이 아니고 댓구로 만들어 냄으로써 두보가 자신의 평생과 현재를 바라보며 하고 있었을 고민과 회한을 공감하게 합니다.  이렇게 두 번의 댓구로 독자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에 한 마리의 기러기에 자신을 비유하는 마지막 연의 끝이 열려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두보의 이 작품은 가운데 두 연에서 댓구를 사용한다는 원칙을 십이분 지켰기 때문에 성공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두번째 예로는 우리 선조가 사용한 댓구를 보겠습니다.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작품입니다.

 

〈花石亭〉    

 

林亭秋已晚,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璧,

霜楓向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화석정"

 

숲 속 정자에 이미 가을이 깊어,

시인의 마음은 끝을 모릅니다.

 

멀리로 흐르는 물, 푸른 하늘에 닿고;

서리 내린 단풍, 붉은 해를 마주합니다.

 

산이 외로운 달을 뿜어 올리니;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습니다.

 

멀리서 온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지,

그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스러집니다.

 

보다시피 이 시 역시 오언율시입니다. 평성과 측성을 짝지어야 하는 기본구조는 한시를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그냥 제 말을 믿으시지요.  이 작품은 성조의 안배에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이건 두보의 경우에 비교하면 더욱 대단합니다. 우리말의 한자 발음에는 입성자를 제외하고는 성조를 구분할 방법이 없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던 당시 성조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방점을 더해 성조를 나타내려고 했지만, 그것을 실제의 한자 발음으로 경험하고 확인할 수 없는 우리 선조들은 암기에 의존해 평측을 맞출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의 한시는 성조의 실수를 찾기 쉽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댓구는 또 명사를 명사로, 동사를 동사로 짝지어야 합니다.  이 작품은 거기서 한층 더 발전된 댓구의 기교를 보여줍니다. 천체, 기후와 관계된 명사(天과 日, 月와 風)끼리, 색깔을 나타내거나 색깔의 의미를 포함하는 명사(璧과 紅)끼리, 지형에 관한 명사(山과 江)끼리 짝을 지었습니다. 다섯째와 여섯째 구절의 둘째 글자인 동사의 선택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둘 다 입 구 자(口)가 들어있는 동사(吐와 含)끼리 짝을 지은 것입니다. 전치사도 역시 또 하나의 전치사로 짝을 지었습니다 (連과 向).  이런 댓구의 실천은 율시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율곡의 선택 중 가장 훌륭한 건 萬이란 숫자를 孤와 짝지었다는 사실입니다.  孤에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숫자의 개념이 들어있음에 착안한 것이지요.  댓구가 잘 이루어진 이 두 연을 반복적으로 읽으며 음미하다 보면 마지막연에서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기러기를 바라보는 시인(둘째 행에서 이미 보았고, 이 전체에서 이 사람의 끝을 모르는 마음을 느껴왔지요)을 생각하게 됩니다.

 

율곡의 이 작품에 대한 토론을 읽으시면서 내가 괘씸하다고 야단치고 싶은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가 자랑하는 훌륭한 학자의 호에 "선생"이나 "선생님"의 호칭을 더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이겠습니다. 사실 그 호칭을 뺀 것은 이 시를 짓던 당시 율곡이 고작 여덟 살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덟 살 어린아이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은 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을 쓴 시인으로 여덟 살 소년을 상상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짓기가 아무리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모방할 대상이 이 정도의 끝없는 뜻을 담았어야 하는데, 그런 작품을 쉽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세째 구절과 네째 구절, 다시 다섯째 구절과 여섯째 구절을 왕복하며 율곡의 경험과 감성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마지막 연의 끝나지 않는 끝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멀리 하늘 끝으로 사라지는 기러기, 구름 속으로 스러지는 그 울음소리를 따르며 감상을 마무리 하지만, 정말 마무리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겠습니다. 대단합니다. 

 

(2021.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