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3

"생생하게 살아계신 허세욱선생님"

이라는 수필전문 문예지의 청탁으로 지난 7월초 돌아가신 허세욱선생님을 추모하는 글을 또 하나 썼습니다. 2010년 가을호에 실렸습니다, ----- "생생하게 살아계신 허세욱선생님" 선생님께서 영면하시던 날 저녁 나는 빈소에서 입맛 쓴 소주를 참 많이 마셨다. 그냥 소주가 아니었다. 6월 초 고문헌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으로 가는 길에 잠시 귀국해 전화로 인사를 드리면서 찾아뵙겠다고 했었다. 편치 않으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꼭 뵙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선생님께서는 오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은 와도 소주 한 잔 같이 할 수 없으니, 회복한 다음 소주 한 잔 할 수 있을 때 오라고 하셨다. 학회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와 고대병원에서 뵙게 되었을 때는 이미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잔을..

에세이 2010.09.24

"군신유의(君臣有義)"를 생각한다

"군신유의(君臣有義)"를 생각한다 나라의 중요한 직책에 지명된 사람들이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 한참 사회가 떠들썩했다. 또 흠결의 혐의가 짙은 사람들이 지명되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에 정책의지를 강력히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운 사람들을 기용하려다보니 흠결을 알고도 애써 외면했다고 이해해준다면 가장 선의적이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통령의 이번 지명에서 내가 데려다 쓴다는데 왠 말이 그렇게 많으냐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제까지 여러번의 고위공직자 지명에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총리를 포함해 세 명의 지명자가 사퇴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고 하지만, 분명히 흠결이 있어보이는 사람을, 상당히 분명한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임명하기도 했으니, 진정한 마무리는..

에세이 2010.09.01

"참 특별했던 미사"

참 특별했던 미사 지난 주일(2010년 8월 22일)은 참 특별한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내가 미리 알고 일부러 찾아간 것도 아닌데 많이 배우면서 기도하는 참 좋은 기회였습니다. 큰 은총으로 생각합니다. "아씨씨의 성 프란치스코 (St Francis of Assisi)"라는 본당이었습니다. 갑자기 생긴 일정이 내가 속한 본당의 주일미사 시간과 중복되어 인터넷에서 근처의 다른 본당 미사시간을 확인하고 그냥 한 시간 일찍 교중미사를 하는 본당을 찾아간 것 뿐이었습니다. 동네 전체가 좀 어둠침침해서 분위기가 그리 유쾌해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근처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두리번거리며 성당처럼 생긴 건물을 찾다보니 조그만 공원에서 야외미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오르간 두 대와 플룻, 꼭 ..

에세이 2010.08.26

"자유롭게 하는 교육"

다음은 몇 년 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초빙교수로 근무할 때, 기초교육원 뉴스레터의 교수칼럼에 기고한 글입니다. ----- “자유롭게 하는 교육” 처음 대학교수가 되었을 때는 새치도 하나 없었는데, 어느새 반백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려는 사람을 만나는 봉변을 더러 당한다. 짧지 않은 세월을 대학에서 보낸 것이다. 세상에 쉬운 삶이 어디 있으랴만, 대학교수라는 생활은 결코 쉽지 않다. 읽을 책도 많고, 써야하는 글에 늘 쫓기며 산다. 내 강의실과 연구실을 거쳐 가는 많은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의 생각과 삶에 내가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게 문득문득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선생으로 피할 수 없는 갖가지 번민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런데도 대학생활을 접지 못한 건 ..

에세이 2010.08.13

허세욱선생님 추모의 글

대학시절부터 은사님이셨던 허세욱선생님이 지난 달 초 영면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추모의 글을 썼습니다. ---------- [한겨레신문 2010년 7월3일자] 가신님의 발자취: 허세욱 (외국어대 초빙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학문의 경계 허문 선생님 업적 새기겠습니다" 선생님, 이른 아침 새소리가 유난히 맑습니다. 홀연히 떠나시려는 선생님을 놓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제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아 이 맑은 소리가 지금은 오히려 야속합니다. ‘너처럼 미욱한 제자는 몇 번 다시 살아도 이루지 못할 많은 업적을 이루셨으니 감사하며 기꺼이 보내드리라’고 짹짹이는 것이겠지요. 그런데도 선생님 옷소매를 잡고 매달리는 것은 남기신 빈 자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참 열정적인 학문으로 본을 세..

에세이 2010.08.06

빨간 속옷과 유가(儒家)의 가르침

©반빈 "빨간 속옷과 유가(儒家)의 가르침" 재작년인가 중국을 여행하다가 상하이(上海)의 한 주택가 골목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과년한 여인의 속살에 내밀하게 마주 닿아있었을 속옷이 통째로 내걸렸으니 보기에 조금 민망하고 쑥스러웠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도 사진까지 찍어 보관했다는 걸 너무 탓하지 마시라. 심각한 관음증(voyeurism)을 앓아 훔쳐보듯이 그 속옷 뒤에 숨어있었을 몸뚱이를 상상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믿기 어려울지 몰라도 문득 유가(儒家)에서 가르치는 "인(仁)"과 "예(禮)"의 문제에 생각이 다다랐고, 그 이야기를 꺼낼 좋은 화두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행을 불러세우고 핀잔을 들을 걸 무릅쓰면서 카메라를 꺼내 찍어둔 것이다. 이 장면처럼 속옷이, 그것도 선명한 빨강색의 여..

에세이 2010.05.25

환상의 조합

"환상의 조합" 셋에 여섯을 더하면 아홉이고, 거기서 둘을 빼면 일곱이다. 숫자는 그렇게 늘 일정한 값을 공평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곱에 둘을 곱하면 열넷이고, 거기서 다섯을 빼면 또 아홉, 그 아홉의 양 옆에는 여덟과 열이 있다. 이렇게 보면 숫자의 값은 정말 한결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숫자의 가치가 그렇게 늘 일정한지는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지 않다. 백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만원이 생길 때와 만원밖에 없는 사람에게 이만원이 생길 때, 그 이만원이 꼭 같지만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백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만원에 대해 가지는 애착이 만원밖에 없는 사람이 자신이 가진 돈이 세 배로 불어나는 데 대한 애착에 비해 작다는 뜻은 또 아니다. 있는 사람일수록 악착같을 수 있..

에세이 2010.05.18

새로운 계급투쟁

"새로운 계급투쟁" 안다. 가뜩이나 시절이 뒤숭숭 하수상한데 말을 함부로 써서야 쓰겠는가. 특히 "계급투쟁" 같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역사이론에 등장하는 어휘를 제목에서부터 써 대면 누군가 "빨"자나 "좌"자 딱지를 내 이마에 붙이려할 것 아닌가. 연좌가 없어졌다고는 해도 그게 정말인지 아직 안심이 되지 않으니, 나뿐 아니라 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칠지 모르지 않는가. 아무튼 그런 딱지가 붙으면 좋을 게 없다는 건 현대사를 통해 우리가 절절히 배워온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몸살을 설명하는 데 이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새로운 계급투쟁" 속에 있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수 있고, 또 어쩌면 앓고 있는 그 몸살을 떨치..

에세이 2010.04.25

"아독취(我獨醉)"는 말장난?

"아독취(我獨醉)"는 말장난? 블로그 이름에 쓴 "아독취(我獨醉)"라는 말을 보고 그게 뭐냐는 사람부터 말장난 한 번 재미있게 했다는 사람까지 반응이 갖가지입니다. 물론 그걸 말장난이라고 부른 사람은 한문시간에 그래도 글줄깨나 읽어서 출전을 알뿐 아니라, 출전의 표현을 비튼 결과라는 것까지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물론 말장난이지요. 그러나 그런 말장난밖에 다른 위안이 없는 상태라면 그냥 장난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독취(我獨醉)"는 물론 옛날 옛날 중국의 시인 굴원(屈原)의 말을 비틀어서 만든 말입니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어부(漁父)"라는 글을 보면 삼려대부 굴원이 모함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호숫가를 배회하면서 무언가 주절거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에세이 201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