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몇 년 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초빙교수로 근무할 때, 기초교육원 뉴스레터의 교수칼럼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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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하는 교육”
처음 대학교수가 되었을 때는 새치도 하나 없었는데, 어느새 반백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려는 사람을 만나는 봉변을 더러 당한다. 짧지 않은 세월을 대학에서 보낸 것이다. 세상에 쉬운 삶이 어디 있으랴만, 대학교수라는 생활은 결코 쉽지 않다. 읽을 책도 많고, 써야하는 글에 늘 쫓기며 산다. 내 강의실과 연구실을 거쳐 가는 많은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의 생각과 삶에 내가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게 문득문득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선생으로 피할 수 없는 갖가지 번민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런데도 대학생활을 접지 못한 건 대학이라는 공동체가 지닌 여러 가지 매력 때문이다.
아주 특수하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받은 훈련과 직접적인 관계가 별로 없어 보이는 공통의 임무를 위해 힘을 합한다는 것이 그 매력의 하나다. 그 핵심에 기초교육이 있다. 우리의 대학사회에 아직 기초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합의가 없으면서 기초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는 별 이의가 없다는 건 참 재미있는 사실이다. 물론 무엇을 하는 건지 왜 하는 건지 모르면서 무작정 강화하자고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이 받은 특수한 훈련과 그 동안 쌓은 삶의 경험을 토대로 젊은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다. 단지 그게 구성원의 특성상 사람마다 제각각일 수밖에 없어서, 사람이 열이면 생각은 열둘인 듯 다양하다. 그래서 합의는 애초에 기대난일지 모른다. 그렇게 종잡을 수 없이 엇갈리는 생각을 내놓고 서로 합의하고 조정하면서 젊은 학생들을 위해, 또 그들이 나중에 짊어질 우리 사회의 내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니 매력을 느낄 만하지 않은가.
물론 나도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 나는 중국의 고전을 중심으로 문학사와 사상사의 문제에 대해 연구하는 훈련을 받았다. 출발부터 고리타분한 책곰팡이 냄새가 날지 모른다. 물론 내가 하는 연구가 무척 흥미롭고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비슷한 문제를 연구할 후학을 많이 양산해야한다는 사명감은 그리 크게 느끼지 않다. 열심히, 꾸준히 할 후배가 어느 정도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학부의 강의를 준비하며 나는 오히려 내가 늘 읽는 고전 텍스트와 그에 대해 생각하는 훈련이 전공으로 학문을 계속하지 않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말하자면 전공과목을 가르칠 때에도 기초교육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기초교육이 학생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훈련이어야 하고, 그 점에서 전공교육도 그리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면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찾아 그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으면 좋은 기초교육이고, 또 좋은 교육이다.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은 참 여러 종류이다. 문학이나 예술, 역사, 사회현상과 자연현상 등 많은 "텍스트"를 대하면서 그 속에서 무엇을 보고, 그걸 어떻게 생각할지 단서조차 찾지 못해 답답한 적이 있다는 건 여러 사람의 공통적인 경험이다. 이를테면 피카소의 그림을 보거나 윤이상의 음악을 들으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무얼 보고 어떻게 생각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은 만만치 않은 질곡이다. 그래서 기초교육은 무얼 보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서 겪는 어려움으로부터 학생들을 자유롭게 해주어야한다. 그런 훈련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된 후에도 그걸 말과 글로 표현하지 못해서 겪는 어려움이 있다. 남의 말과 글에 대한 경청과 정독을 통해 서로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면서 진정하게 대화하는 것도 상당한 어려움이다. 그래서 기초교육은 글과 말로써 대화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 학생들을 자유롭게 해야한다.
그런 훈련은 다양한 사고방식과 배경을 가진 학생과 교수를 만나 자신이 성장배경과 교육과정을 통해 가지게 된 아집과 편견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되는 노력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기초교육과정에서 늘 강조되는 외국어는 그저 외국인들과 만나서 인사를 나누거나 외국 여행중에 길을 묻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다. 우리가 모국어를 쓰면서 알게 모르게 가지게 된 많은 전제와 가설을 뿌리부터 흔들며 재고하게 하여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고, 그를 통해 편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기 위해,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기 위해 외국어를 배운다. 외국어를 통해 외국의 역사나 문학을 접하여 힘써 이해하고 분석하눈 훈련을 하게 될 때, 교육을 통해 얻는 자유는 더욱 폭넓게 깊이있게 된다.
기초교육은 좁은 의미에서는 전공교육을 위한 준비이고, 넓게 보면 시민사회의 일원이 되어 지성적으로 충만된 삶을 살기 위한 준비이다. 그러므로 기초교육은 기초교육과정에서 완성되어 갈무리되지 않는다. 전공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또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평생을 살면서, 보고, 느끼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말과 글로 생각을 나누고, 그 과정을 열린 마음으로 임할 수 있으려면 기초교육의 훈련이 전공교육과정에서 심화되고, 일생을 통해 계속 반추되고 다져져야 한다. 그래서 그 과정의 시작만을 기초교육이라고 하는 건 그리 적절하지 않다. 기초교육은 우리가 배우고 살면서 가져야하는 능력과 소양을 계속 키워가는 과정이고, 진정한 자유를 찾아 지키는 과정이다. 대학에서 기초교육을 강화하자는 말은 그런 긴 과정을 잘 시작하도록 하자는 뜻이다. 기초교육을 여러 가지 지식을 구색을 맞추어 두루 갖추자는 정도로 이해한다면 강화하자는 주장에 수긍하기 어렵다. 기초교육이 정말 원초적이면서 지속적으로 겪는 어려움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훈련이고 노력이기 때문이다.
(《열린지성》창간호, 2005년 여름, 16-7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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