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신유의(君臣有義)"를 생각한다
나라의 중요한 직책에 지명된 사람들이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 한참 사회가 떠들썩했다. 또 흠결의 혐의가 짙은 사람들이 지명되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에 정책의지를 강력히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운 사람들을 기용하려다보니 흠결을 알고도 애써 외면했다고 이해해준다면 가장 선의적이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통령의 이번 지명에서 내가 데려다 쓴다는데 왠 말이 그렇게 많으냐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제까지 여러번의 고위공직자 지명에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총리를 포함해 세 명의 지명자가 사퇴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고 하지만, 분명히 흠결이 있어보이는 사람을, 상당히 분명한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임명하기도 했으니, 진정한 마무리는 아니었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런한 행태가 반복되면서 고위 공직자의 선택과 지명, 임명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대부분 지명한 사람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지명을 받은 사람이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화두는 분명 자못 달라야 할 것이고, 그러한 화두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 피지명자가 내가 그런 직책을 맡을 자격이 있는지, 그런 자격을 이제까지의 삶에서 노력으로 얻었는지를 물어야 함은 말할 것 도 없다. 확실히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으면 그쯤해서 지명을 사양해야 본인이나 나라를 위해 탈이 없다.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 기회를 시민들이, 언론이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피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어쩌면 한결 더 근본적인 화두을 잊고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화두 하나를 더하고 싶다. 바로 "군신유의"라는 말이다.
군신유의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의로움으로 정의된다는 말로,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과 함께 오륜(五倫)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공자의 가르침은 명분에 맞게 행동하라는 소위 "정명(正名)" 이론의 기초 위에 인간관계에 따라 각각 적절한 행동방법이 있다는 "인(仁)"의 이론을 뼈대로 이루어졌다. 오륜은 많은 인간관계 가운데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다섯 가지로 유학의 가르침에서 수없이 논의됐다. 그러나 그 뜻이 무엇인지는 쉽지만은 않은 문제이다.
이 다섯 가지 중 첫째는 부자유친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규정한다. 거기서 "친(親)"이라는 말은 피를 나누었느냐 하는 생물학적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어떤 다른 설득도 필요하지 않다. 나를 낳은 분들이 내 부모이고 내가 낳았으면 내 자식인 것이다. 존경스럽지 않다거나, 말썽을 피운다고 해서 내 아버지가 아니라거나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륜의 나머지 네 관계에는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이 필요함을 나타내는 말들이 개입된다. 이를테면 "군신유의"라는 말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옳음과 의로움에 따라 만들어짐을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하면, 옳고 의로운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성립하지도 않는 것이다. "붕우유신"은 믿음으로 맺어지지 않았다면 붕우, 즉 친구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대통령과 각료의 관계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등치한다는 데 무리가 없지 않지만, 그 두 관계가 모두 옳음과 의로움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아가, 옛날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그럴진대, 21세기의 민주사회에서 대통령과 각료가 "옳고 의롭다는" 뜻의 "의(義)"가 없다면 관계 자체가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군신유의의 "의"는 소위 "돌쇠족"이나 조폭의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의리"일 수 없다. 이성적, 도덕적 설득력 위에 이루어지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각료의 관계는 옳은 일, 의로운 일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관계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런 관계는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지명을 받은 분들이 꼭 물어야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대통령은 의로운 일을 함께 하자고 나를 불렀는가. 나는 옳은 일을 하는데 기여하기 위해 그 부름에 응하는 것인가. 개인의 영달이나 가문의 명예에 대한 집착이 이런 질문에 앞서 간다면, "군신"의 관계 혹은 대통령과 각료의 관계는 아예 성립하지도 않는다. 사회 일부계층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의 국민을 몰아대기 위해서 부른다면 어찌 그것을 성립할 수 있는 관계라고 하겠는가. 혹시 자신의 흠결이 양해되거나 가려져 중책을 맡게 된다고 해도, 애초에 옳은 일을 위해서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거나, 그 자리를 차지한 후 할 일이 의롭지 않다면 일시의 영광에 눈을 팔 일이 아니다. 국가와 사회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로운 관계에서 의로운 일을 위해 부르는 것인가. 내게 의로운 일에 헌신할 각오가 있나. 지명이나 임명을 수락하기 전 꼭 물어야할 말이다. 심각한 흠결에도 불구하고 임명되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곱씹어 반성할 화두이다.
(2010년 8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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