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부터 은사님이셨던 허세욱선생님이 지난 달 초 영면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추모의 글을 썼습니다.
----------
[한겨레신문 2010년 7월3일자]
가신님의 발자취: 허세욱 (외국어대 초빙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학문의 경계 허문 선생님 업적 새기겠습니다"
선생님,
이른 아침 새소리가 유난히 맑습니다. 홀연히 떠나시려는 선생님을 놓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제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아 이 맑은 소리가 지금은 오히려 야속합니다. ‘너처럼 미욱한 제자는 몇 번 다시 살아도 이루지 못할 많은 업적을 이루셨으니 감사하며 기꺼이 보내드리라’고 짹짹이는 것이겠지요. 그런데도 선생님 옷소매를 잡고 매달리는 것은 남기신 빈 자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참 열정적인 학문으로 본을 세워주셨습니다. 집필하시는 문학사에 거명할 작가의 작품은 다 읽어봐야 하지 않느냐며 중국문학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시느라 밤낮없이 사셨습니다. 그 많은 연구서 한 권 한 권에 그런 엄격한 원칙을 담으셨습니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는 선생님의 손길이 닿은 많은 영역의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넘을 수 없다고 늘 우리 스스로가, 또 서로에게 긋고 그 안에 안주하는 많은 경계선을 선생님께서는 하나하나 허물고 넘나드셨습니다. 우선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아우르는 학문의 폭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문학의 연구과 문학 창작 사이의 거리도 이웃집 마실 다니시듯 건너셨습니다. 창작에서는 수필과 시의 경계를 모르고 사셨습니다. 또 언어의 경계도 없었습니다. 타이완과 중국의 문단에서 확고하게 다지신 위치는 우리 문단에서의 위치와 다르지 않았으니, 바로 “두 언어의 생애”라고 하신 선생님의 표현 그대로 입니다. 타이완의 문인 친구들은 선생님의 문필에 혀를 내두릅니다. 두 언어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참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춘향전을 포함해 많은 우리 고전과 현대문학을 중국에, 중국의 문학을 우리에게 소개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또 학교의 안과 밖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엄격한 학문을 하시면서 얻은 깊은 지혜를 백화점 문화강좌에서도 마다하지 않고 풀어내셨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나온다는 걸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또 나이의 경계도 허무셨습니다. 막내동생 뻘, 심지어 막내아들 뻘 되는 제자와 후학들을 다정한 친구처럼 소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석달 전까지만 해도 제게 저녁내기 탁구시합을 하자고 하셨으니까요.
그렇게 많은 세계를 넘나드시며 만나신 수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뒤로 하고 떠나십니까? 또 저희는 그런 선생님을 어떻게 그냥 보내드릴 수 있습니까? 하지만 보내드려야지요. 남기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루신 업적을 하나 하나 새기겠습니다. 평안히 잠드십시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 특별했던 미사" (0) | 2010.08.26 |
---|---|
"자유롭게 하는 교육" (0) | 2010.08.13 |
빨간 속옷과 유가(儒家)의 가르침 (0) | 2010.05.25 |
환상의 조합 (0) | 2010.05.18 |
새로운 계급투쟁 (0) | 2010.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