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지게미"
술이나 식초를 만들고 생기는 찌꺼기를 중국말로 "짜오(糟)"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무슨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우리말로 "제엔장"이나 "제기럴" 정도의 뜻을 내뱉고 싶을 때도 사용한다. 보통 "떡"이라는 뜻의 "까오(糕)"를 덧붙여 "짜오까오!"라고 하는데, 뜻은 별로 다르지 않다. 술찌꺼기를 떡처럼 뭉쳐놓은 걸 뜻하는 것일 테니 여전히 술찌꺼기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입에서 "제기럴", 조금 젊은 세대 사람이라면 "씨X" 정도의 말이 나올 상황에서 중국사람들은 "술지게미!"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테니스 게임에서 더블폴트를 했거나, 방에 열쇠를 둔 채로 방문을 잠가 낭패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이 말이다. 이 말을 미국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영어의 "Shit!"과 아주 유사한데 다른 점이 있다면 "짜오까오"는 할머니가 계신 데서 사용해도 그리 야단맞을 일이 없을 어감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이 말은 또 어떤 일의 진행이나 사람의 품격 또는 능력이 형편없다고 할 때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좋지않은 뜻의 말이 음식이름에 섞여나올 때가 있다는 게 재미있다. "짜오차오순지앤(糟炒筍尖)" 또는 "짜오차오지쓰(糟炒鷄絲)"가 바로 그런데 죽순끄트머리나 닭고기를 잘게 채썬 후 술지게미를 넣어 볶은 요리이다. 이런 재료뿐 아니라, 두부나 생선, 특히 게 따위의 음식재료도 술지게미와 잘 어울린다. "제기럴"이라는 뜻의 글자가 들어있다고 해서 시식을 피한다면 참 맛있는 음식을 놓치게 된다.
그런데 이 술지게미를 구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내가 타이완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80년대 초반, 타이완은 술을 정부에서 전매했다. 우리도 전매청(專賣廳)이라는 정부기관이 있어 담배나 인삼의 판매를 독점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타이완에서는 그와 유사한 정부기관을 꿍마이쥐(公賣局)라고 했고, 거기서 담배나 술의 판매를 독점했다. 술의 품질은 상당히 좋았다. 진먼(金門)섬에서 나오는 독한 고량주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상당했다. 사오씽지우(紹興酒)는 쌀로 빚은 술로 정종과 비슷해서 따듯하게 데워 마시는 게 보통이다. 향내가 아주 진해서 처음 마시는 사람들이 조금 역겹게 느끼는 경우도 있고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한 순배가 돌아가기 전에 벌써 적응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즐겨 마신다. 이 술은 조리용으로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만두소를 만들 때 소흥주를 조금 넣으면 두부와 김치를 주재료로 만드는 우리 만두소와 달리 야릇한 맛을 더한다. 중국집에서 먹는 교자의 맛을 잘 흉내낼 수 없게 하는 비밀이 이 술에도 있다. 중국음식의 조리에 쓰이는 술지게미는 바로 소흥주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이다. 그런데 타이완의 공매국은 이 술지게미를 팔지 않았다. 자기들만의 양조법을 비밀로 하겠다는 게 이유였는데 실제로 술지게미는 다음번 술을 만들 때 쓰인다고 한다. 그러나 생산되는, 아니 찌꺼기로 남는, 지게미가 상당한 양이었을 텐데 그걸 다 어찌 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직도 술지게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버리는지 다음에 타이완에 가게 되면 알아보고 싶다.
결국 중국대륙 각지의 물건들을 모아놓고 파는 식료잡화점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그냥 "짜오"라고만 하기에는 뜻이 조금 뭣한지 그 앞에다 향기롭다는 "샹(香)"자를 붙여 "샹짜오"라고 하는 게 보통인데, 꼭 우리나라 청국장 재료처럼 둥글넙적하게 만들어서 그걸 플라스틱 통에 꽁꽁 밀봉해서 판다. 그걸 하나 사다가 두뼘 정도 높이의 작은 간장독만한 유리병에 넣고 거기에 좋은 소흥주를 한두 병 더해서 마개를 꼭 막아 한두 달 두면 술지게미가 흐물흐물 퍼져 전체 맑은 홍차빛으로 변하는데, 그러면 한 국자씩 퍼다가 요리에 쓰는 것이다. 물기가 없는 국자로 병바닥을 훑으며 퍼야 맛이 진한 양념이 되고 술지게미의 보관에도 문제가 없다. 물과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음식에 신경을 쓰는 주부가 있는 집에서는 그렇게 준비한 술지게미병을 늘 유지한다. 술지게미가 병의 절반 아래로 떨어져가면 채워야 한다. 다시 술지게미와 소흥주를 넣어도 좋겠지만 흰쌀밥과 소흥주를 넣기도 한다. 아마 이미 들어있는 술지게미의 조화로 흰쌀밥을 동화시키는 모양이다.
술지게미병을 유지하는 게 성가시지 일단 퍼다 쓸 술지게미가 준비되어 있으면 그 때부터의 조리법은 간단하다. 두부나 생선박편, 오징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상상할 수 있는데, 섞지 말고 한가지 재료만 쓰는 게 좋다. 이것 저것 넣고 싶으면 닭고기로 한 접시, 두부와 계절 채소로 한 접시, 그렇게 두 가지를 따로 준비하는 게 좋을 듯 하다. 닭고기를 조금 얼려 썰기 편하게 한 다음 길쭉하게 채를 내어도 좋겠고, 생선을 전 부칠 때 준비하듯 한입에 적당할 정도로 납작납작 썰어도 좋겠다. 그렇게 준비한 재료에 술지게미병에서 지게미와 술이 섞이게 깊숙히 국자를 넣어 퍼 더하고, 거기에 설탕과 소금, 간장 등을 소량 넣은 후 녹말가루도 조금 넣어 적당히 섞는다. 너무 잘 섞으려다 보면 주재료가 끊어지고 부서져 진떡처럼 되는 수가 있으니 젓가락으로 너댓 번 적당히 섞으면 된다. 그걸 꼭꼭 막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상에 내기 바로 전에 꺼내 볶아내면 된다. 볶을 때 진떡이 되어버리는 경우나 일부가 타버리는 경우를 경험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애써 준비한 재료가 음식상에 나가기 바로 전 단계에서 사고를 당하게 되는 셈이니 낭패이다. 요령이 있기는 하다. 바닥이 두툼한 팬을 덥혀 손에 열기를 어느 정도 느끼게 될 때까지 기다린 후 식용유를 넣고 바로 준비한 음식재료를 넣어 빨리 볶아내면 진떡이 되는 걸 피할 수 있다.
술지게미로 조리한 음식은 80년대 초 타이베이의 충칭난루(重慶南路)에 있던 푸씽유안(復興園)이라는 음식점에서 맛있게 먹은 경험이 있다. 후오처짠(火車站)이라고 부르던 타이베이역의 건너편에 있는 길인데, 책방이 많이 모여있는 지역이라 가끔 가서 한 나절 이 책방 저 책방을 기웃거리며 책도 읽고 너댓 권을 사서 안고 들릴 수 있던 집이었으니 정신적 식량과 육체적 식량을 함께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긋한 나이의 주방장이었는데, 내가 타이베이를 떠나기 전에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없어져 버렸었다. 술지게미와 죽순이 이루는 조화가 혀끝에 기억되어 있다.
술지게미로 요리한 음식을 메뉴에 올려놓은 집은 그리 많지 않다. 어디선가 만나게 되면 꼭 시식하길 권한다. 궁금하면 술지게미를 한 번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망칠 가능성이 많지 않으니 중국 식품재료점에 가서 "샹짜오"를 찾아달라고 하고 소흥주도 너댓 병 사다 두병은 술지게미에 부어주고, 한 병은 요리술로 보관하고, 나머지는 따듯하게 덥혀 시음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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