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음식 기행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 먹은 4인분 점심

반빈(半賓) 2010. 3. 5. 07:07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 먹은 4인분 점심"

 

    중국 출장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즐겁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그 즐거움의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한다.  우선 땅덩어리가 커서 여러 지방의 특색있는 음식이 참 많고, 오래 지속되고 있는 문명이라 음식에 갖가지 사연이 담겨있어 흥미롭다.  범상치 않은 재료로 만든 음식이 꼭 마음을 끄는 건 아니지만, 당나귀 고기나 전갈 같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료를 식탁에서 만나는 것도 아슬아슬한 즐거움이다.  그래서 중국출장을 앞두고는 늘 이번에는 어떤 음식을 경험을 하게 될까 마음이 설레곤 한다. 

   

그러나 첫번째 여행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나 자신 조금 긴장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중국은 풍부한 음식문화의 전통을 외국인들에게 소개할 준비가 아직 부족했었던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1990년이 되어서 비로소 처음 중국 땅을 밟았다.  그 전에도 학술연구를 위해 입국을 신청한 일이 있었으나 한국의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허락을 받지 못했다.  미국의 대학이 보증을 서고 추천을 해도 별무소용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 여름 중국 국가교육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학술회의에 참석한다고 하니 비로소 입국을 허락했다.  그나마 내 여권에 비자를 찍어준 게 아니었다.  입국허가증을 따로 발행해 여권에 호치키스로 붙여두었다가 출국하는 날 공항에서 다시 떼어가 중국 입출국의 흔적을 지워버린 걸 보면 그 당시만 해도 중국은 최소한 우리같은 책벌레들에게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던 듯 하다.

 

물론 그 때는 오늘의 중국이 있게 한 소위 "개혁개방(改革開放)"이 이미 시작된 후였지만, 외국인들이 편하게 여행하기엔 아직 매우 부족했다.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게 그리 수월치 않았다.  흔한 게 음식점이기는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음식점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다.  커다란 물통을 길에 내놓고 수저나 식기를 씻고 있는 모습이 적쟎게 눈에 띌 정도였으니 과연 위생적일까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마음놓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숙소였던 수도사범학원(首都師範學院)의 외빈루(外賓樓)에 딸린 식당이 있어 지낼만 했으나 음식에서 찾으려고 했던 즐거움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지 생각하며 밖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찾아 먹어 보겠다고 나섰다가 과일만 한 봉투 사들고 들어온 적도 많았다.  끼니를 걱정해야한다는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는 건 적절하지 않겠지만, 밖으로 일을 보러 나갈 때는 늘 밥을 어디서 먹나 걱정이 되었다.  체코와 합작으로 생산되는 필스너 스타일의 그럴 듯 한 맥주가 있었다는 게 참 다행이기는 했지만, 그걸로 음식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첫 방문이었던 만큼 매우 바빴다.  도서관과 책방을 뒤져 연구자료를 구하는 일에서부터 곧 있을 학술회의를 준비하는 일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구경도 다녀야 했다.  말하자면 촌놈 역할을 기꺼이 해야 했던 신세였다.  청나라의 황궁이었던 자금성(紫禁城)이나 천단(天壇)처럼 관광객이면 꼭 가보는 곳들과, 이승훈이 세례를 받았다는 천주교 북당(北堂) 등 개인적인 호기심때문에 보고 싶은 곳을 포함해 북경 시내 곳곳을 가능하면 많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교통 수단이 아주 불편했다.  당시만 해도 공공교통수단인 버스나 무궤전차(無軌電車: 꼭 버스처럼 생겼으나 지붕위로 안테나 비슷하게 달린 장치를 통해 전선과 연결되어 동력을 공급받는 교통수단)는 저녁 일곱시 전후해서 막차가 지나갔다.  차가 다니는 낮에도 모두 60년대 말 서울을 상기시키는 콩나물 시루이기 일쑤여서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택시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대부분 큰 호텔을 출발점으로 움직이면서 길에서 손님을 태우지는 않았다.  자전거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잠시 와 있는 입장에서 자전거를 구하기도 그랬다.  결국 걸어다니며 구경하는 게 힘은 들어도 제일 편했다.  연구하는 날은 종일 도서관이나 책방에 앉아있었고, 관광을 하는 날은 아침부터 걸었다.  끼니는 대부분 길거리 좌판에서 산 과일로 때웠다.  덕분에 많은 걸 구경할 수 있었지만, 땀도 꽤 흘려야 했다.

 

음식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경험은 생각치 않게 만리장성에서 있었다.  기왕에 촌놈 노릇을 하면서 만리장성을 뺄 수는 없었다.  물론 걸어가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우선 가까운 관광호텔로 가 택시 한 대를 대절했다.  기사의 운전솜씨는 곡예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솜씨가 없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은 상황이었다.  모든 책임이 차를 빠르게 모는 기사에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큰 길의 네거리에도 황단보도는 고사하고 아직 교통신호등조차 없는 곳이 많았다.  대신 제복을 단정하게 입고 교차로 한가운데 서서 호루루기와 두 손으로 교통정리를 하는 여순경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교통순경이 없거나 있어도 길 가에 멀뚱멀뚱 서 있을 뿐 교통정리를 하지 않는 네거리가 많았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탄 차를 몰던 기사는 그런 모습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 했다.  한 시간 교통정리를 하면 십 분은 쉬어야지 않겠느냐고 했다.  여덟 방향으로 움직이는 차들이 동시에 뒤섞여 비비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는데도 빠른 속도로 달렸다.  내가 탄 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사는 오늘 하루 벌이는 이미 확보했으니 즐긴다는 기분이었는지 콧노래 소리에 맞춰 속도를 내며 숨막히는 곡예를 했다.  누가 먼저 갈지 어떻게 정하느냐고 물었더니, 잠시의 주저도 없이 "칸세이다얼따(看誰膽兒大)!"라며 낄낄댔다.  담이 큰 순서대로 아니겠느냐는 대답이었다.  천천히 가자는 말에 대답은 막대기처럼 잘 했다.  그러나 대답이야 어떻게 하든 감속할 기분은 아닌 듯 했다.  나는 며칠 전 숙소에서 북당까지 걷고, 거기서 다시 북경의 주교좌 성당이라는 남당까지 걸으면서 하던 기도를 다시 했다.  성당까지 가는 길에는 땡볕에 땀을 흘리며 한 기도였지만, 만리장성까지는 땀나는 손으로 택시 좌석을 움켜잡고 했다는 게 달랐다면 달랐다.

 

마음을 졸인 보람이 없지 않았다.  나도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택시기사가 워낙 서둘러 주어서 도착해 보니 아직 오전 열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천천히 여기 저기를 돌아볼 시간 여유를 번 것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산마루에 오르기도 전에 벌써 장관 그 자체였다.  그때 가 본 부분은 빠아다링(八達嶺)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는데 능선을 타고 연결되어 있는 산성이 힘차게 꿈틀거리는 길고 긴 용(龍)의 모습이었다.  산성뿐 아니라 사람들이 또 대단했다.  만리를 이어졌다는 뜻에서 붙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말보다는 만인장성(萬人長城)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하지 않겠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대부분이 중국 각지에서 온 국내관광객으로 보였다.  그들은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앉아 무언가 먹고 있었다.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 때 이 산성을 볼 수 있을까.  결국 산성을 타고 한 방향으로 계속 걷기로 했다.  두 시간 가깝게 그렇게 걷고 나니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산성 역시 보수가 되지 않은 채로 허물어져 있었지만 중국에 온 후 처음으로 사람이라고는 나뿐인 곳에 서있다는 게 신기했다.

 

닉슨대통령이 만리장성 위를 걷는 사진을 보면서 널찍해서 걷기에 편한 줄 알았지만 실제 사정은 정말 달랐다.  아주 당연한 사실이 그 사진 속에서 잊혀졌던 것이었다.  성벽 저 밖에 있는 "오랑캐"들이 침략하지 못하도록 지었으니 능선 가장 높은 곳을 따라 지었을 테고, 그러니 성 위를 걷는 건, 산 능선을 따라 걷는 등산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산성을 타고 한 방향으로 두 시간, 왕복 네 시간 가까운 거리를 계속 걸었다.  모퉁이를 하나씩 돌 때 마다 용트림하듯 자태가 달라지던 산성에 압도되어 힘든 것도 배고픈 것도 잊고 있었다.  출발했던 만리장성 입구에 되돌아 오니 배가 무척 고팠다.  밥 때를 훌쩍 넘겼던 것이다.

 

그 때부터가 문제였다.  그 당시만 해도 만리장성에 오는 외국인 관광객은 대부분 단체손님이었다.  식당이 대여섯 집뿐인 듯 해서  "만인(萬人)"이 이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물론 거긴 이유가 있었다.  중국인 관광객은 모두 도시락을 지참했으니 식당이 많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고, 그 대여섯 집의 식당은 모두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듯 해 보이는 곳을 골라 들어갔다.  이미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 그랬는지 한산했다.  잘 모르는 곳에서 식당을 고를 때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을 찾으라고 했는데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땀 흘리며 오랜 시간을 걸었고 밥 때가 훨씬 지나 시장했기 때문에 이것 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 큰 식당의 한 구석을 찾아 앉았다.  "푸우유안(服務員)"이라고 부르는 웨이트레스가 오더니 대뜸 어떤 단체냐고 물었다.  혼자 왔다고 대답하니까 개인 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  맥주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하고 다음 식당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예약을 했느냐고 물었다.  표현은 달랐지만 결국은 단체손님을 위한 식당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서너 곳을 들렸고, 가는 곳 마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배는 더 고팠고, 목은 더 말랐다.

 

마지막으로 들려 본 식당도 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내가 반문했다.  제일 작은 단체가 도대체 몇 명이지요?  조금 생각하더니 네 명이라고 했다.  밥 때가 지나 손님도 없으니 나를 네 명 단체손님으로 받을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네 명치 밥값을 치르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우선 맥주 한 병을 시켜 마시면서 기다리다 보니 혹시 정말 4인분 음식을 내놓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처음 중국에 와서 두 주일 남짓한 시간을 지내면서 중국사람들이 우직하고 변통을 모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얼른  4인 단체의 밥값을 지불하겠지만 음식은 일인분이면 된다고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네 명이 배불리 먹을 음식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길로 밖으로 나가 택시기사를 찾았다.  많은 음식을 혼자 먹을 방법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 한 구석 처마 밑에서 그 기사를 찾았을 때, 그는 내가 산성 위를 걷는 동안 벌써 점심을 먹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4인분 식사는 정말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중국은 수도인 북경마저도 시골같다는 느낌이었고, 만리장성은 세계적인 관광지였는데도 불구하고 더욱 시골이었다.  어떤 음식이 나왔었는지는 이미 기억이 없다.  사실 허기를 채우는 끼니의 의미였기 때문에 먹는 즐거움은 기대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기억에 남을 특별한 중국음식도 없었다.  상을 가득 채웠던 그 많은 음식 중에 한두 가지를 기억한다.  튀긴 개구리 뒷다리가 있었다.  개구리를 "밭에서 나는 닭"이라는 뜻에서 "티엔지(田鷄)"라고 부르니 그 음식은 "티엔지퉤이(田鷄腿)"였다.  어렴풋했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새롭게 하는 음식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믿을 수 없게도, 두툼하게 썰어 위에 설탕을 솔솔 뿌려놓은 시푸르둥둥한 토마토였다.  참 멀리까지 가서 돌이키게 된 어린시절이었다.  만리장성까지 가서 설탕뿌린 토마토를 앞에 놓고 보니 고향은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인 개념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부를 수 있으면 그게 바로 고향아닌가.  하긴 그렇게 땀을 흘리며 걷고나서 그렇게 힘들게 얻은 음식이었는데 그게 무엇이었던들 어찌 감명이 없었으랴.  뭐 중국음식이랄 것도 없는 소박한 먹거리였지만, 거기 이르는 동안 겪은 곡절 때문이었는지, 뜻밖에 이역(異域)에서 고향을 느낀 때문이었는지 그저 고마울뿐이었다.  요즈음 중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중국이 불과 20년 전에 그랬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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