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꿇고〉 경배한다는 말"
아기예수가 태어난 환경을 재현한 마굿간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 계절이다. 말구유에 누운 아기예수와 어머니 마리아, 아버지 요셉이 있고, 말과 당나귀, 양 같은 동물 몇 마리, 목동이 두엇 있는 게 보통이다. 주의 공현축일이 되면 동방박사 세 분이 또 마굿간에 도착한다.
목동과 동방박사들은 대부분 무릎을 꿇고 있거나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세상에 오신 아기예수를 경배하는 그런 모습은 성탄절에 흔히 보이는 모티프의 하나다. 눈에 뜨일 뿐 아니라 또 자주 들린다. 귀에 익은 크리스마스 캐롤의 하나인 "오오, 성스러운 이 밤(O Holy Night)"의 후렴은 이렇게 노래한다.
무릎을 꿇지어다. 천사의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오오 거룩한 이 밤,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날!
Fall on your knees. Oh, hear the angel voices.
O night divine, the night when Christ was born!
마태오 복음은 동방박사들이 엎드려(prostrate) 절했다고 전하는데, 그렇게 절한 뒤 무릎을 꿇고 아기예수를 바라보며 경배했다고 상상할 수 있겠다.
엎드려 절하는 것이나 무릎을 꿇는 것, 허리를 깊이 숙이는 것은 모두 상대의 힘이나 권위를 승복하는 태도이고 심지어 두려움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올해 성탄에 말구유 앞에 무릎을 꿇고 아기예수를 볼 때 내게 든 생각은 상당히 달랐다. 마굿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누웠다니 보잘 것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딱하디 딱한 사정으로 세상에 오신 것 아닌가. 그런 아기예수가 "나를 두려워하라"고 선포하실 것 같지 않았다. 아기예수께 이 세상이 겪고 있는 아픔을 쓰다듬어 주실 것을 부탁하다보니 이제껏 "무릎을 꿇는다"는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경우는 몰라도, 말구유의 아기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는 두려움에 몸둘 바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내 몸을 그렇게 낮추지 않으면 몸을 낮추어 오신 아기예수의 말씀, 오시는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깨우침을 몸동작으로 실천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의미로 오시는 것은 분명하고 그래서 기꺼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눈높이를 낮은 곳에 맞추고 내가 하러온 일이 무엇인가 알아내어라, 그리고 그 일에 참여하라는 가르침 또한 무릎을 꿇는 동작을 통해 듣고 새긴다.
(2014년 성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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