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014.5.26) 혜화동성당에서 아버지 10주기 추모미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가족인사를 했습니다.
"유현석 변호사 10주기 추모미사 가족인사"
안녕하세요. 유현석 변호사의 둘째아들입니다. 오늘 드릴 말씀을 이렇게 써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재판이 군사법정에서 열리게 된 게 참 다행이라는 그 유명한 모두발언, 법관의 자격조건으로 지식, 양심, 특히 용기가 중요한데, 용기하면 군인 아니냐, 용기를 생명으로 하는 군인이 재판장이시니, 용기를 내어 잘 심판해주실 게 아니냐, 그래서 이 재판을 군사법정에서 하는 게 참 다행이라고 하셨다는, 이미 전설이 된 그 법정발언도 원고없이 조그만 메모지 한 장에 의지해서 하셨다는데, 저는 짤막한 이 가족인사를 원고에 의지해서 할 수 밖에 없네요. 제가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서, 여기 저기 연설할 일이 너무 많아서, 써서 준비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다고 핑게를 대려해도, 그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걸 잘 압니다. 우리말로 무슨 원고를 쓰면 늘 글솜씨가 좋은 우리집 다섯째 동생이 미리 읽고 고쳐주었는데, 오늘은 경황중에 동생의 수정조차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가 두신 자식 여섯 중에 제일 못난 사람입니다. 우리 충청도말로 제일 "속을 쎄긴" 불효한 아들입니다. 공부한답시고 떠난 길, 9년이 지났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아버지 자식이 여섯, 그 중 하나는 신부가 되셨으니 사제서품 한 번, 혼배 다섯 번이 있었는데, 제 혼배 하나를 빼고는 한 번도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제 혼배에 올 수 있었던 게 다행일 정도입니다. 할아버지 장례 때 귀국하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러워 그 해 겨울 잠시 귀국했었습니다. 저를 보고 할머니는 "너 만주가서 오래 있는다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 달도 지나지 않아 할머니도 가셨습니다. 할머니 장례에도 오지 못 했습니다. 공자님이 부모님 살아계신 동안에는 멀리 여행하지 말라고 했는데 중국고전문학을 전공한다면서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해 계속 태평양 저쪽에 살았으니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은 그렇게 살면서 늘 가족들, 친지들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영어로 "생각한다"는 뜻의 동사와 "감사한다"는 뜻의 동사가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Think 하고 thank는 발음만 비슷한 게 아니라 본래 뜻이 하나였다는 뜻이겠습니다. Anglo-Saxon계의 영어만 그런 게 아니라 독일어에서도 "생각한다"는 denken과 "감사한다"는 danken의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감사한다는 마음과 생각한다는 행위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뜻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가족들을 생각하는 제 마음에도 한 구석에는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던 듯합니다. 어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난 10년 동안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얼굴은 물론 아버지 얼굴 뿐이 아닙니다. 제가 멀리서 "속만 쎄기는" 수 많은 세월 동안 친구노릇, 후배노릇, 심지어 아들노릇을 대신 해주신 많은 분들이 함께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무 많아 일일이 거명할 수는 없겠으나 돌아가신 돈명이아저씨가 떠오르기도 하고, 함신부님, 문신부님, 오늘 이 자리에는 오지 못했지만 인권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명동 허름한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늘 함께 하면서 아버지 말씀을 들어주신 덕진씨, 참 많은 분들을 떠올리며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가신지 벌써 10년인데 잊지 않고 이렇게 모여주신 많은 분들, 늘 생각하며 감사드리겠습니다.
아버지를 기념해 만드신 공익소송기금을 뜻있게 운영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열심히, 고생을 마다않고 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변호사님들은 거마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례를 받고 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조금 좋은 환경에서 좋은 일을 더 많이 하실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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