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참회할 날은
정부가 한편으로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철거민이나 노동자의 항의를 억누르면서, 한편으로는 서슴지 않고 위법과 범법을 행하는 일이 흔히 보인다. 심지어는 법집행의 최전선을 담당해야 하는 경찰이나 검찰조차 스스로 법을 어긴다는 비판이 아우성을 이룬다. 법을 어기는 사람을 벌하기 위해서 정부가 법을 어기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현실을 들여다보면 법을 어기는 정부도 문제지만, 사회 전체가 앓고 있는 민주의식이나 정의감의 부재 역시 참 어려운 문제이다. 내 가게를 빼앗긴 게 아니고 내 남편이 불에 타 죽은 게 아닌데 내가 나설 필요가 있겠나, 나섰다가 나만 바보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정도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수수방관에서부터, 그래그래, 저 불평불만 분자들이 없어지면 평화로운 사회가 될 거야 하는 바보스런 착각까지, 시민들은 이리 떠밀리고 저리 끌리면서 상식적인 판단을 잃고 있다. 그걸 십분 이용하는 정부는 법을 어기면서도 떳떳하기까지 하다.
이 맥락에서 새삼스럽게 들릴지 몰라도 송두율 교수를 기억하느냐고 묻고 싶다. 불과 육칠 년 전의 일이니 물론 아주 잊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의 귀국이 남긴 교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곱씹어볼 일이다. 참으로 힘들게 찾아온 고국에서 검찰에 붙들려가 치도곤을 치르고 총총 이역만리 타향으로 되돌아 간 그의 경험은 우리 민주주의의 성장을 위해 참 좋은 화두였다. 국민의 잘못이 국가의 잘못에서 시작된 게 아닌지 반성하라는 교훈이었지만 그 교훈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따라서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국가가 국민을 혼낼 궁리를 할 뿐, 스스로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참회할 기색이 없는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허송한 그 기회가 참 안타깝다고 느낀다.
송두율 교수가 노동당에 가입했네, 간첩질을 했네, 하는 말들이 무성해지면서, 다들 그가 살 길은 참회와 반성뿐이라고 했다. 아무리 너그러운 관용으로 포장하는 흉내를 내도 그 말은 결국 참회와 반성을 못 하겠으면 죽어야한다는 뜻이었다. 서슴없이 그렇게 무서운 잣대를 들이대는 모습에 나더러 죽으라는 게 아닌데도 나도 모르게 몸서리 쳤다. 그래도 그건 조금 나았다. 이미 시기를 놓쳤으니 참회나 반성과 상관없이 이제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쫓아내버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본인뿐 아니라 송 교수가 귀국하는 걸 주선한 사람들이나, 그에게 동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까지를 싸잡아 욕하기도 했다.
송 교수를 마음으로 성원했던 사람들도 그가 "말을 바꿨고 솔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망과 배신감을 느낀다고 토로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노동당에 입당했던 사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나 자신 역시 의심이 없지 않았다. 송 교수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면, 그가 노동당에 입당했었다는 사실보다 우리의 지성과 판단을 무시했다는 생각에서 실망을 느끼는 게 당연했겠다. 그러나 나는 사실관계를 확인할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런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지도 못했다. 송 교수가 무어라고 했고, 그걸 누가 어찌 해석해서 언론에 어떻게 보도되었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길이 내게는 없었다. 실력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국정원과 검찰에서 실정법을 어긴 범법행위가 있었는지 잘 밝히고, 범법행위가 있었으면 절차에 따라 현명한 조치를 내려주겠지 하고 기대할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송 교수의 행적에 관한 사실관계의 확인부터 정부가 결정할 사법처리의 수위까지가 모두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송 교수의 일에 대한 논의에 정말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범법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참회하라고 요구하기에 앞서서 꼭 있었어야할 국가와 정부의 반성이 보이지 않았다. 법은 국민만 어기는 게 아니다. 정부도 법을 어기고 국가도 법을 어긴다. 그렇다면 누가 법을 어기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컨대 고만고만한 초등학생 둘이 주먹다짐을 해서 한 아이가 코피가 터진 일과, 대학생이 초등학생을 깔고 앉아 두드려 패서 코피를 터뜨린 일과는 잘못이나 인권침해의 정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권의 보호는 힘의 불균형상태에서 생길 수 있는 인권의 침해를 막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국민의 인권보호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토대이다. 국민 개개인의 힘은 국가의 권력에 비하면 미미하기 그지없다. 그 때문에 국민 개개인의 범법행위는 국가와 정부가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저지를 수 있는 범법행위에 비하면 미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국가의 범법행위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반드시 기억해야한다. 그리고 그 일에는 정부와 국가가 앞장서야한다. 공권력을 앞세워 국가가 행한 범법행위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았고 그 범법행위로 자행된 폭력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참혹했다. 예를 들어, "긴급조치 제9호"나 "인혁당 사건" 등 국가에 의한 범법행위는 얼마나 무섭고 잔인했는가. 또 있지도 않은 간첩사실을 국가가 고문으로 조작해 내고, 간첩으로 몰린 사람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척들까지 파멸하게 한 일이 얼마나 많았나. 우리의 현대사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불법적인 폭력을 소상히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게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다. 국격을 높인다는 말이 유행한다는데 그런 반성과 기억 없이 국격이 높아질 수 있겠나. 국민소득이 이만 불이 되는지 삼만 불이 되는지는 그 다음에 걱정할 일이다. 국가의 불법적 폭력에 대한 반성이 없이, 다시 말하면 그런 폭력의 가능성을 그대로 놓아둔 채로는 선진국으로 갈 수도 없고, 간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송 교수의 "범법행위"를 논하고 그의 반성과 참회를 기대하기에 앞서서 국가가 송 교수를 위시한 그 시대의 많은 국민들에게 불법행위를 한 일은 없었는지, 혹시 그런 국가와 정부의 불법행위가 "송 교수 일"의 근본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먼저 물어보았다면 송 교수의 귀국을 통해서 우리는 선진국으로 한 걸음 다다갈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의 불법행위가 송 교수의 불법행위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혐의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송 교수에게만 참회하고 반성하라고 다그친 건 야만이었고, 또 한 번의 폭력이었다. 송 교수의 행적에 대한 시비를 가리는 데 집착하다가 국가와 정부에 참회하고 반성할 과거가 있다는 사실이 얼렁뚱땅 묻혀버리지 않았나? 국가와 정부가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참회할 것은 참회하고, 용서를 구할 것은 용서를 구하고, 책임질 일은 책임을 지는, 그런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귀국이 가져다준 반성과 참회의 기회는 뜻있게 쓰이지 못했다. 국가에 의한 인권의 침해와 이어지는 국가의 뻔뻔스러움이 반복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용산에서 있었던 참혹한 사건은 국가의 참회가 멀고먼 꿈이라는 걸 증명한다. 돈 있고 힘 있는 개발업자와 국가가 손발을 맞추어 대책 없이 사람들을 내몰았고, 그에 항의하는 사람이 여럿 희생되었는데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하는 데 거의 한 해가 걸렸으니 그게 바로 뻔뻔스러움의 반복 아닌가. 대학생에게 깔려 두드려 맞고 코피가 터진 초등학생이 부아를 참지 못하고 그 대학생에게 돌맹이를 던졌다. 누가 잘못한 것인가? 아니 돌맹이를 던진 초등학생이 잘못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대학생이 돌맹이에 맞아 머리통에 멍이 들었다고 해도, 아니야, 내가 먼저 깔고 앉아 때린 게 잘못이었어, 그 꼬맹이 탓을 할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해야 옳은 것 아닌가. 참회답게 참회하고, 그 기초 위에 국가에 의한 범법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각오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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