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이태백의 머릿속"

반빈(半賓) 2021. 9. 5. 11:36

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6)

 

"이태백의 머릿속"

 

시를 읽는 일, 시하고 노는 일에 시인을 결부시키는 경우 그의 마음 속 뿐 아니라 머릿속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있다고 앞서 쓴 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이태백의 시 한 수를 가지고 놀면서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발견하는 놀 거리는 어떤 것은 시인들이 거의 모두 공유하는 특성일 것이고, 어떤 것은 이태백 개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특성일 것입니다.

 

우선 시를 찬찬히 들여다 보시기를 권합니다.  한문에 익숙하시지 않아도, 제 번역과 대조하면서 천천히 읽으시면 이 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흥미있는 일들을 찾으시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李白,“訪戴天山道士不遇”

 

犬吠水聲中,桃花帶露濃。

樹深時見鹿,溪午不聞鍾。
野竹分青靄,飛泉掛碧峯。

無人知所去,愁倚兩三松。

 

이백, “따이티엔산의 도사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

 

개 짖는 소리가 물소리에 섞이고

복숭아꽃은 짙은 이슬을 머금었습니다.

 

숲 깊은 곳에 때로 사슴이 보이고,

계곡에선 정오인데도 종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들 대나무 파란 안개를 가르고,

나르는 샘 푸른 봉우리에 걸렸습니다.

 

아무도 은자님 가신 곳을 모르니

수심에 두세 그루 소나무에 기댑니다.

 

여기 제시한 번역은 대부분 번역자들의 의견을 담았습니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학에서 오랫동안 중국시를 강의한 스티븐 오웬 Stephen Owen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Visiting the Recluse on Mount Daitian and Not Finding Him In"

 

A dog barks amid the sound of waters,

Peach blossoms dark and heavy with dew.

Where trees are thickest I sometimes see a deer,

Noon in the ravine, but I hear no bell.

Bamboo of wilderness split through blue haze,

A cascade in flight, hung from an emerald peak.

No one knows where you've gone--

But I linger, disappointed, among these few pines.

 

나중에 논의하겠지만, 일곱번째 행의 번역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나는 심지어 이런 번역은 깊이 없는 읽기를 바탕으로, 이 시하고 충분히 놀기 전에 시도한 번역이라고 비판합니다.  일곱번째 행은 "사람은 없지만 가신 곳은 압니다 You're not here, but I know where you went"라고 읽는 것이 훨씬 흥미롭습니다.  두 가지로 다 읽어보시고 어떻게 다른지 꼼꼼히 비교도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시는 이태백이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사는 은자(隱者)인 친구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종이 한 장에 써서 그 친구가 사는 오두막에 남기고 왔을 수도 있고, 돌아온 후의 허전한 마음을 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 은자친구에게 남긴 시를 속세에 사는 친구들에게도 돌려 보게 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 당시의 소위 "은자"가 꼭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무슨 동기에서 "숨어(隱)" 살든, 자연과 어울려 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깊은 산 속에 사는 친구라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일부러 찾아갔는데 만나지 못했으니 더욱 섭섭했겠지요.  이런 생각은 시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즉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대한 관심을 반영합니다. 

 

이태백의 머릿속은 어땠을까요?  이 시와 비슷한 소재의 작품은 중국문학사에서 자주 보입니다. “은자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다(尋隱者不遇)”든지 "아무개에게 들렀으나 만나지 못했다(訪〇〇〇不遇)"든지 하는 제목의 작품이 상당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상당히 잘 알려진 작품의 예를 하나 보시지요.

 

賈島(779-843),“尋隱者不遇”       

 

松下問童子,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雲深不知處。

소나무 아래서 아이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길, "선생님은 약초를 캐러 가셨습니다.

이 산 속에 계신 걸 알 뿐,

구름이 깊어 어디 계신지는 모릅니다."

 

은자로 사는 것이, 그렇게 살면서 글을 써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던 만큼, 가끔 은자인 친구를 찾아가 한 잔 하는 일도 많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니,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일도 흔했고, 그럴 경우 시 한 수 멋드러지게 써서 돌려 읽는 것도 시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했을 겁니다.  자신의 시재가 출중하다고 믿는 시인들의 머릿속에 시공을 넘어선 일종의 경쟁심리가 들어설 여지가 생겼던 것입니다.  이제껏 그런 사정을 담은 시를 쓴 사람들에게, 뭐 다들 잘 썼지만 이번에 내가 쓰는 이 작품은 좀 다를 겁니다 하고 말하고 싶은 생각,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은자인 친구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 시를 쓰겠지만, 내 이 작품을 능가할 수 있는지 한 번 봅시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었을 겁니다.  그걸 거창하게 말하면 창작의 과정에서 시인은 마음속의 느낌을 잘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없고, 문학사의 긴 맥락 속에서 자신의 창작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 겁니다.  은자인 친구를 보러 갔으나 만나지 못한 안타까운 심정이 이태백의 마음속에 있었다면, 비슷한 경험을 하고 그걸 시에 담은 많은 시인들의 작품과 비교할 때 내가 지을 시가 특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시인의 머릿속에 있었을 겁니다.  그 경쟁심리가 어떻게 발휘되는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시인의 머릿속에 또 다른 관심은 없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태백이 살던 당시, 중국 시에는 여러가지 형식이 있었습니다. 보통 여덟 행으로 이루어지는 율시(律詩)도 있었고, 네 행짜리 짧은 시 절구(絕句)도 있었습니다.  율시가 형성되기 전에 사용되었던 고체(古體)시도 있었는데, 고체시에는 또 노래로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 느낌을 주는 가행(歌行)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형식을 모두 거론하며 논의 할 필요는 없겠지만, 최소한 각각의 형식이 요구하는 조건이나 담기 좋은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시를 잘 쓸 수 있다는 사실 정도를 짚어 둡니다. 이태백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다시 말해서 따이티엔산에 은거하는 친구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한 느낌을 담기 위해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선택했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당시 마음을 담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은 오언율시가 요구하는 형식상의 조건을 읽는 사람도 잘 알 것이라는 전제 위에 성립합니다.  이 언저리에서 시인의 창작활동은 마음속과 머릿속을 오가기 시작합니다.  어디에 운(韻)을 맞추고, 어떻게 평성(平聲)과 측성(仄聲)을 조합하여 음악적 아름다움을 구하느냐는 누구나 생각하는 기본요건입니다.  그러나 그걸 여기서 논의하면 그리 흥미로울 것 같지 않습니다. 시의 성운(聲韻)적인 측면이 우리말 발음이나 번역에서 살아날 수도 없고, 전공자들이나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은 3-4행과 5-6행이 각각 댓구(對句,對偶 또는 對仗)를 이루어야 한다는 율시의 요건입니다.  예를 하나 들지요.  중국에서 부모나 조부모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댓구를 만드는 훈련을 했습니다.  거의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알게 모르게 댓구를 근간으로 사고하는 방법, 그에 필요한 성운학과 문법의 지식을 습득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가 "산은 높다(山高)" 할 때, 아이가 "물은 아름답다(水麗)"하고 대답하면 좋은 답입니다.  번역이나 우리말 한자발음으로는 평성과 측성을 구분하기 어렵지만, "산"과 "고"는 평성, "수"와 "려"는 측성입니다.  측성 두 음절로, 평성 두 음절의 짝을 만들어 내 맞춘 것입니다.  만일 아이의 대답이 "강은 아름답다(河麗)"라고 했다면 가능한 답이기는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하"가 평성이기 때문입니다. 글자의 발음에 있어서는 반대쪽에서 짝을 찾지만, 어법이나 의미에서는 같은 쪽에서 짝을 찾아야 합니다.  "산"과 "물"이 모두 지리의 용어이고, "높다"와 "아름답다"는 술어를 이루는 형용사입니다.  이런 댓구법은 꼭 한시에서만 사용되는 수사법은 아닙니다.  영어에서도 여러가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달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은 달에 첫발을 디딘 감격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 말이 두번째 구절을 강조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암스토롱이 그냥 "이건 인류에게 정말 큰 도약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수사적 효과가 반감했을 것 같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연설도 댓구를 사용한 수사법의 예로 꼽힙니다.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여기서도 역시 짝지어진 두 구절의 두번째 구절을 강조하는 데 첫째 구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한시로 돌려 수준을 높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조선시대의 훌륭한 시인 죽서 박씨는 다음과 같은 칠언의 댓구를 만들어 냈습니다.

 

謾愁風送殘花處,

偏喜雨添芳草時。

바람이 남은 꽃을 보낼까 봐 부질없이 근심하는 곳

비가 풀 향기를 짙게 한다고 유달리 좋아하는 때

 

우리말로 번역하다 보니 어순이 바뀌었지만, "부질없이"라는 부사와 "유달리"라는 부사가 짝을 이루었고, "근심한다"라는 동사와 "좋아한다"라는 동사가 짝을 이루었습니다. 이어서 "바람"과 "비", 동사 "보낸다"와 동사 "짙게 한다", "남은 꽃"과 "풀 향기"가 각각 짝을 이루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곳"과 "때", 즉 장소와 시간이 짝을 이루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댓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댓구를 잘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그렇게 만든 댓구가 어떤 효과를 가져오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댓구의 효과는 앞에 예로 든 암스트롱이나 케네디 대통령의 댓구법처럼 두번째 구절을 강조하는 단순한 효과를 훨씬 넘어섭니다.  독자는 댓구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첫째 구절이 둘째 구절과 짝 지어지는 순간, 다시 말해서 둘째 구절을 읽을 때 알게 됩니다.  영철이라는 친구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다가 길에서 영철이를 만나 반갑게 "영철아"라고 인사했을 때, 영철이라고 생각한 그 사람은 "아, 나는 영철이의 쌍둥이 형제인 영수입니다"라고 반응할 것입니다.  영수를 만나 영철이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걸 아는 순간, 영철이가 떠 오르고, 또 다시 영수의 모습이나 행동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영철이가 정말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쌍둥이 형제들 사이에 다른 점이 조금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수를 만나는 순간 영수에서 영철로, 영철이에서 영수로 몇 번 생각이 오갈 것입니다. 위에 예시한 죽서 박씨의 댓구를 보시지요.  "비가 풀 향기를 짙게 한다고 유달리 좋아하는 시간적 맥락"을 만나고 그것이 "바람이 남은 꽃을 보낼까 봐 부질없이 근심하는 공간적 상황"을 상기시키면 읽는 사람의 놀이는 이 시간적 맥락과 공간적 상황을 오가게 됩니다. 그 왕복의 놀이에서 시의 맛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율시에서 댓구가 가져올 수 있는 효과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남은 꽃 이파리 몇 개가 바람에 흩어질 것 아니냐는 걱정과, 비가 오니 꽃 향기가 더욱 짙어졌네 하는 느낌, 그게 참 부질없다는 시인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 댓구가 참 효과적이라는 시인의 판단이 읽는 사람의 놀이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댓구에 담은 느낌이 이 작품이 전달하고 싶은 깊은 느낌을 전달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 느낌이 마음속에 있다면, 그 판단은 머릿속에 있으니 시하고 놀기 위해서 마음속과 머릿속에 모두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시인은 머릿속에서 이 시에서 중요한 장면이나 생각은 댓구를 사용하는 3-4행과 5-6행에 담는 것이 좋겠다고 궁리합니다.

 

이제 이태백의 시로 돌아 오겠습니다.  첫 두 구절 중 "개 짖는 소리"와 "복숭아 꽃잎"라는 말이 관심을 끕니다. 특히 그 두가지가 같이 있어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중국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면 이 두가지를 보면서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담긴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 위로 흘러 내려오는 복숭아 꽃잎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험난한 세상을 피해 평화롭게 사는 별천지를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말에서도 잘 쓰이는 "무릉도원"이니 "도원경"이니 하는 말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 별천지에 도착한 외부인의 오감에 처음 들어오는 게 바로 개 짖는 소리입니다.  개기 짖는다는 것은 개가 느끼기에 자신의 영역이 침범되었거나, 침범이 임박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개 짖는 소리는 또 듣는 사람이 자신의 영역이 침범되었다고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이태백의 시 첫 두 행은 시인이 은자인 친구를 방문하는 것이 두 가지 다른 영역의 경계를 지나간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이태백은 이 개 짖는 소리와 이슬 머금은 복숭아 꽃잎에서 자신이 은자 친구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게 모르게 느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 때부터는 은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저 열심히 두리번대는 것 외에 별 뾰족한 방법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찾다 보니 보통사람들에게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뜨입니다.  3-4행은 두리번두리번 찾은 결과이겠습니다.  깊은 숲 속의 사슴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잘 뜨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슴을 보았다는 것이 열심히 찾았다는 뜻이고, 은자 친구가 나중에 거처로 돌아와 이 시의 이 행을 보며, 이 친구 참 열심히 나를 찾았군, 뭐 그렇게 반응했을 것 같습니다.  넷째 행은 상당히 특별합니다.  무얼 경험하고 그 경과나 결과에 대해서 쓸 때, 무엇이 있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는 쉽게 쓸 수 있지만, 무엇이 없었는지를 느끼고 쓰는 건 쉽지 않습니다.  무얼 볼 것으로 계획하고 기대했는데 없었다면 모르나, 그 산속에서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이상합니다.  왜 종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가 궁금합니다.  나는 같은 행에 있는 "정오"라는 말 때문에 사찰에서 점심공양을 알리는 종소리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런데 그 때가 정오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요?  손목시계는 아직 인류의 상상 속에도 들어와 있지 않았을 그 시절 정오인 걸 아는 방법은 대개 배가 출출했다는지, 아니면 해가 중천에 떴든지 였을 겁니다.  그나마 선배들 따라 여기저기 깊은 산을 등산한 경험으로 생각하면, 깊은 숲 속에서 햇빛이 보이는 건 오로지 해가 머리 위에 떴을 때 뿐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3-4 행은 깊은 산 속, 즉 은자의 도메인에 들어와 열심히 찾으며 걷는 모습을 그립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3행과 4행은 댓구로 짝을 이루어야 합니다.  "깊은 숲(樹深)"과 "정오의 계곡(溪午)", 부정부사(不)와 "때로(時)" 라는 부사, "보이다(見)"와 "들리다(聞)"라는 동사, 동사의 목적어로 쓰인 "사슴(鹿)"과 "종소리(鐘)"라는 명사가 각각 짝을 이루었습니다. 이 말은 댓구의 효과로 독자의 놀이가 이 두 행을 반복해 왕복하면서 시인이 은자를 찾아 열심히 두리번대는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5-6행은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포착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각각 높이 자란 대나무와 산봉우리 위에서 쏟아지는 폭포가 수직을 이루는 장면으로 파란 안개와 폭포의 물보라가 그 수직선의 일부를 지우고 있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날 은자 친구를 찾는 과정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장면 둘을 골라 그 다섯째, 여섯째 행에 담은 것 아닌가 합니다.  물론 그 두 행은 엄격하게 댓구를 이루고 있고, 그래서 독자는 두 행을 왕복하며 그 아름다운 장면을 음미할 것입니다.  그런 경치와 은자와의 관계는 분명합니다.  그 은자 친구가 진정하게 자연과 동화해 살고 있다면, 그 경치가 바로 은자이기 때문에 그 경치 속에서 은자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놀면서 시인이 이 시로 은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아마 이런 정도 아닐까 짐작합니다.  "은자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사시는 곳을 자세히 보았으니 만난 것과 진배 없습니다."  심지어, "나는 오늘 은자를 찾지 못함으로 해서 진정하게 은자를 만났습니다."  이런 읽기는 3-4행과 5-6행의 댓구의 효과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이태백의 마음속도 좋지만, 머릿속이 매우 흥미롭다고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율시의 백미인 3-4행과 5-6행을 이렇게 읽고 나서 일곱째 행을 "아무도 은자님 가신 곳을 모르니"라고 읽을 수는 없습니다.  우선 누군가 은자가 어디 있는지 물어볼 사람이 거기 어디 있었다고 생각하기 싫습니다.  게다가, 시인이 꼭 그날 은자가 있는 곳을 알지 못했다는 읽기는 그리 마음에 흡족하지 않습니다.  7행의 원문을 보시지요.

 

無人知所去

 

평범하게 읽으면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참을 놀고 보니 최소한 시인은 은자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해야 더 가깝습니다. 사실 깊은 산으로 오르는 긴 시간 동안 줄곧 본 것이 은자가 간 곳인데, 그렇게 산을 오르고도 간 곳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나는 이 행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人,    (而)            (余)知        (子)(之)            所去,

없다    사람,   (그러나)        ()     안다   (당신) (조사)          간 곳

은자님은 안 계시지만, 나는 은자님 가신 곳을 압니다"

 

여기서 "사람()"은 "당신"으로 보고, 뒷부분에 나오는 동사 "안다()"의 주어는 생략된 "나"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건 내 읽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를 쓰는 건 아닙니다.  중국고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있는 생략의 복원입니다.  이런 읽기를 바탕으로 이 시를 다음과 같이 다시 번역했으니 한번 즐기고 노시기 바랍니다.

 

李白,“訪戴天山道士不遇”

 

犬吠水聲中,桃花帶露濃。

樹深時見鹿,溪午不聞鍾。
野竹分青靄,飛泉掛碧峯。

無人知所去,愁倚兩三松。

 

이백, “따이티엔산의 도사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

 

개 짖는 소리가 물소리에 섞이고

복숭아꽃은 짙은 이슬을 머금었습니다.

 

숲 깊은 곳에 때로 사슴이 보이고,

계곡에선 정오인데도 종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들 대나무 파란 안개를 가르고,

나르는 샘 푸른 봉우리에 걸렸습니다.

 

은자님은 안 계시지만 가신 곳은 압니다

그래도 아쉬워 두세 그루 소나무에 기댑니다.

 

"나는 은자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만나지 못함으로써 진정하게 만났습니다."  이 정도라면 "은자를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尋隱者不遇)"라는 장르에서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고 하겠습니다.  이태백의 머릿속, 그 마음속만큼 대단합니다.

 

사족을 하나 달지요.  이 작품이 이태백이 스무 살도 채 되기 전에 지었다는 것이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의견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2021. 9.3)

'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애물에 담긴 기회 (1)"  (0) 2021.09.26
"언어는 믿음직한가요?"  (0) 2021.09.13
"시인의 머릿속"  (0) 2021.08.28
"놀기와 살리기"  (0) 2021.08.22
"시어와 보통 말"  (0) 2021.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