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3)
"시어와 보통 말"
지난 번 글에서 시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기 어렵고, 또 원만한 정의를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시라고 불리는 글은 형태나 성격이 다양해서 그렇게 넓은 범위의 글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정의를 찾는 게 그리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시와 놀기를 원한다면, 대답을 찾을 수 있는지를 불문하고 계속 시가 무엇인지 묻고 확인하는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시어, 즉 시의 언어가 무엇인지, 보통의 언어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고 할 때, 우리가 보는 그것이 아침에나, 저녁에나 다를 게 없고, 작년에도 지금도 같다고 하면 우리가 보는 그것은 아마 죽었거나 처음부터 아예 무생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시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될까요. 시집의 어느 한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는 한 수의 시는 누가 그 일부를 찢거나, 밑줄을 치거나 해서 고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침에나, 저녁에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 볼 때도 두번째 세번째 볼 때도 같은 페이지에 같은 말이 씌어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언제 보아도 똑 같다면 그 시는 이미 죽어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시가 아닌 것 같다고 의심할 수도 있을까요.
이 상황을 조금 더 비틀면 참 재미있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종이 위에 인쇄된 말이니 까만 것은 글씨이고 흰 것은 종이입니다. 그리고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어제 보나 오늘 보나 달라질 수 없는데, 달라지지 않음이 죽었거나 생명이 없다는 증거라고 하면 그 시도 죽었거나 시가 아니라고 보아야 할까요? 그 시가 죽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시가 살아있는 건 누구 덕이겠습니까? 시는 시인이 써서 발표하는 순간 시인의 손을 떠나는 것이니 종이 위에 인쇄되어 변하지 않는 시를 살리는 것이 시인은 아닙니다. 종이 위에 인쇄된 그 말들을 살려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걸 읽는 독자들 뿐이겠습니다. 이런 생각은 다음의 두어 가지로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어쩌면 시는 시집의 종이 위에 인쇄된 말들이 아니라, 독자가 읽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가 시일 수 있는 것은 독자가 읽기 때문이겠습니다. 둘째, 어쩌면 시집의 그 한 페이지에 인쇄된 말들이 아침에 보나 저녁에 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바로 문제일 것 같습니다. 두 번의 읽기가 같을 수 없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같은 소주도 아침에 마실 때와 저녁에 마실 때가 같을 수 없고, 이미 두어 병 마신 후 마실 때와 몇 시간 산 속을 걷고 내려와 삼겹살 구어 먹으며 마실 때가 같을 수 없습니다. 시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힘이 독자에게 있다는 생각은, 반대 방향에서 말하면, 시를 살리지 못할 때, 독자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독자라는 생각이 그럴 듯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독자의 읽기는 무얼 하는 것일까 규명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시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에 시인의 역할은 없는 것인지를 조금 자세히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주요한 성원이었던 빅터 슈클로프스키 (Victor Shklovsky)의 생각은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볼만 합니다. 그는 "예술은 어떤 물체가 예술적임을 경험하는 방법이고, 그래서 그 물체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물체는 예술작품을 포함하고 그래서 시집의 한 페이지에 인쇄된 시도 포함된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술(시)은 어떤 작품이 예술(시)적임을 경험하는 방법이고, 그래서 그 작품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술의 방법은 작품이 편안하고, 친근하고, 이미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어렵게, 생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슈클로프스키는 심지어 예술은 그 형식을 어렵게 만들고, 관찰하여 인지하는 과정을 길고 어려운 과정으로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습관적으로, 늘 하던 대로 생각하고 관찰 (habituation)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 생각은 한편으로는 예술의 본령을 짚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술이 보통사람들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한 수의 시는 독자가 그것을 읽어 생명을 불어넣을 때까지 죽은 텍스트라는 주장입니다. 독자에게 시의 생사여탈의 권한을 준다는 것은 어쩌면 독자에게 공부하고 끈기있게 읽으라는 책임을 부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이 독자에게 결국 새롭고 재미있는 생각을 경험하게 된다는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혹시 어떤 시를 읽을 때, 그 시를 어떻게 읽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있으면 바로 구글검색을 한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는 간접경험일 뿐이겠습니다. 조금 각박하게 말하자면, 시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힘을 포기하는 일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습관적 읽기를 하지 못하게 하는, 그렇게 해서 자기가 쓴 시에 누군가가 생명을 불어넣게 하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가장 비근한 예가 비유의 사용입니다. 애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예쁜 여자를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장미꽃이라고 하고, 애틋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몰라주는 남자를 그렇게 말하지 않고 목석이라고 하는 게 비유입니다. 직접, 바로 알 수 있는 평범한 표현으로 말하지 않고 비유를 쓰는 것은 그 비유의 원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받을 수 있는 느낌이 강렬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간접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는 유희에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와 수수께끼는 상당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에 수수께끼의 문법은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지요.
Little Nancy Etticoat
Little Nancy Etticoat,
In a white petticoat,
And a red nose;
She has no feet or hands
The longer she stands,
The shorter she grows.
우리집 아이들이 어렸을 적 부르던 노래는 넷째 행이 생략되어 있었습니다.
Little Nancy Etticoat,
In a white petticoat,
And a red nose;
The longer she stands,
The shorter she grows.
여기서 에티코트는 어느 집의 성씨일 텐데 이 성씨가 등장하는 이유는 단순히 둘째 행의 페티코트, 즉 잘록한 허리 아래로 풍성하게 퍼지는 속치마와 운이 맞기 때문에 선택되었을 뿐 다른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 부를 때는 별 생각없이 들었는데, 이 글을 쓰려고 보니 첫 행과 둘째 행이 운을 맞추었고, 세째 행과 마지막 행이 운을 맞추었는데, 네째 행만 운을 이루지 않아 조금 찾아보니 여섯 행짜리가 있었습니다. 앞에 인용한 여섯 행짜리에서는 넷째와 다섯째 행이 운을 이루고, 세째와 마지막 행이 운을 맞추었습니다. 아무튼 이 노래는 수수께끼 문제입니다. 흰색 풍성한 속치마의 모습이고 빨간 코가 있으며 오래 서 있을수록 짧아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맞추는 수수께끼이지요. 문제의 답은 촛불이라고 합니다. 답을 알고 나니 수수께끼 문제가 그럴듯합니다. 혹시 이 노래의 네째 행이 우리 아이들이 부르던 가사에는 생략되었던 이유가, 손도 없고 발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수수께끼가 너무 쉬워진다고 생각해서 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촛농이 녹아내린 모습이 풍성한 속치마를 입은 듯하고, 촛불은 빨간 코로 표현되었고, 타면 탈수록 짧아지는 것이니 촛불이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앞에 인용한 슈클로프스키의 말대로 늘 하던 방식대로만 생각하면 답이 쉽게 찾아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정답"을 찾는 것이 이 동시를 읽는 목적이냐는 문제입니다. 촛불이라는 답을 찾지 못하면 그 놀이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인가요? 수수께끼를 푸는 동안 열 가지 물건을 생각했지만 촛불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할 때, 그 놀이가 낭비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정답"을 찾으면 그것으로 끝이냐는 문제입니다. 이 수수께끼 풀이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마지막 두 행은 수수께끼의 단서로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일의 전개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향과 반대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무엇하러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보통 갈수록 키가 크는 어린아이들과 달리 낸시 에티코트라는 아이는 갈수록 키가 작아진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생각해 보는 건 꼭 어른이 된 후까지 기다리지 않고 경험해도 좋을 듯합니다.
수수께끼와 시는 여러 문명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중국문학의 금자탑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홍루몽紅樓夢》51회에는 쉐바오친(薛寶琴)이 옛날의 역사를 회고하는 시 열 수가 나오는 데 이 열 수는 각각 수수께끼입니다. 한번 자세히, 천천히 읽어보시고 이 시가 지칭하는 게 무엇인지 맞춰 보세요.
梅花觀懷古
不在梅邊在柳邊,
箇中誰拾畫嬋娟。
團圓莫憶春香到,
一別西風又一年。
"매화관에서 옛날을 생각합니다"
매화나무 옆이 아니라
버드나무 옆에 있는데
거기 누가 그림 속
아름다운 사람을 찾을까요
다시 만나니
봄 향기를 기억하지 않겠지만
하늬바람과 헤어지면
또 한 해를 기다려야 합니다
"정답"이 무엇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실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정답을 찾지 못한다고 할 때, 그 과정에서 거치는 놀이의 여러가지 활동에 의미가 없다고 느끼실지가 더 궁금합니다. 또 "정답"을 찾았다고 할 때, 답을 찾았다는 것 외에 어떤 의미를 느끼실지도 궁금합니다.
현대시에서 수수께끼와 비유의 문제를 직접 붙들고 고민한 재미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자세히 몇 번 읽어보시고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관찰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Sylvia Plath
"Metaphors"
I’m a riddle in nine syllables,
An elephant, a ponderous house,
A melon strolling on two tendrils.
O red fruit, ivory, fine timbers!
This loaf’s big with its yeasty rising.
Money’s new-minted in this fat purse.
I’m a means, a stage, a cow in calf.
I’ve eaten a bag of green apples,
Boarded the train there’s no getting off.
영어와 우리말의 차이를 고려해 "음절"을 "글자"로 번역했습니다.
실비아 플래드
"은유"
난 아홉 글자 수수께끼
코끼리, 커다란 집 한 채
덩굴손 둘에 달린 참외
아, 빨간 과실, 상아, 목재
이스트로 부푸는 큰 빵
두툼한 지갑 빳빳한 돈
난 수단, 무대, 새끼 밴 소
파란 사과 잔뜩 먹은 나
기차 타곤 내릴 수 없네
한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이 시는 시인이 자신의 신체적인 변화를 관찰하고 그 변화에 반응하는 자신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변화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변화에 대한 반응에서 어떤 변곡점을 발견할 수 있는지 재미있게 가지고 놀아보십시오. "정답"을 찾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닐 수도 있고, 정답을 찾지 못해도 이 시와 함께 놀 수 있을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구글검색을 한다면 그 "정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놀이의 포기이고, 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책임과 권리의 방기입니다.
(202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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