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7)
"언어는 믿음직한가요?"
언어가 없는 세상은 참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까지 조그만 멍멍이와 함께 살았는데, 예쁘다고 말해줄 때도 있었고, 야단을 칠 때도 있었습니다. 예쁜 짓을 할 때도 있지만, 아무데나 오줌을 싸는 등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그 녀석은 무어라고 지껄이느냐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는데, 그 때 마다 저 녀석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담아내고 진행시키는 언어는 있을까, 혹시 언어에 의지하지 않는 직관의 세계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보다 못할 게 없는 것 같네, 뭐 그런 생각도 종종 했었습니다.
우리는 참 여러가지로 언어에 의지해 삽니다. 그러나 종종 언어가 내 생각을 담아내는데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든지 "beyond description"이라든지 하는 말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흡족하지 않다는 뜻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표현 역시 언어라는 것은 아이러니라 하겠습니다. 영어 표현 중 "words fail me"도 재미있습니다. 물론 이 표현에 꼭 언어의 기능에 대한 회의나 불만이 담겼다고 하기 보다는 닥친 상황을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겠지만, 언어와 언어에 담고 싶은 내용 사이의 거리를 확인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래 전부터 인류가 해 온 게 분명합니다. 《周易주역》의 〈繫辭傳계사전〉에 이런 말이 적혀있습니다,
子曰:「書不盡言,言不盡意。」然則聖人之意,其不可見乎?
공자님이 말했습니다. "문자는 말을 모두 담지 못하고, 말은 뜻을 모두 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인의 뜻은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까?
공자와 질문자와의 이 대화는 성인이 어떤 연유로 상(象)과 괘(卦)를 만들어 자신의 뜻을 나타나게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의 의미가 있지만, 문자와 말, 말과 뜻 사이의 거리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계사전〉의 이 말을 문자(書)가 뜻(意)을 담아내는 도구로 쓸 때 말(言)의 효능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지는 않습니다. 앞에 쓴 글에서 인용했던 《시경詩經》 〈대서大序〉의 말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詩者,志之所之也。在心為志,發言為詩。情動於中而形於言,言之不足,故嗟嘆之;嗟嘆之不足,故永歌之;永歌之不足,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시란 뜻이 움직여 가는 것이다. 마음에 있으면 뜻이고, 말로 나타나면 시이다. 정이 안에서 움직여 말에 나타난다. 그걸 말로 하는 게 부족하면 탄식을 하고, 탄식으로 하는 게 부족하면 길게 노래하고, 길게 노래함이 부족하면 자신도 모르게 손과 발로 춤을 춘다.
〈계사전〉의 말을 문자와 말의 상대적 효용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시경詩經》의 〈대서大序〉의 이 말을 말이 탄식만 못하고, 탄식은 노래만 못하고, 노래는 손과 발을 움직여 춤을 추는 것만 못하다고 읽어야 할 텐데. 그건 그리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써의 언어가 춤만 못하다는 주장에 쉽게 수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말로 표현할 뜻이 따로 있고, 춤으로 표현할 뜻이 따로 있다는 주장이라고 읽는 것이 좋지 않을지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여기 열거된 방법 외에도, 웃는 얼굴이나 핏대를 올리는 표정이 말로 하지 못하는 뜻을 전달해줄 상황이 있는 건 아닐까요?
어쨌든 무언가 전달하고 싶은 뜻이 있는데, 그 뜻을 전달할 수단이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언어의 효용을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은 표현에 의지해야 하는 시를 쓰는 과정에서는 더욱 각별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를 읽을 때도 언어와 뜻 사이의 괴리는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시를 쓴 세 시인이 언어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시도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다음의 칠언절구 세 수를 찬찬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왕창령 (王昌齡, ca. 690-ca. 756)
〈芙蓉樓送辛漸 부용루에서 친구 신점을 보낸다〉
寒雨連江夜入吳,平明送客楚山孤。
洛陽親朋如相問,一片冰心在玉壺。
차가운 비 강 위로 퍼져나가는 밤
오나라 땅에 다다릅니다.
이제 날이 밝아 친구를 보내면
외로운 초산이 덩그러니 남겠지요
낙양의 가족 친구가
혹시 묻거든 그냥 전해주세요.
"한 조각 얼음같은 마음이
옥 꽃병 속에 있어요."
岑參(잠삼, 715-770)
〈逢入京使 장안으로 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故園東望路漫漫,雙袖龍鐘淚不乾。
馬上相逢無紙筆,憑君傳語報平安。
동쪽으로 고향 장안을 보니
먼 길이 아득합니다
두 소매는 축축히 젖었는데
눈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말 위에서 만났으니
종이와 붓이 없네요
당신이 말을 잘 전해 주리라 믿습니다
잘 있다고 알려 주세요
張籍(장적, 766-830)
〈秋思 가을에 난 생각〉
洛陽城裏見秋風,欲作家書意萬重。
復恐匆匆說不盡,行人臨發又開封。
낙양성에서
가을바람을 만났습니다
집에 편지를 쓰려 하니
온갖 생각이 천 겹 만 겹 이었지요
서둘러 쓰다 보니
할 말을 다 하지 못한 것 같아
편지 전할 사람 막 떠나려고 하는데
다시 편지 봉투를 뜯습니다
이 세 수의 시를 논의하기 전에 먼저 전제해 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 즐겁고 마음 설레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인들이 살던 시절은 전혀 달랐다는 점입니다. 집 떠나는 일은 늘 고생길이었고, 스스로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귀양길이 많았고, 다른 임지의 수령으로 임명 받아 떠나는 경우에도 수도인 장안을 떠난다는 것은 시름과 실망이 따를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전화는 고사하고 우편제도도 확립되기 전이었으니 고향집의 식구나 친구들과의 연락은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장안으로 가는 사람을 만나 집에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건 매우 반가운 기회였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 수는 모두 그런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왕창령의 시는 언뜻 보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집에 전해드릴 테니 편지라도 한 장 쓰시라는 친구의 권유에 대한 대답이 3행과 4행에 나타나 있습니다.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한 조각 얼음같은 마음이 옥 꽃병에 있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가족과 친구가 묻거든" 그 말을 전하라니, 묻지 않으면 뭐 안부를 전할 것도 없다는 말입니까? 집 떠나 여행하는 아들, 남편, 친구가 만나고 온 사람에게 안부를 묻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일까요?
우선 "옥 꽃병에 들어있는 얼음같은 마음"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지요. 몸과 마음이 모두 고달프고 어렵다는 말일까요?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자면,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공부한다고 집을 떠나 40년이란 시간을 해외를 떠돌면서 살았으니 어려운 일, 고생스러운 경험이 없을 수 없었지만, 가끔 집에 드린 편지나 전화에서 고생스럽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고생스럽다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내 걱정을 더 하실 것도 아니고, 잘 있다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말을 정말로 믿고 걱정을 하지 않으실 것도 아니었으니, 목소리를 듣고, 편지를 받아 든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뿐 그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얼음 같은 마음"을 벼슬길이나 돈 버는 일에 눈을 파는 일이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한 것도 보았지만, 참 한심한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시에서 보이는 시인의 언어에 대한 생각은 언어를 믿지 못할 수단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어떤 뜻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인 듯합니다. 낙양의 가족과 친구들이 이 시를 보면서 왕창령에 대해 한 깊은 생각은 어쩌면 이 시의 독자들도 이 시를 통해 왕창령에 대해, 나아가서 집 떠나 있는 여러 가족, 친구들에 대해 하게 될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40년 집 떠나 사는 신세에 내 생각을 해달라고 구걸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왕창령의 시는 요즈음 말로 하자면 쿨합니다. 그에 비해 잠삼의 시는 눈물바다입니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다 보니 손 소매가 모두 젖었습니다. 그래서 전해달라는 "잘 있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게 분명합니다. 사실 붓과 종이를 구할 수 없으니 그냥 그렇게 전해달라는 말도 그리 솔직한 말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잠삼은 정서의 전달을 언어에 의지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냥 잘 있다고 전하라 해서 그 친구가 잘 있다고 전할 것 같지도 않고, 설령 그렇게 전한다고 해도 그 소식을 전해 듣는 가족이 그 말을 믿을 것도 아닙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마음은 꼭 말로 전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세째 작품을 쓴 시인 장적은 왕창령이나 잠삼과 아주 다릅니다. 편지에 쓴 말로 마음을 다 전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지만, 결국은 말에 의지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편지를 써 봉투를 봉해 고향으로 가는 사람에게 건네려 하니, 무언가 부족한 듯해 다시 봉투를 뜯는 장면을 그리고 있으니, 분명 언어가 의지할 만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세 수의 시로 종종 실험을 해 본 일이 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이 세 수를 읽고 해석한 후 어느 것이 제일 좋은 작품인지 고르라는 실험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왕창령의 시를 선택했는데 장적의 작품을 고른 학생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장적의 작품이 좋다면, 그건 끝까지 언어의 기능에 매달리는 자신의 어리석고 애타는 모습에 대한 실소로 이 작품을 읽은 때문일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좀 일방적인 평이었다고 반성합니다. 그러나 장적의 작품이 좋다면, 좋은 이유가 자신의 행위나 정서를 드러내 놓고 독자들이 모두 들여다 보도록 하기 때문인 건 분명합니다.
시가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언어의 기능이나 효용의 한계에 대한 달관도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 분명한 거짓말을 써도 마음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생각은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202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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