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5)
"시인의 머릿속"
나는 시 읽기가 꼭 시인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고 확인하는 등의 작업을 시 읽기와 동일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뭐 그리 특별한 주장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시를 읽은 사람이 많습니다. 시인의 의도가 정말 의미 있게 파악될 수 있는지도 문제이지만, 꼭 시인을 끌어다 대지 않아도 시를 읽으며 할 수 있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정서와 시인이 구사하는 시적 언어, 심지어 시인의 의도 또한 흥미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시의 원천이라고 해도 좋을 《시경詩經》의 〈대서大序〉는 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詩者,志之所之也。在心為志,發言為詩。情動於中而形於言,言之不足,故嗟嘆之;嗟嘆之不足,故永歌之;永歌之不足,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시란 뜻이 움직여 가는 것이다. 마음에 있으면 뜻이고, 말로 나타나면 시이다. 정이 안에서 움직여 말에 나타난다. 그걸 말로 하는 게 부족하면 탄식을 하고, 탄식으로 하는 게 부족하면 길게 노래하고, 길게 노래함이 부족하면 자신도 모르게 손과 발로 춤을 춘다.
"마음속의 정(느낌)이 움직여 밖으로 표현되는 것을 시라고 하는데, 그 말, 즉 언어를 통한 표현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탄식도 하고, 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손과 발을 움직여 춤을 춘다"는 이 말은 결국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로 표현된 시인 마음속의 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도 이야기 했지만, 나는 이런 주장이나 이렇게 내린 시의 정의가 최소한 현대적인 문학의 개념에서 볼 때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속을 헤아려 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나는 시 읽기가 시인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질 때, 시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서정시의 경우에도, 시인의 마음속 뿐 아니라 머릿속에서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역시 궁금합니다. 이건 시 한 수 한 수에 대해서,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시의 창작과정에 대한 일반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얼마 전 재미있는 시를 한 수 읽고 한참 그 시하고 놀았습니다. 한상권시인이 쓴 "부석사에서"라는 작품인데 2015년 출판된 "단디"라는 시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짧은 시이니 우선 전문을 읽어 보시지요.
"부석사에서"
선풍기
발로 끄지1) 않고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2) 않아야 하겠다.
아니 수박씨 퉤 하고 뱉기보다
풋! 하고 뱉3)는다면 되겠다.
아니아니 저 파도 노을,
팔을 크게 벌리고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스무 고개를 수없이 넘어도
풋풋한 생이겠다.
참, 미치겠다.
1) 김영승의 시 <반성ㆍ743> 일부
2)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일부
3) 송찬호의 시 <수박씨를 뱉을 땐> 일부
이 시는 몇 가지 점에서 조금 뜬금없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뜬금없다고 해서 꼭 좋은 작품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몇 번 이야기했지만, 이상하다, 낯설다는 느낌을 주는 시상의 전개나 시어의 사용이 시인의 본령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으니, "뜬금없다"는 느낌을 준다는 건 이게 한 수의 시라는 유력한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뜬금없다는 느낌을 주는지 찬찬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선 시의 내용을 읽고 "그런데 왜 이런 제목이 붙었지?" "도대체 부석사와 무슨 관계가 있지?" "관계가 있다면 왜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지?"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올 법합니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이건, 충남 서산의 부석사이건 그게 시에서 이야기하는 자기 반성이나 결심과 별 관계가 없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 이러한 관찰이 시하고 노는 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할까요? 부석사라는 불교의 고찰에서 화두를 붙들고 좌선 정진하는 선가(禪家)의 언어… 운운이라는 거창한 말로 설명한다면 오히려 설득력도 없고 이 시가 주는 재미도 줄어들지 않을까요?
시의 전반부는 "선풍기 발로 끄지 않는 것", "연탄재 발로 차지 않는 것", "수박씨 단정하게 뱉는 것" 등, 사소한 듯해 보이는 반성과 수양의 실천을 이야기하는데, 후반부에서는 갑자기 "파도 노을을 팔을 벌리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범위가 훨씬 넓어서 실천하기 쉬워 보이지 않는 수양을 이야기합니다. 전후반 두 부분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읽을지 생각해 볼 만합니다.
시의 마지막 행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합니다. 왜 "미치겠다"고 느낀 것인지, 마음을 잘 표현해 줄 언어를 찾지 못해 답답하다는 것일까요? 길게 탄식하고 일어나 손과 발을 움직여 춤이라도 추어야 할까요? 남들은 "연탄재 발로 차지 않고, 선풍기 발로 끄지 않는" 것 같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수행의 목표를 찾았는데, 내게는 왜 "팔 벌리고 온몸으로 파도 노을을 받아 들인다는" 이룰 수 없어 보이는 수행의 방법이 자꾸 떠오르고 그런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러나저러나 넘어야 할 고개가 늘어서 있는 인생을 생각하면 답답하다는 것일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놀다 보면 이 시의 마무리와는 별개로 사색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니뭐니해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의 앞부분이 다른 세 시인의 작품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작품이 앞선 작가의 작품을 인용하는 것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을 한자문화권에서는 전고(典故)를 쓴다고 하고, 영어로는 allusion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을 사용할 때 읽는 사람이 시에 인용된 앞의 작품을 모를 경우 그런 읽기는 무언가 빠진 읽기라고 해야 되나요? 예를 하나 들지요. 엘리어트(T. S. Eliot)의 작품 "황무지(The Waste Land)"는 쵸서(Geoffery Chaucer)의 작품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를 떠올립니다.
"캔터베리 이야기" 프롤로그의 첫 네 행은 현대 영어로 옮겨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When in April the sweet showers fall
And pierce the drought of March to the root, and all
The veins are bathed in liquor of such power
As brings about the engendering of the flower…
사월의 달콤한 비가 내려
삼월의 가뭄을 뚫고 뿌리까지 다다를 때,
모든 정맥이 그런 힘의 진한 술에 젖어
꽃을 피우는 힘을 불러올 때…
엘리어트의 "황무지" 역시 사월이란 시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무딘 뿌리를 흔들어 깨운다
영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두 작품의 도입 부분을 비교해 보면, 두 작품 사이에 분명히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또 엘리어트가 "황무지"를 쓸 때, "캔터베리 이야기"에 기댔다는 점도 분명한 듯합니다. 그러면 이 두 작품 사이의 관계가 "황무지"를 읽을 때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중요한 문제이겠습니다.
"황무지"의 첫 네 행을 읽으며 우선 사월을 왜 잔인한 달이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라일락을 피우고 겨울 동안 메말랐던 뿌리를 흔들어 깨우는 삶의 기운이 생동하는 계절이라 해 놓고, 거기서 잔인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 노래가 죽은 이를 매장하는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온 땅이 메마르고 얼어붙은 때에 장사를 지내는 장면도 잔인하다는 느낌을 주겠지요. 그러나 사월이 가장 잔인한 이유는 깨어나 생동하는 만물과 죽어 묻히는 사람이 이루는 대조 때문이겠지요. 남들이 다 기쁘고 즐거울 때 나 홀로 슬픔을 느낀다면, 그 슬픔은 더욱 크고 아플 것입니다. 중국 고전시에는 봄바람이 불어 나비가 짝을 지어 나는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왜 만물과 대조를 이루려는 듯 나만 홀로인 신세인가 한탄하는 것이지요. 이 한탄은 엘리어트에게 사월이 가장 잔인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잔인하다고 느낀다는 표현은 엘리어트의 "황무지"와 "캔터베리 이야기"의 관계로 인해 더욱 힘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한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캔터베리 이야기"와의 관계를 모르거나 생각하지 않으면서 "황무지"를 읽는다면 그런 읽기는 무언가 부족한, "정답"에 이르지 못하는 읽기인가요? 짐작하시겠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게 제 대답입니다. "황무지"는 한 번 읽고 말 작품이 아닙니다. 여러 번 읽을 가치가 있는 좋은 작품인데, 매번 읽을 때마다,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찾아내 다 느끼고 다 분석해야 좋은 읽기, 즐거운 놀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캔터베리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은 사실 "황무지"읽기의 시작일 수는 있겠지만 끝은 아닙니다. 사월이 잔인한 것은 삶과 죽음의 대비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이유 뿐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있었던 시기가 사월이고, 바로 그 때문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입니다. 그러므로 "황무지"가 사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하는 표현을 보고, 서양문학 전통과 기독교 문화에 친숙한 독자들은 "캔터베리 이야기"를 넘어 신약성서의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수난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학적, 지성적 회상도 "황무지" 읽기에서 꼭 해야하는 빠뜨리지 말아야 할 활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고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예를 보면서 한가지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시를 읽을 때, 특히 서정시를 읽을 때, 시인의 마음에 담긴 정서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시를 쓰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건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물 뿐이 아닙니다. 시인의 머릿속도 복잡합니다. 마음을 잘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은 시 쓰기의 작은 부분입니다. 시인은 문학사의 흐름이라는 맥락에서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시 쓰기의 의미를 자리매김합니다. 아마도 엘리어트는 사월에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머릿속에서는 그런 감정을 표현한 옛날의 시인이나 작품을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런 작품을 이용해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표현하겠다고 생각하고, 또 때로는 이제까지 누구누구가 그런 작품을 썼는데, 이번에 쓸 내 작품은 그들이 쓴 것보다 훌륭해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엘리어트가 쵸서를 경쟁상대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시적 표현을 받쳐줄 버팀목으로 생각했는지는 더욱 자세히 읽는 놀이의 과정에서 붙잡아 볼 수 있는 화두이겠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한상권시인의 "부석사에서"로 되돌려야 하겠습니다. "부석사에서"가 김영승, 안도현, 송찬호시인의 작품에 기댄 것은 엘리어트가 쵸서의 작품을 상기시킨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엘리어트는 내가 쵸서의 작품에 의지해서 이 작품을 쓴다는 걸 독자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조바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면 좋고, 몰라도 내 작품을 잘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최소한 그런 정도의 지식은 갖추었을 것이라 인정하고 존중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상권시인은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주를 달아 어떤어떤 시인의 어떤어떤 작품에 기대고 있음을 알립니다. 제 느낌에는 달아놓은 세 개의 각주가 제발 내가 어떤 작품을 지칭하고 있는지 알아 달라는 시인의 간청이나 애원쯤으로 들립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종종 화제가 되는 지적재산권에 관한 분쟁을 미리 피해 두려는 건 아니었겠지요? 지적재산권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에 대한 패러디인가요? 주를 달지 않으면 독자들이 이 말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요? 그렇다면 독자들의 지식이나 감수성에 대한 불신이라고 보아도 좋을 텐데. 그런가요? 아니면 각주에서 밝힌 세 시인의 작품이 너무나 중요해 만사 제쳐두고 주를 단 것일까요? 아니면,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고, 연탄재를 발로 차지 말고, 수박씨를 뱉을 때도 예절에 합당하게 뱉으라는 권고가 어떤 맥락에서 왔는지 꼭 작품 전체를 찾아 읽어 달라는 부탁으로 보아야 하나요? 중국고전시를 주로 공부하고, 미국의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기 때문에, 주로 한시나 영시를 읽고 우리 현대시를 챙겨 읽지 못하는 나도 들어보고 읽어본 작품들인데, 시인이 내 소양을 무시했다고 불평을 해도 되겠습니까? 반대로,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온 우리 현대시의 모습을 시인이 뼈저리게 파악하고 있고, 그래서 독자들이 이 작품에서 시인이 인용한 세 시인의 작품을 알 것 같지 안다고 현실적으로 상황을 판단한 것일까요? 어떻게 보든 한상권시인이 자신의 작품에 붙여 놓은 세 개의 각주는 오늘날 우리 현대시와 독자들 사이에 자리잡은 깊은 골을 확인하게 합니다. 어쩌면 이건 시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작업이라기 보다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생각할 수 있는 문제들이겠습니다.
한상권시인이 "부석사에서"에서 주를 달아 놓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읽기가 선형적(linear)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우리의 읽기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선형적이지 않습니다. 시를 읽는 도중에 뜬금없이 사랑하는 아내가 생각날 수도 있고, 오늘 점심은 을지면옥에 가서 불고기에 냉면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꼭 주의력의 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시는 독자들이 계속해서 별로 상관없는 여러 시점을 왕래하거나 갑자기 어떤 장소에 대한 추억이라는 옆길로 새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어트를 읽다가 "캔터베리 이야기"가 생각나 엘리어트의 시집은 잠시 접어두고 쵸서가 전해주는 스물 네 가지 이야기를 읽게 된다면, 꼭 그게 잘못된 것일까요? "캔터베리 이야기"로 돌아갔다가 다시 "황무지"로 오는 과정은 "황무지"의 읽기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 같습니다. 김영승, 안도현, 송찬호시인의 작품은 캔터베리 이야기에 비하면 짧디 짧아 바로 "부석사에서"로 돌아올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연탄재 운운, 수박씨 운운 보다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한번 산보를 쭈욱 하시고 다시 부석사로 돌아와 보시지요. 물론 그 세 권의 시집을 손수 찾으시는 수고는 덜어드리겠습니다.
1. 김영승, "반성 743"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왔다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 '더우세요'
눈물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 줄 게 있다고 왼쪽엔
타임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 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류는
선풍기
신축 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
2.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3. 송찬호, "수박씨를 뱉을 땐"
수박을 먹고
수박씨를 뱉을 땐
침처럼 드럽게
퉤, 하고 뱉지 말자
수박을 먹고
수박씨를 뱉을 땐
달고
시원하게
풋, 하고 뱉자
(202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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