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장애물에 담긴 기회 (1)"

반빈(半賓) 2021. 9. 26. 07:04

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8)

 

"장애물에 담긴 기회 (1)"

 

돌이켜보면 중국시를 공부하면서 산 세월이 짧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 걸려있던 한시 서예작품을 보며 선친이 해 주시는 설명을 듣던 때까지 되돌리지 않더라도, 대학에서 중국어와 중국문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정한 때부터 세면 벌써 반 백 년이 되었습니다.  주로 도연명이나 두보, 이태백, 소동파 등 남이 지은 작품을 공부하는 일을 했지만, 가끔 스스로 한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쓰다가 어느 날 쓰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유학이랍시고 떠나서 참 긴 시간 귀국하지 못해 고향을 그리던 신세에 한시를 써서 그랬는지 쓸 때마다 떠돌이(遊子)의 한탄이 나오기 일쑤였습니다. 그게 싫어서 쓰지 않기로 했던 것입니다. 가끔 가까운 친구의 타계 소식을 듣거나, 꼭 축하할 일이 있으면 한두 수 쓰기도 했지만, 일시 파계를 하는 셈 쳤습니다. 그렇게 한시를 읽기만 하고 짓지는 않은 세월이 길어졌습니다.  사실 읽기만으로도 바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다시 한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떠돌이 생활이 길어지면서 그 한스러운 마음이 흘러나오는 게 싫어서 그만 두었던 것인데, 떠돌이 생활이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지요. 나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심경의 변화이기는 했습니다.  떠돌이의 한탄이어도 하는 수 없다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가능하면 그런 마음은 떨치고 덮어 두어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앞에 한시를 쓰고 있던 내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끙끙거리며" 썼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지켜야 하는 규칙이 많다고 느꼈고, 많은 걸 기억해야 했습니다. 외국어였을 뿐 아니라, 몇 백 년 전에 사용하던 발음과 시 쓰기의 규칙을 지키면서 시를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끙끙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했지요. 나만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내가 끙끙거리며 지은 한시를 읽는 동료들, 제자들도 바로 그 이유에서 한시를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쉽게 인정했습니다. 그건 대부분의 중국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중국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고전시가를 전공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시 짓는 것을 어려운 장애물경기에 비유합니다.

 

끙끙거리는 건 시를 상당히 짓고 있는 지금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건 끙끙거리게 되는 이유입니다. 복잡한 규칙 때문이 아니라 결국 시에 담을 만한 좋은 마음, 재미있는 생각, 요즈음 말로 콘텐츠가 부족하기 때문에 시 쓰기가 어렵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서 아주 오래 전 한시를 지을 때 끙끙거렸던 이유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사실은 그 때도 복잡한 형식적 규칙 때문이 아니라 시에 담을 정서와 학문의 결핍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 정말 어려움은 다른 데 있는데, 복잡한 규칙을 탓하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걸 인정하게 되었다는 게 달라졌다면 조금 달라진 것이지요.

 

그 복잡한 규칙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히려 시에 담을 생각을 찾고, 빚고, 얽어내는 데 도움을 주는 길잡이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규칙 중 어느 것도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시에는 이런저런 규칙이 있으니 그걸 지키며 지어야 한다며 만들어 우리에게 애를 먹이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의 머리와 손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말하자면 집단지성, 집단 예술감수성의 결과입니다.  규칙이나 제한이 많지만 거기에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시를 직접 지을 것 같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그렇게 도움을 받는 것이 꼭 시를 쓸 때뿐 아니라, 시를 읽을 때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시의 형식과 그 형식이 부과하는 조건과 규칙은 시인과 독자 모두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의미가 있으니까요.

 

시의 형식과 관련해 지켜야할 규칙(prosody)은 동서고금의 많은 문학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시의 예를 하나 들지요. 불란서 문학에서 영시로 유입되었다는 빌라넬 (villanelle)이라는 형식의 시가 있습니다.  우선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을 하나 읽어 보시지요.

 

Dylan Thomas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Though wise men at their end know dark is right,

Because their words had forked no lightning the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ood men, the last wave by, crying how bright

Their frail deeds might have danced in a green b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Wild men who caught and sang the sun in flight,

And learn, too late, they grieved it on its w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rave men, near death, who see with blinding sight

Blind eyes could blaze like meteors and be g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And you, my father, there on the sad height,

Curse, bless, me now with your fierce tears, I pr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딜란 토마스

 

"그 좋다는 밤으로 얌전히 가지 마세요"

 

그 좋다는 밤으로 얌전히 가지 마세요

늙은 나이를 태워버리고 하루의 끝에는 외쳐야 합니다

분노, 분노하세요, 꺼져가는 불빛에 대해서

 

현명한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어두움이 옳음을 안다고 해도

그들의 말이 번갯불을 끌어들이지 않아요

그 좋다는 밤으로 얌전히 가지 마세요

 

좋은 사람들, 마지막으로 지나가는 물결은, 자기들의 연약한 공적이

얼마나 밝았겠느냐 울부짖고 녹색 해변으로 춤추며 갑니다

분노, 분노하세요, 꺼져가는 불빛에 대해서

 

사나운 사람들, 날아가는 햇빛을 잡아놓고 노래했지만

그 빛이 끝나가는 길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게 됩니다

그 좋다는 밤으로 얌전히 가지 마세요

 

엄숙한 사람들, 죽음에 임박해 눈을 멀게 하는 광경을 보고

먼 눈이 별똥별처럼 빛날 수 있다고 즐거워 합니다

분노, 분노하세요, 꺼져가는 불빛에 대해서

 

그리고 아버지, 이승 슬픔 꼭대기에 서신 나의 아버지

이제 격정의 눈물로 나를 저주하고 축복하시라고 기구합니다

그 좋다는 밤으로 얌전히 가지 마세요

분노, 분노하세요, 꺼져가는 불빛에 대해서

 

이 한 수의 시로 빌라넬이란 시형식을 다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며 놀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 형식은 모두 합해 19행으로 이루어집니다.  3행짜리 다섯 연에 이어 마지막 연은 4행입니다.  이 형식에 관련된 규칙 중 다음의 몇 가지가 재미있습니다.

 

1. 첫 연의 첫째 행과 세째 행이 둘째 연부터 다섯째 연까지의 네 연에 번갈아 마지막 행으로 다시 쓰인다는 점.

2. 이 두 행이 또 마지막 연의 마지막 두 행으로 다시 등장한다는 점.

3. 번역에서는 살리지 못했지만 여섯 연의 둘째 행이 모두 같은 운을 사용하고, 나머지 13행은 모두 한 운으로 일관한다는 점.

 

첫째 연의 첫 행과 마지막 행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점은 이 두 행이 빌라넬이라는 형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형식을 선택해 시를 쓸 경우, 첫 연의 첫 행, 세째 행에 담을 내용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 두 행에 담을 좋은 내용이 없는 경우, 이 형식은 선택하지 않는 게 좋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읽기에도 적용됩니다. 이 두 행과 그 반복이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에 유의하면 시에 담긴 정서와 그 정서를 담아내는 방법을 찾아 느끼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압운 형식의 이 특색은 우리가 이 형식으로 쓰인 작품을 읽을 때 둘째 행의 내용이 어떻게 독자의 주의를 끄는지 생각하며 읽어보라는 권유이기도 합니다.

 

반복해서 사용되는 것이 단어가 아닌 행 전체이고, 또 그 반복이 두 행이 번갈아 쓰이는 규칙성이 시 전체의 구조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형식적 특성 때문에 빌라넬이 강렬한 감정을 담기에 적당한 그릇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러 가지 예를 들어 한 가지 느낌을 반복해 강조할 수도 있고, 그 느낌이 점차적으로 강렬해지는 기법을 구사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면서 그렇게 온순하게 돌아가시지 말고 일어나 화라도 내시면 좋겠다는 마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 회한을 담아 내고 있습니다.

 

빌라넬이 아버지의 임종이라는 강렬한 감정을 담기에 적절하다면, 실연의 아픔도 이 형식에 담기 좋은 주제이겠습니다.  앞에 쓴 글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실비아 플래드가 빌라넬에 담은 사랑의 아픔을 한번 보시며 시하고 놀기를 진행해 보시기 권합니다.

 

Sylvia Plath

 

Mad Girl's Love Song

 

I shut my eyes and all the world drops dead;

I lift my lids and all is born again.

(I think I made you up inside my head.)

 

The stars go waltzing out in blue and red,

And arbitrary blackness gallops in:

I shut my eyes and all the world drops dead.

 

I dreamed that you bewitched me into bed

And sung me moon-struck, kissed me quite insane.

(I think I made you up inside my head.)

 

God topples from the sky, hell's fires fade:

Exit seraphim and Satan's men:

I shut my eyes and all the world drops dead.

 

I fancied you'd return the way you said,

But I grow old and I forget your name.

(I think I made you up inside my head.)

 

I should have loved a thunderbird instead;

At least when spring comes they roar back again.

I shut my eyes and all the world drops dead.

(I think I made you up inside my head.)"

 

빌라넬이라는 시 형식의 갖가지 규칙을 잘 지켜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물로 볼 게 아니라, 강렬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게 해주는 도우미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런 생각으로 빌라넬의 형식을 빌어 쓴 시를 읽을 때는 강렬한 감정이 어떻게 담겨 드러나는지 찾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의 형식과 관련된 이런 생각은 중국의 고전시가를 읽을 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자세히 분류하자면 매우 복잡하지만, 우리가 자주 대하는 한시는 주로 네 행으로 이루어진 절구(絕句), 대부분이 여덟 행인 율시(律詩), 율시가 형성되기 전 쓰이던 형식으로 시 짓기의 규정이 아직 엄격해지기 전에 사용되었고, 율시 형성이후에도 계속 애용된 고시(古詩)의 세 가지입니다. 이 세가지 형식이 요구하는 조건이나 제약을 하나하나 알아보고 그걸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지침으로 볼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절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절구는 전체가 4행뿐인 짧은 형식입니다.  한 행이 다섯 글자인 경우는 오언절구 (五言絕句), 한 행이 일곱 글자인 경우 칠언절구 (七言絕句)라고 부릅니다.  절구라는 시형식이 주는 가장 큰 어려움은 맞춰야 하는 운도 아니고, 평성과 측성을 잘 배치해 음률을 조절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상을 펼칠 공간의 절대부족이 절구를 짓기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칠언절구의 경우 28자, 오언절구는 고작 20자에 불과한 공간에서 시에 담을 내용을 제시하고 마무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운과 음률을 맞추는 건 극히 제한된 공간만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장애물이 아니겠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그 공간을 확대할 수 있는지, 어떤 방법으로 할지가 제일 중요한 어려움이겠습니다.

 

제한된 시적 공간을 극복한다는 것은 시의 마지막 행, 마지막 글자를 읽고 나서도 시가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 시의 맛이 메아리처럼 계속 머릿속에, 마음속에 울리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걸 중국의 옛 시비평가들은 "싯구는 끊어져도 뜻은 끊어지지 않는다 (句絕而意不覺)", "함축적으로 부드럽게 표현하여 맛이 구불구불 감돌게 한다 (婉曲回環)"는 등의 표현으로 절구가 추구하는 시적 표현의 이상을 논의했습니다. 또 제한된 공간에서의 표현이기 때문에 "번잡한 것을 없애고 간명함을 추구한다 (刪蕪就簡)"는 원칙을 설파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비평의 표현들은 절구의 제한된 공간을 십분 이용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공간을 만들어 보라는 도전이기도 합니다.

 

물론 담고자 하는 이야기나 정서가 마침 아주 작은 그릇에 담기 좋은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맹호연(孟浩然)의 "봄날 새벽(春曉)"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봄 잠에 새벽이 오는 걸 느끼지 못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새 소리가 들립니다.

지난 밤에는 비바람 소리가 있었지요.

어이쿠, 꽃이 얼마나 많이 떨어졌을까요?

 

이 시는 소재 자체가 짧은 형식에 적합합니다.  봄날 이른 아침, 어렴풋한 꿈결에서 깨어나는 짧은 시간을 노래한 것인데, 그 짧은 시간의 전개를 미묘한 변화에 대한 관찰로 훌륭하게 잡아낸 것입니다. 첫 행은 새벽이 오는 것을 몰랐다고 했으니 아직 꿈결입니다. 둘째 행에서는 새 소리가 들린다고 했으니 잠이 조금 더 깬 상태이겠습니다.  사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통이 트기 직전 새소리로 가득한 시간이 최소한 청각적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듣기는 듣지만 아직 이불 속에서 달게 즐기는 상태이겠습니다. 세째 행은 새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점점 잠에서 꿈결에서 더 깨어났고, 그러다 보니 간밤에 세차게 분 비바람을 들었다는 기억에 의식이 도달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네째 행은 그렇게 세찬 비바람에 생각이 이르자 문득 꽃잎이 다 떨어져 버린 건 아닌지 걱정하는 광경을 포착합니다. 이런 정도의 해석만으로도 이 작품은 상당히 성공적이라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네 행을 다 읽었을 때 읽은 사람의 반응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이 성공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두 행과 마지막 두 행을 비교해 보면, 독자들은 대부분 마지막 두 행에서 훨씬 더 극적인 장면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려내는 더욱 극적인 필치를 느낍니다.  네 행을 다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마지막 두 행 만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껏 첫 두 행 만을 외우고 있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두 행에 기억에 남을 만한 내용과 표현을 담아 놓아야 한다는 생각은 "세째 구절이 중요하다(第三句為主)"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작품이 스무 자 뿐이라는 공간적 제한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시의 마지막 행을 다 읽은 후에도 마음이 시에 잡혀 있음을 즐기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마음이 문득 다 떨어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꽃잎에 가는 장면에서 갑자기 시가 끝납니다.  마지막 행의 내용에서 이어지는 장면에서 시인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뜰로 나갔는지, 나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확인하면 낙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갈팡질팡했는지, 우선 해장술 한 잔 해야 나가 확인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뭐 때가 되어 떨어지는 걸 어쩌겠느냐고 아쉽지만 받아 들였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마무리입니다.  어쩌면 마무리를 방해하는 마무리이기도 하고, 그걸 여운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여운은 어떤 형식의 시에서도 중요하겠지만, 특히 공간의 제약이 가장 심각한 절구에서는 특히 중요하겠습니다.  시인이 시를 지을 때 여운을 남기기 위해 노력한다면, 읽는 사람도 그 여운이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찾아보며 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제껏 절구를 쓴 시인들이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여운을 남기려고 쓴 방법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사실 엉뚱하다고 생각될 만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마지막 행에 의문문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시의 마지막 행에 질문이 담겨 있으면, 그 질문에 어떤 답이 가능할지 생각해 보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겠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시는 마지막 행을 넘어 마음에 남아있게 됩니다.  예를 하나 보시지요.

 

賀知章(659-744)

 

回鄉偶書

 

少小離家老大回,

鄉音無改鬢毛衰。

兒童相見不相識,

笑問客從何處來?

 

하지장

 

"고향에 돌아와 우연히 씁니다"

 

어렸을 때 집을 떠나

   늙어서 돌아오니

고향 사투리는 변하지 않았는데

   귀밑머리는 빠졌습니다

 

만나는 아이들이

   모르는 사람이라고

웃으며 묻습니다

   "손님은 어디에서 오셨어요?"

 

오랜 동안 그리워만 하고 돌아오지 못했던 고향에 돌아와 느끼는 감회는 복잡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머릿속, 마음속에 줄곧 있었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근감과 실제로 느끼는 거리감 사이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사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싶어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는 정서를 아이들의 그 질문 하나가 천 배 만 배로 부풀게 합니다.  그 중 "손님(客)"이라는 칭호로 불리면서 느꼈을 정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이렇게 절구의 마지막 구절을 의문문으로 짓거나, 질문을 포함시킴으로써 공간의 제한을 극복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셨으면 절구의 마지막 행에 의문문이 자주 등장한다는 게 보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것도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한두 수 들어드리지요.

 

王維(692-761)

 

雜詩

 

君子故鄉來,

應知故鄉事。

來日綺窗前,

寒梅著花未?

 

왕유

 

"그냥 쓰는 시"

 

고향에서 오셨으니

고향의 일을 잘 아시겠지요.

오시던 날 아름다운 창가에

겨울 매화꽃이 피었었나요?

 

조선의 여인 죽서 박씨의 시집, 《竹西詩集》의 맨 앞에 수록된 열살 때 지었다는 시는 왕유의 이 작품을 이용합니다.  측실의 딸로 태어나 불우하게 지내다 요절한 죽서 박씨가 열살에 당나라의 시를 읽어 알고 시 짓기에 이용했다는 점이 괄목할 만합니다.

 

竹西朴氏(十九世紀初)

 

十歲作

 

牕外彼啼鳥,何山宿便來。

應識山中事,杜鵑開未開。

 

"열 살 때 지음"

 

창 밖에서 지저귀는 저 새야

어느 산에서 자고 바로 오는 거니?

산속의 일을 잘 알지

진달래는 피었니, 아니면 아직?

 

의문문이 공간의 부족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여운을 만드는데 효과가 있다면, 사실 마지막에 부정문을 사용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입니다.  "……이 아니다", "…은 없다"는 말로 이루어지는 마무리는 그러면 무엇이 있지? 어디 갔지? 왜 없지? 등의 많은 질문을 불러 올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보는 동안 시의 마지막 행이 끝난 후에도 시의 맛이 계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마"가 설파하듯이, 무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그걸 생각할 수 밖에 없게 합니다.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칠언 절구 한 수를 예로 보겠습니다.

 

劉方平(八世紀初)

 

春怨

 

紗窗日落漸黃昏,

金屋無人見淚痕。

寂寞空庭春欲晚,

梨花滿地不開門。

 

유방중

 

"봄날의 원망스러움"

 

비단 창 너머로 해가 떨어지고

   황혼이 가까워 오는데

금으로 지은 궁궐에는

   눈물자국을 볼 사람이 없습니다

적막한 텅 빈 뜨락에

   봄은 끝나가는 데

땅 가득히 떨어진 배꽃 보려고

   문을 열지 않습니다

 

한나라 무제가 젊은 시절 사촌 여동생 진아교(陳阿嬌)를 위해 금으로 궁궐을 지으려 했다는 고사를 사용한 이 작품은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의 한을 담았습니다. 사랑의 받지 못하는 지금의 아픔은 한 때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 때문에 더욱 아픕니다. 마지막 행은 이런 정서를 진하게 전달합니다.  한 때 흐드러지게 아름다웠던 배꽃, 이제는 떨어져 땅을 가득 채운 배꽃 꽃잎, 그것을 문을 열어 확인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마지막 행 짧은 일곱 글자에 잘 담겨있습니다.  문을 열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며 문을 열고 떨어진 꽃잎을 보는 장면을 상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언어를 통한 우리의 인지 활동입니다.  이태백의 오언절구를 한 수 보시지요.

 

李白(701-762)

 

怨情

 

美人捲珠簾,

深坐顰蛾眉。

但見淚痕濕,

不知心恨誰。

 

이태백

 

"한스러운 마음"

 

아름다운 여인 구슬 발을 걷어 올렸지만,

깊숙하게 앉아 눈썹을 찌푸릴 뿐입니다

젖은 눈물 자국 보일 뿐

마음 속에서 누구를 미워하는지 모릅니다

 

젊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버린 남자를 원망하는 내용입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으면서도 누구를 미워하는지 모른다니 솔직한 말이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부정문으로 마무리 된 이 짧은 시는 쉽게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미워할 사람이 분명할 텐데 왜 모른다고 할까? 미워할 가치도 없다는 말일까? 그 사람이 미운 것보다 자기 자신이 더 밉다는 뜻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 끊이기 어렵습니다.  만일 이태백이 이 마지막 구절을 「確知心恨誰」, 즉 "마음 속에서 누구를 미워할지 확실히 압니다"라고 했다면, 여운은 금세 잦아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행에서 여운을 남기는 방법, 말이 다 끝나도 뜻은 끝나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마지막 행에 쉽게 잦아들지 않을 이미지나 생각을 툭 던져 걸어 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李白

 

送孟浩然之廣陵

 

故人西辭黃鶴樓,

煙花三月下揚州。

孤帆遠影碧空盡,

惟見長江天際流。

 

이태백

 

"광릉으로 가는 맹호연을 전송합니다"

 

오랜 친구 서쪽으로 간다고 해

   황학루에서 작별했습니다

꽃잎 안개에 쌓인 춘삼월

   양주로 간다고 했지요

멀리 외로운 돛단배 그림자

   푸른 허공으로 사라지니

하늘 끝으로 흐르는

   긴 강이 보일 뿐입니다

 

하늘로 흘러 들어가는 듯한 강의 끝까지 눈길로 쫓아가던 돛단배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강과 하늘의 끝은 하나로 섞여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오랜 친구가 그 머나먼 곳으로 사라졌다는 생각을 단지 긴 양자강이 하늘과 만나는 저 먼 경치를 툭 내 던져 표현했으니, 읽는 이가 쉽게 이 시를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상 속의 정경을 마지막 행에 걸어 두어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비슷한 방법입니다.  당나라 말기 절구의 달인이라고 해도 좋을 이상은의 시를 한 수 보시지요.

 

李商隱(813-858?)

 

夜雨寄北

 

君問歸期未有期,

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剪西窗燭,

卻話巴山夜雨時。

 

이상은

 

"밤비 속에 북쪽으로 보냅니다"

 

당신이 돌아올 날을 물으셨지만

   기약이 없습니다

파산의 밤 내리는 비에

   가을 연못이 불어나고 있습니다

언제면 함께 앉아

   서쪽 창문 앞 촛불 심지를 돋우며

파산의 밤 내리던 때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 시의 제목은 "밤비 속에 아내에게 보냅니다(夜雨寄內)"라고 전하는 판본도 있습니다.  어쩌면 집을 떠나 남쪽 파산으로 온 남편이 지어 집에 있는 아내에 편지 대신으로 전한 작품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집 떠나 고생길에서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에 집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내에게 보낸 시입니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하자면 한이 없겠지요.  그러나 단지 스물 여덟 글자로 마음속의 공명을 일으켜 서로 기억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긴 편지보다 힘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 행이 담고 있는 정경은 오늘 밤 이 시간이지만, 그건 먼 훗날 다시 만나서 기억하는 추적추적 비 내리는 떨어져 있는 이 밤입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상태를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로 기억하며 화제에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툭 던져 걸어 놓았으니, 이 시를 받은 시인의 아내도 한참을 읽고 또 읽었을 것이고, 이 시를 읽는 우리도 여운을 오래오래 맛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쓰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겠습니다.  허락된 작은 공간에서 오랜 시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절구는 지을 때나 읽을 때나 공간적 제한을 극복하는 시도가 중요하겠습니다.

 

(202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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