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4)
"놀기와 살리기"
한편으로는 "시하고 놀라"고 해놓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노는 사람(독자)이 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혼란스럽다는 불평이 있을 겁니다. "놀기"와 "살리기" 사이에 쉽게 메꾸기 어려운 거리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겠지요. 게다가 시를 지은 시인은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지은 시를 살려낼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니 더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정리해 두기로 합니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시는 독자가 읽으며 놀아야 살아납니다. 시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독자가 실천하는 영역이라는 이 말을 이해하는 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시인이 써서 발표하고 시집이나 잡지 등의 지면에 실린다고 해도 아무도 읽지 않고 처박아 둔다면 그 작품은 살아있다고 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이 말은 또한 독자가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독자들이 모두 같은 방법으로 시를 읽지는 않으므로 시의 생명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 독자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시하고 놀면서 시에게 생명을 주니 그 생명이 다양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더욱 재미있습니다. 시의 읽기가 어떤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정답"을 찾지 못하면 잘 못 읽은 것이라는 주장은 시하고 놀기를 위축시킬 뿐입니다.
둘째, 시인이 만들어낸 시는 독자가 시하고 노는 순간 시가 살아날 수 있게 하는 여러가지 장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를 살리는 데 시인의 역할이 없다는 말은 사실 새겨 들어야 합니다. 잠들어 있다고 해도 좋고, 생명이 없다고 해도 좋겠지만, 독자가 읽어 깨우거나 살려내기 전에도 시는 깨어 일어나 생생하게 살아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런 준비의 과정에서 시인의 시적 사유와 감수성, 언어의 구사 등이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한 시인의 역할을 빅터 슈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입장을 정리해 우리가 친숙하게 느끼는 언어사용을 철저히 탈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실천하려면 시인은 시를 지을 때마다 새로운 방법으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한번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도 거기에 안주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번에 사용한 언어가 이미 친숙한 언어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시어와 보통말은 친숙한 언어나 습관을 따르는 언어의 사용방법에 대한 태도에서 나뉘지 않을까요? 어떤 사실을 전달하려는 신문기사나 가족에게 전하는 안부 편지 같은 글에 사용하는 언어는 늘 읽는 대로 읽을 수 있도록 쓰는 것이 좋을 것이고, 그러한 언어를 보통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어는 무언가 친숙하지 않아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다고 느끼거나 놀라게 한다는 점에서 다르겠습니다.
또 이 말은 시를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제까지 무언가를 읽을 때 가지고 있던 습관이나 언어의 사용에 관해 가지고 있던 전제로 인해서 제한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오랫동안 영문학을 강의한 해롤드 블룸(Harold Bloom)은 무슨 글이나 다 읽었고 읽은 것은 다 기억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0000 행이 넘는 밀튼의 "실락원(Paradise Lost)"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고 하는데, 심지어 마지막 행부터 거꾸로 외울 수도 있었고, 그 긴 시에서 무작위로 어느 한 행을 골라 제시하면 그 행의 앞과 뒤 행을 말할 수도 있었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이 전설을 제가 실제로 확인한 적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기억력이 조금 부럽기는 하지만 책에 다 있는데 애써 외울 게 무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블룸이 작품을 마지막 행에서 시작해 거꾸로 읽어 보았을 것이라는 점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상식적인 읽기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재미있는 "놀이"가 아닙니까? 어쩌면 실락원을 수십 번 읽었고, 그렇게 읽으면서 친숙하지 않게 읽는 방법을 찾다 보니 끝에서부터 거꾸로도 읽어보게 된 건 아닌지 헤아려 봅니다. 앞에서부터 읽을 때 눈에 띄지 않았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을 수 있고, 그래서 많은 생각 거리, 놀 거리를 찾았을 것 같습니다.
읽기가 친숙한 습관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실제로 읽기/놀기의 방법을 조금 보여드리기 위해 앞의 글에서 소개했던 실비아 플래드의 "은유"라는 작품을 다시 불러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우선 원문과 제 번역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Sylvia Plath
"Metaphors"
I’m a riddle in nine syllables,
An elephant, a ponderous house,
A melon strolling on two tendrils.
O red fruit, ivory, fine timbers!
This loaf’s big with its yeasty rising.
Money’s new-minted in this fat purse.
I’m a means, a stage, a cow in calf.
I’ve eaten a bag of green apples,
Boarded the train there’s no getting off.
실비아 플래드
"은유"
난 아홉 글자 수수께끼
코끼리, 커다란 집 한 채
덩굴손 둘에 달린 참외
아, 빨간 과실, 상아, 목재
이스트로 부푸는 큰 빵
두툼한 지갑 속의 새 돈
난 수단, 무대, 새끼 밴 소
파란 사과 잔뜩 먹은 나
기차 타곤 내릴 수 없네
제목부터 "은유"이니 그 비유에 담긴 본 뜻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서 수수께끼의 답이 무언지 찾아보려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제목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의 제목은 명사의 복수형이고, 그래서 여러 개의 은유를 늘어 놓았음을 나타냅니다. 이 시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대부분 이 시와 시에 포함된 은유가 시인이 임신한 자신의 모습과 정서를 노래했다고 설명합니다. 스스로 읽으면서 그런 해석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왜 그런 설명이 가능한지 꼼꼼히 짚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놀이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꼭 이 "정답"을 찾아야 잘 노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정답을 찾았다고 해도 꼭 재미있는 놀이를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 시에 열거한 하나하나의 은유, 하나하나의 수수께끼 사이에 명확한 관계는 별로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코끼리와 커다란 집은 무언가 매우 큰 것, 그러니까 임신해 불러오는 배와 늘어가는 몸무게를 이야기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덩굴손에 달린 커다란 참외에서는 크기 외에도 머지 않아 누군가가 딸 것을 생각하게 하는 힌트가 들어있네요. 그렇다면 뱃속의 아이가 태어날 것을 상상한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넷째 행이 조금 어렵습니다. 빨간 과실, 상아, 그리고 좋은 목재가 각각, 그리고 함께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이 행의 이미지가 어떻게 임신한 자신의 모습과 연결될까요? 가지고 놀다 보면 생각이 날까요? 노는 과정에서 앞뒤에 배열된 다른 은유와 연결하게 될까요? 다음 두 행의 은유는 크다는 사실 외에 무언가 안에 들어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건 새로 발행된 빳빳한 새 돈처럼 향긋하고 즐거운 연상을 가져다 주는 내용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임신과 쉽게 연결이 됩니다.
일곱번째 행에서는 시인의 정서가 갑자기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갑자기 주인공의 자리를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내 주고 자신은 단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나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무대일 뿐이라는 것, 그래서 새끼를 밴 소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일곱번째 행을 이렇게 자신의 신세가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이나 불안함의 표현으로 읽으면 나머지 두 행의 뜻이 짐작이 됩니다. 풋풋한 파란 사과가 맛이 있다고 해도 그걸 잔뜩, 원문의 뜻을 따르면 한 보따리나 먹은 것에 대한 후회가 느껴집니다. 무언가 좋아서 거기 빠지기는 했는데, 그 탐닉의 정도가 지나쳤다고 후회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미 달리는 기차에 타고 있으니 역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나는 실비아 플래드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꼭 이런 해석을 거쳐 이 작품이 임신과 관계된 내용이라는 "정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 말고도 하면서 놀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나는 이번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며 놀 때, 위에 설명한 내용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번의 놀이는 두 가지를 발견하고 이리저리 여기저기서 들여다 보는 작업이었습니다.
첫째는 첫 행입니다. 첫 행은 자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수수께끼라는 사실과 그 수수께끼를 늘어놓을 공간을 행당 아홉 음절로 제한할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 번역에서는 "음절"을 "글자"로 번역했습니다.) 사실 자신이 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비단 시인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경험입니다. 마음으로는 사랑하면서,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못한 경험,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경험일 것입니다. 꼭 시인이 아니라도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그래서 수수께끼라는 형식을 빌어 그 경험을 적어보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표현을 아홉 음절로 이루어진 시행에 담는 형식적 제한을 왜 자신에게 부과하는지가 재미있습니다. 사실 정형시의 경우 형식적 제한은 여러 문화권의 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소네트(sonnet)라는 시형식은 다음과 같은 제한을 부과합니다.
1) 14행이어야 한다.
2) 한 행이 10음절이어야 하고, 그 10음절은 /약-강/이 다섯 번 반복된다. (그걸 영시의 전문용어로는 iambic pentameter라 합니다.)
3) 14행은 4-4-4-2 행의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 네 부분은 abab-cdcd-efef-gg로 운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 문학의 시조나 중국문학의 율시도 모두 지켜야하는 복잡한 형식이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적 제한은 한편으로는 까다롭고 불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읽는 시에 어떤 형식적 제한이 있는지를 아는 것은 어떻게 놀지를 안내하는 작용도 합니다.
실비아 플래드의 시 "은유"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시를 쓰는데 지켜야 하는 형식적 제한이 시의 전통에서 오는 게 아니라, 시인 자신이 자신에게 부과하는 제한입니다. 왜 이런 불편을 자초할까요? 슈클로프스키에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친숙함을 거스르는 언어사용의 방법이고, 그것은 이 글이 시이니까 그리 알고 친숙함을 피하는 방법으로 놀기/읽기 바란다는 표식입니다." 이 설명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풀어보라고 던지는 수수께끼가 녹녹치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을 서서 보고, 앉아서 보고, 처음부터 보고, 마지막부터 보고, 큰 소리로 읽어보고, 노래로 불러보고, 써 보고, 그 외에도 나름대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놀아보라는 권유는 경청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 뿐일까요? 나는 왜 하필이면 아홉 음절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행당 아홉 음절일 뿐 아니라, 이 시 전체가 아홉 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수께끼의 답이 "임신한 시인의 정서"라면 임신 기간이 아홉 달이라는 사실과 관계는 없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번 읽기/놀이에서 찾은 두번째 특징은 제가 "난"이라고 번역한 "I'm"이 두 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첫 행과 일곱번째 행이 "난"으로 시작됩니다. 혹시 이 도구로 아홉 행의 시를 첫 여섯 행과 뒤 세 행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부분은 내용은 주로 임신하고 느끼는 신기함, 흥분, 기쁨인데, 둘째 부분은 혼란스러움, 후회, 걱정이 주된 내용입니다. 물론 마지막 행에서 기차에 올라탄 이상 종착역까지 가야한다는 것을 수용하고 있지만, 무얼 수용한다는 말 자체가 첫 여섯 행에서는 보이지 않는 떨떠름함을 바탕으로 하는 듯합니다. 혹시 임신기간에 시인이 느낀 정서의 부침을 따라가는데 이런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기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그렇다면, 시인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형식적 제한은 시에 담고자 했던 정서의 표현을 잘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이러한 놀이가 실비아 플래드의 이 작품에 이제껏 다른 사람들이 그리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아닐지요?
(20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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