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역사 흘겨보기

"하나로 남기 위한 미국의 노력"

반빈(半賓) 2015. 4. 26. 03:12

"하나로 남기 위한 미국의 노력"

 

    미국은 여러 개의 주가 모여 이룬 연방국가로, 연방의 사회적 응집력을 지켜 하나로 남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미국 역사의 이러한 특징은 우선 국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미국의 공식 국호는 “미합중국” 또는 “아메리카 합중국”이라고 번역되는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다수의 개체[중(衆)]”가 하나로 “모여[합(合)]” 만들어진 나라라는 뜻을 지닌 명칭이다.  이 이름에는 자칫하면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두 가지 의지가 담겨있다.  그 하나는 개체를 존중한다는 의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연합을 지켜내겠다는 의지이다.  물론 개체에 대한 존중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연합이 가능하지 않고, 합쳐진다는 전제 없이는 개체의 존중도 무의미하므로 이 두 가지 의지는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현실에서 보면 이 두 가지 의지를 동시에 지켜내는 과제는 쉽지 않았고, 이 의지의 실천을 위해 많은 인내와 타협이 필요했다.

 

    미국이 역사의 과제로 알고 수행해온 응집력의 유지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1776년 독립선언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루어낸 연합이 역사적 필연이 아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미대륙의 동해안에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었던 영국의 여러 식민지(colonies)는 경제기반이나 생활관습, 가치관 등이 아주 달라서 하나로의 연합은 그리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아 보였다.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매릴랜드, 델라웨어 등의 식민지를 포함한 소위 “남부 식민지 Southern Colonies”는 대토지 소유의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 위에 이루어졌고, 담배, 인디고, 쌀 등의 플랜테이션 농장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흑인을 노예로 소유했다.  뉴욕, 펜실바니아, 뉴저지 등을 포함하는 “중부식민지 Middle Colonies”는 자영농 중심의 사회구조를 이루고 풍부한 식량을 생산하면서 활발하게 교역에 종사했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뉴잉글랜드”는 청교도적인 근검함이 바탕을 이루었고, 조세나 식민지 관련 법률을 이유로 생긴 영국과의 여러 가지 분규에 있어 투철한 저항 정신을 보였다. 

 

    이렇게 매우 다른 식민지들이 연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해 저항해야 했던 시대배경 때문이었다.  연합의 발단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나왔다.  1754년 조지 워싱턴이 약관 22세의 나이로 지휘한 버지니아의 민병대가 영국의 사냥꾼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북미대륙에 있던 프랑스군대를 공격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북미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1763년 영국의 승리로 마무리된 이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는 북미대륙에서의 근거지를 잃었고,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미시시피강까지의 영토는 영국이 겸병했다.  그러나 전쟁은 승리한 편에도 심각한 부담을 남기기 마련이어서, 영국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늘어난 부채에 허덕였고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은 북미의 식민지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법령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인지법령 The Stamp Act”이다.  식민지 지역의 각종 계약서나 신문, 공문서에 영국정부가 발행하는 인지를 붙여야 한다는 일종의 세법이었는데, 북미에 있던 영국의 식민지는 이 세법이 자신들의 의사나 사정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불공평한 결정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했다.  영국은 1766년 결국 이 인지세법을 취소했으나, 이듬해 다시 식민지로 수입되는 각종 상품에 과세하는 타운셴드 세금 Townshend Duties을 책정했다.  이에 대한 식민지의 강력한 저항으로 무력충돌 계속되어 희생자가 생기자 영국은 이 세금 역시 취소했지만, 영국에서 수입하는 차에 대한 세금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영국에서 수입되는 차를 바다에 버리며 저항한 사건이 바로 유명한 보스턴 티 파티 The Boston Tea Party 이다.

 

    영국의 식민지 조세정책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지도자였던 새뮤엘 애덤즈와 존 핸콕은 소위 “통신위원회 Committees of Correspondence”를 조직하여 혁명과 저항에 대한 소식을 전달하였다.  보스턴 티 파티의 소식은 통신위원회의 연락망을 통해 식민지 전체에 빠르게 전달되었고, 그 결과로 뉴저지, 뉴욕, 사우스캐롤라이나, 로드아일랜드 등에서 그리니치 티 파티, 뉴욕 티 파티, 프로비던스 티 파티 등의 유사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저항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아주 강경했다.  1774년 4월 1일, 두 달 안에 보스턴 티 파티 때 파괴된 차에 대한 변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보스턴 항구를 봉쇄한다는 법령의 제정으로 시작해서 네 가지의 소위 “강제법령 The Coercive Acts”을 통과시켰는데, 식민지는 이 법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법령들을 “참을 수 없는 법령 The Intolerable Act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사실이 영국의 강경책에 대한 식민지의 정서를 잘 표현한다.

 

    식민지의 지도자들은 영국의 강경책에 대응하기 위해 제1차 대륙회의 The First Continental Congress를 소집했는데, 이 회의에는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의 대표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 대륙회의는 식민지에 영국이 보스턴 티 파티 후 제정한 “강제법령”을 따를 의무가 없다고 결의했다.  이렇게 강경과 강경의 대치상황 속에서 타협이나 화해를 위한 노력이 모두 실패하여 무력대결이 불가피하게 되면서 결국 1776년 독립선언에 이르게 되는데, 13개 영국식민지의 연합은 바로 이 과정에서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영국과의 화해가 이루어져 독립의 선언으로 가지 않았다면 13개의 식민지가 하나로 연합할 충분한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실제로 독립이나 연합을 원하지 않았던 세력도 상당했다.  이렇게 북미대륙에 있던 영국의 식민지들이 독립선언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룩한 연합은 상호간의 차이점이나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이룩된 것이 아니라, 영국의 강경한 식민지 정책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하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출발부터 상당히 취약했다.  1783년 파리 강화조약으로 끝날 때까지 8년 동안 치른 전쟁이 한편으로는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국과의 관계에 대해 입장을 달리하는 식민지 여러 세력 사이에 있었던 내전의 성격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연합이 이루어지고 독립을 성취한 후 국가의 체제를 정비해 발달하는 과정에서 이 연합을 반드시 지켜가야 할 과제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 과제를 이루기 위해 많은 타협과 조정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전쟁도 불사했다.  연합의 유지가 공들여 이루어야 하는 과제였다는 사실은 다시 말해 연합의 유지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늘 있었다는 뜻이다.

 

    흑인 한 사람을 3/5 명으로 한다는 엉뚱한 계산법을 만들어낸 소위 “1787년의 타협 The Compromise of 1787”은 좋은 예이다.  1783년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이 마무리되고 미국이 국가건설을 위한 제도의 정비를 시작하면서 바로 연합의 유지가 쉽지 않은 과제로 대두되었다.  남부의 5개 주는 자신들이 소수의 입장임을 자각하고 다수를 이루는 북부가 노예제도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고자 했다.  예를 들어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흑인들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 대두된다면 협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내전이나 국가의 분리를 피하고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부가 타협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타협의 결과로 흑인은 한 사람이 3/5 사람이라는 계산법이 만들어졌는데, 흑인노예에게 백인 60%의 수준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었다.  북부는 연방의회 의원의 수를 산출함에 있어 흑인노예 인구의 60%를 가산함으로써 남부가 백인인구의 비례보다 훨씬 많은 대표를 의회에 보낼 수 있도록 배려했고, 최소한 1808년까지는 노예의 수입을 계속할 수 있다고 보장했다.  반면, 남부는 차후에 오하이오강 북부에 새로 성립될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등 세 개의 주에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  흑인은 “사람이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3/5 명의 사람으로 계산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타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은 노예제도와 노예제도를 둘러싼 사회구조의 차이, 정치적 계산의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북의 갈등은 계속 미국역사의 과제로 남았고, 미국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는 19세기 내내 연합의 유지를 위한 또 다른 타협이 필요했다.  1820-21년에 걸쳐 이루어진 “미주리 타협 The Missouri Compromise”과 1850년의 타협 The Compromise of 1850의 배경과 내용이 좋은 예이다.

 

    미주리 타협은 미국의회가 미주리지역을 하나의 주로 연방에 받아들이는 조건을 논의한 결과로 이루어졌다.  그 당시 미국의 주는 노예제도를 인정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둘로 구분되었다.  노예제도를 채택한 주를 “노예주 slave states”로,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주를 “자유주 free states”라고 불렀고, 이 둘 사이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1819년 미주리를 노예제를 채택하는 노예주로 연방에 받아들인다는 안건이 발의되자, 노예제를 허가하더라도 이미 소유한 노예로 제한하여 그 이상의 노예반입을 금지하고, 연방가입 후 미주리에 태어나는 노예의 자식들은 25세가 되면 해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수정동의가 나왔다.  이 수정동의안은 치열한 논의 끝에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에서 부결되었고, 정국이 들끓게 되었다.

 

    이 때 노예제도의 문제로 첨예한 대립을 보인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1819년 현재 미국연방에는 22개의 주가 가입되어 있었는데, 노예제도를 채택한 주와 인정하지 않는 주가 각각 11개로 미주리주의 가입방식에 따라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쌍방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한 것이 바로 미주리 타협이었는데, 미주리를 노예주로, 동북부의 메인주를 자유주로 받아들여 균형을 유지하고 향후 가입될 주 중에서 미주리주의 남쪽 경계선인 북위 36" 30'이북에서는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 타협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남부에 유리한 결정이었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그 후로 연방정부에 편입될 광대한 영토를 고려할 때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도 아니었다.  특히 이 타협은 연방의회가 특정지역에 노예제도를 인정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노예가 재산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형태의 재산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남부가 인정한 결과임을 생각하면 단순히 유불리를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 형세의 판단보다는 메울 수 없어 보이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타협한 노력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1850년의 타협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미주리 타협의 반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타협이 필요했던 이유가 유사했다.  영토 확장과정에서 일어났던 멕시코와의 전쟁 The Mexican War이 1848년 마무리되면서 미국은 서쪽으로는 현재의 캘리포니아, 남쪽으로는 뉴멕시코와 텍사스, 북쪽으로는 유타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에서 지방정부가 구성되어 연방에 새로 편입될 때 노예제도를 인정할 것이냐가 논쟁의 초점이었다는 점에서 미주리 타협과 비슷했다.  당시의 상황 역시 판에 박은 것처럼 1820년을 닮았다.  멕시코와의 전쟁이 끝난 1848년 현재 미국연방에는 30개의 주가 가입되어 있었는데, 노예주와 자유주가 각각 15개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쌍방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었음이 역시 미주리 타협의 상황과 유사했다.  또 이 때의 타협에서는 미주리 타협의 과정과 결과에서 보인 여러 쟁점을 다시 논의해야했다.  새 땅이 “자유로운 땅”, 즉 노예제도가 없는 땅이어야 한다는 주장, 미주리 타협의 결과로 생긴 북위 36" 30'의 경계선을 서쪽으로 연장 적용할 것인지의 문제, 나아가서 노예제도의 문제를 주민들의 주권적 결정에 맡기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의견 등이 다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타협의 결과로 캘리포니아를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로 받아들이고, 유타와 뉴멕시코의 노예제도는 주민들의 뜻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이 어렵게 이룬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논의하고 타협했다는 사실은 교훈적이다.  그러나 유사한 쟁점이 2-30년 간격으로 반복 논의되었고, 대립의 핵심에 있는 문제에 대한 장기적인 해결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1850년의 타협 이후 미국은 소위 남북전쟁으로 불리는 내전으로 향한다.  1855년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세력이 캔사스지역의 의회를 장악하면서 한 주에 두 개의 지역정부가 성립되었고 1858년 연방의회가 캔사스를 연방에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1860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이듬해에는 나머지 남부의 주들이 분리를 선언하여 새로운 국가의 성립을 선포하면서, 미국은 내전에 돌입했다.  연합하여 하나로 남는다는 과제를 타협으로 이루지 못할 상황에 이르자 전쟁까지 불사한 것이니, 그 또한 연합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강렬한 표현이었다고 하겠다.  이 내전은 링컨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 등 많은 역사적 순간들로 점철되면서 1865년 북부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국가 성립 후 부단한 타협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전쟁을 통해서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전쟁 종료 후 전쟁으로 파괴된 남부와 남북의 관계를 재건하는 과정과 결과는 노예제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아주 부족했다.  법률적으로는 노예가 해방되었고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지만 해방된 흑인노예가 백인과 동등한 인권을 가지는 데는 그 후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며, 오늘날까지 진정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 노예제도에서 파생된 문제이외에도 연합을 흔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물론 국가의 분리를 요구하는 데 이르지는 않는다고 해도 연합의 유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과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