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역사 흘겨보기

미국〈독립선언문〉 읽기

반빈(半賓) 2010. 2. 10. 15:17

미국〈독립선언문〉 읽기

 

    미국의 〈독립선언문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은 조금 생뚱맞은 문서이다.  민주주의의 큰 원칙을 담아낸 명문으로 평가되는 역사적인 문서를 "생뚱맞다"고 하는 게 오히려 더 생뚱맞다고 야단칠 분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선언이 그런 문서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에 무언가 역사의 맥락과 괘리가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고 그래서 생뚱맞다고 한 것이다.  그런 표현이 적절한지의 문제를 떠나 최소한 이 선언문을 깊이있게 읽기 위해서는 선언의 지성사적인 내용과 역사환경의 사이에 보이는 거리감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할 것이다.

 

    〈독립선언문〉의 초미는 뭐니뭐니 해도 두번째 단락의 앞부분에서 밝힌 평등과 천부인권의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과 모든 사람이 창조주로부터 삶과 자유, 행복의 추구 등 빼앗을 수 없는 권리를 받았음을 미국 사람들이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고 선언한 것인데, 이러한 생각은 당시 북미대륙의 동해안에 형성되었던 13개 영국 식민지의 현실과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진리가 실현되는 사회의 모습은 당시의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두 세기 반이 흐른 오늘날에도 과연 그 선언에서 자명한 진리라고 말한 평등과 천부인권이 정말 실천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생뚱맞다는 말이 아주 틀리진 않은 것 아닌가.

 

사실 이 문서로 독립선언을 마무리한 북미대륙의 영국 식민지 13개 지역은 당시 전쟁이라고 해도 좋을 치열한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 식민지와 본국과의 관계가 수탈과 저항으로 점철되었으리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나, 본국 영국과 북미의 영국 식민지와의 관계가 급박하게 긴장된 것은 1754년 조지 워싱턴이 지휘하는 버지니아의 민병조직이 북미대륙에 있던 프랑스군대를 공격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북미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였다.  이 전쟁이 1763년 영국의 승리로 마무리되면서 프랑스가 북미대륙에서 차지하고 있던 미시시피강까지의 영토를 영국이 겸병하고 프랑스는 북미대륙에서의 근거를 잃었다.  그러나 전쟁은 승리한 편에도 심각한 부담을 남기기 마련이어서 영국은 전쟁 중에 쌓인 부채로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  영국은 이 재정난의 해결방법을 북미의 식민지에서 찾으려고 했다.   예를 들어 1765년 제정된 "인지법령 The Stamp Act"이 바로 그런 의도에 기초한 세법이었다.  식민지 지역의 각종 계약서나 신문, 공문서 등에 영국정부가 발행하는 인지를 붙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북미의 영국 식민지는 이 세법에 저항했다.  자신들의 의사나 사정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불공평한 결정이어서 따를 수 없다는 입장을 확고히 한 것이다.  영국은 1766년 결국 이 인지세법을 취소했지만 그 이듬해 다시 식민지로 수입되는 각종 상품에 과세하는 "타운셴드 관세 Townshend Duties"를 책정했다.  이에 대한 식민지의 강력한 저항으로 무력충돌 계속되어 희생자가 생기자 영국은 이 관세 역시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영국에서 수입하는 차에 대한 관세를 유지한 것이었다.  이 세금에 대한 불만으로 영국에서 수입되는 차를 바다에 버리며 저항한 사건이 바로 유명한 "보스턴 티 파티 The Boston Tea Party" 이다.  뉴잉글랜드가 차에 대한 관세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소식은 소위 "통신위원회 Committees of Correspondence"의 연락망을 통해 식민지 전체에 빠르게 전달되었고, 그 결과 뉴저지, 뉴욕, 사우스 캐롤라이나, 로드 아일랜드 등에서 유사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저항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아주 강경했다.  1774년 4월 1일, 두 달 안에 보스턴 티 파티 때 파괴된 차에 대한 변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보스턴 항구를 봉쇄한다는 법령의 제정으로 시작해서 네 가지의 소위 "강제법령 The Coercive Acts"을 통과시켰는데, 식민지는 이 법령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법령들을 "참을 수 없는 법령 The Intolerable Act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사실이 영국의 강경책에 대한 식민지의 정서를 잘 표현한다.

 

북미에 있던 영국의 13개 식민지는 이 과정을 통해 독립을 선포하고 연합하여 하나의 국가로 탄생하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실제 역사의 경험이기는 했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할 수 없었다.  우선 1776년 독립선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식민지가 견지한 투쟁의 목표가 "대의(代義) 없이 부과하는 세금에 반대한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말로 정리되는, 영국정부의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고, 실제로 독립을 위해 싸우거나 독립을 상상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을 한다고 해도 꼭 하나로 연합해 뭉쳐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역시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독립이나 연합을 원하지 않았던 세력도 상당했다.  13개의 식민지역이 모두 영국의 식민지이기는 했으나 소위 "남부 식민지"와 "북부 식민지"는 산업과 사회의 구조나 문화에 있어 현저한 차이를 보였으니, 섣불리 연합을 하는 것이 슬기롭지 못한 수순일 수도 있었다.  독립선언의 이듬해인 1777년 "대륙회의 Continental Congress"가 초안, 1781년 3월 13개 주에 의한 비준과정을 마친 "연방규약 The Articles of Confederation"에서 보이는 연방국가의 모습이 하나의 국가라고 하기 보다는 여러 개의 국가가 느슨하게 연결된 연방에 가까운 조직이었고, 13개의 주가 연방정부에 국가라는 조직을 만들고 이끌어 갈 힘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영국을 상대로 투쟁하던 식민지들이 강력한 중앙정부가 출현하여 영국의 지위를 대체할 가능성에 대해 조바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독립선언이 이렇게 백척간두에 방불하는 위험 속에서 나왔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선언문을 읽어보자.  우선 이 〈독립선언문〉이 민주주의의 원칙을 담았다는 사실을 살펴보자.  평등과 천부인권은 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원칙으로 이 두 가지를 한 단락에 간단하면서 확실하게 담았으니 참 멋지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게 독립의 선언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무릇 독립의 선언은 독립이 왜 정당한지를 밝히는 주장을 담아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담아야 했던 주장은 우리의 〈기미독립선언문〉의 경우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독립선언문〉은 "본래 우리 것인데 너희들이 억지로 빼앗아 갔으니 되돌려놓으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첫 두 단락에서 "세계만방"과 "자손만대"에 독립을 고하면서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이천만 민중의 성충(誠忠)"으로 고하는 독립이 "시천(是天)의 명명(明命)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인류 공존동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라고 설파하여 독립선언의 큰 틀을 제시하지만 결국 독립선언이 정당하다는 근거는 여기 인용하는 세번째 단락에 있다.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작(作)하여 유사이래 누(累)천년에 처음으로 이(異)민족 겸제(箝制)의 통고(痛苦)를 상(嘗)한지 금(今)에 십년을 과(過)한지라. 아(我) 생존권(生存權)의 박상(剝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심령상(心靈上) 발전의 장애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민족적 존영의 훼손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신예(新銳)와 독창으로써 세계문화의 대조류에 기여보비(寄與補裨)할 기연(機緣)을 유실함이 무릇 기하(幾何)이뇨.

 

어려운 한자말을 쉽게 고쳐서 정리하면 "힘에 의한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겨 이민족의 통치를 맛본지 이미 10년이 지났고, 그 동안의 문제가 셀 수 없이 많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빼앗아 간 것을 내 놓으라"는 주장인데, 사실 그 독립의 주장에 그 이상의 정당성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소위 "식민지"의 문제가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35년 동안의 식민지 경험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미국이 한 국가로의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식민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영국에서 북미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고, "식민통치"를 한 주체는 영국이었으니 본래 북미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 즉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사람들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아예 논의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빼앗아 간 것을 도로 내놓으라"는 의미의 독립선언은 적용될 수 없었다.  독립선언의 정당성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독립과 독립선언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우선 민주주의의 큰 원칙인 평등과 천부인권을 내 세운다.  그리고는 "정부 Governments"를 그러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정의하면서, 정부가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권력은 "통치를 받는 사람들 governed"의 합의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정부가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국민의 합의로 받은 권력을 남용하거나 찬탈할 때 정당성을 잃는 것이니, 국민은 그러한 정부를 고치거나 없애버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권한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민주적 가치와 정부와 국민과의 관계에 대한 명쾌하게 설파한 후, 영국의 국왕이 얼마나 잘 못 했고, 잘 못 하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열거한다.  말하자면 영국국왕의 식민지에 대한 명백한 실정이 이미 정도를 지나쳤으므로 독립을 선언한다는 논리를 세운 것이다.

 

  그러면 이 〈독립선언문〉이 담고 있는, 미국이 독립해서 세울 국가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로부터 삶과 자유, 행복의 추구 등 빼앗을 수 없는 인권을 받았다는 사실을 실천할 것이라는 주장의 의미를 이러한 지성사의 맥락에 대한 이해의 토대 위에서 고찰해보자.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이 그렇듯이, 독립선언에 담은 이상적인 국가 역시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두 개의 가치를 포함한다.  평등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이고, 사회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있는 자와 없는 자, 강자와 약자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 배려하고 보살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은 징수한 세금으로 사회보장을 튼튼히 해서 가진 것 없고 힘이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고 제한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세금이 자유의 침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적 민주사회에서는 이 두 가지 가치가 서로 보완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를 중시하느냐 정의와 평등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입장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흔히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시각을 "보수"라 하고 정의와 평등을 중시하는 입장을 "진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두 입장 모두 중요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서는 평등과 정의를 중시해 사회보장과 복지에 힘쓰는 반면, 미국과 같은 나라는 시장의 기능에 의존하도록 자유를 중시한다고 상대적으로 개괄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1776년에 만들어진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현실을 묘사한 것도 아니요, 도달하고자 희망하는 목표를 그린 것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국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서로 상충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서로를 보완하는 가치로 가꾸어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겠다. 

 

다시 말해서 〈독립선언문〉은 미국의 국민과 정부에게 늘 가꾸고 실천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실천의 과정이 민주적 가치의 실현에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날인가 평등과 자유가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민주사회 건설의 종착점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평등과 자유라는 서로 부딪칠 수 있는 가치를 늘 부둥키고 하나로 다른 하나를 보완하며 살겠다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이다.  하기는 민주주의 자체가 꼭 그렇다.  도착해야할 종착점이 아니라 늘 아끼면서 매일매일을 살아야 하는 원칙이다. 〈독립선언문〉, 참 좋은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