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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 박씨, "비가 반갑습니다"

竹西朴氏 喜雨 雲煙深鎖眾星墟,夜色沉陰隔遠居。 芭蕉葉大聲初滿,楊柳枝深影轉踈。 豐先有兆何須卜,喜極如蘇自屢書。 浮世塵埃應洗盡,令人心事共清虛。 (深字重。) (第六句用蘇軾〈喜雨亭記〉之事。) 죽서 박씨 "비가 반갑습니다" 구름 안개 두텁게 별자리를 모두 덮었고 밤 기운 무거운 그림자 멀리 머물던 곳을 가렸습니다 파초 큰 이파리 오랜만에 빗소리로 가득하고; 버드나무 우서진 가지 점점 그림자가 성글어집니다 풍년은 먼저 징조가 있을진대 왜 꼭 점을 쳐야 하나요 반가움이 커져 소동파와 같으니 스스로 글을 쓰고 또 씁니다 덧없는 세상 온갖 티끌 깨끗이 씻어내어 마음 속 걱정거리도 같이 비우라 합니다 (반빈 역) (여섯째 구절은 소동파의 "희우정기(喜雨亭記)"를 원용합니다.) Bak Jukseo "Rejoicing the R..

"언어는 믿음직한가요?"

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7) "언어는 믿음직한가요?" 언어가 없는 세상은 참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까지 조그만 멍멍이와 함께 살았는데, 예쁘다고 말해줄 때도 있었고, 야단을 칠 때도 있었습니다. 예쁜 짓을 할 때도 있지만, 아무데나 오줌을 싸는 등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그 녀석은 무어라고 지껄이느냐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는데, 그 때 마다 저 녀석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담아내고 진행시키는 언어는 있을까, 혹시 언어에 의지하지 않는 직관의 세계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보다 못할 게 없는 것 같네, 뭐 그런 생각도 종종 했었습니다. 우리는 참 여러가지로 언어에 의지해 삽니다. 그러나 종종 언어가 내 생각..

다산 정약용, "오징어의 노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 한 수를 소개합니다. 다소 길지만 찬찬히 읽어보시면 맛이 있을 겁니다. 조선 후기의 저명한 학자로만 생각하면 의외일 수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 없을 수 없는 번민을 담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丁若鏞(1762 - 1836) 〈烏鰂魚行〉 烏鰂水邊行, 忽逢白鷺影。 皎然一片雪, 炯與水同靜。 擧頭謂白鷺, 子志吾不省。 旣欲得魚噉, 云何淸節秉。 我腹常眝一囊墨, 一吐能令數丈黑。 魚目昏昏咫尺迷, 掉尾欲往忘南北。 我開口呑魚不覺, 我腹常飽魚常惑。 子羽太潔毛太奇, 縞衣素裳誰不疑。 行處玉貌先照水, 魚皆遠望謹避之。 子終日立將何待, 子脛但酸腸常飢。 子見烏鬼乞其羽, 和光合汙從便宜。 然後得魚如陵阜, 啗子之雌與子兒。 白鷺謂烏鰂, 汝言亦有理。 天旣賦予以潔白, 予亦自視無塵滓。 豈爲充玆一寸嗉, 變易形貌乃如是。 魚來..

죽서 박씨, "밤에 지은 노래"

竹西朴氏 夜成 四隣寂寞月中天,病裏愁多夜抵年。 淡白梨花渾似雪,嫩青楊柳乍寒煙。 春深偏覺懷人處,酒醒猶疑在夢邊。 清區未必求寰外,現在安閒即是仙。 죽서 박씨 "밤에 지은 노래" 사방 이웃이 모두 적막한데 달은 하늘 가운데 떴습니다 병든 몸에 근심까지 많으니 하루 저녁이 한 해처럼 깁니다 깨끗한 흰 배꽃 꽃잎 눈 날리듯 휘돌고 옅은 녹색 버드나무 어느 새 찬 안개에 싸였습니다 봄이 깊어 가니 기어이 그리운 님 계신 곳이 생각나고 술이 깼지만 아직도 꿈 언저리에 있는 듯합니다 맑고 깨끗한 곳을 꼭 세상 밖에서나 찾아야 하는 건 아니니 지금 여기서 한가히 지내면 내가 바로 신선이지요 (반빈 역) Bak Jukseo "A Song Completed at Night" Everywhere in the neighborhood ..

"이태백의 머릿속"

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6) "이태백의 머릿속" 시를 읽는 일, 시하고 노는 일에 시인을 결부시키는 경우 그의 마음 속 뿐 아니라 머릿속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있다고 앞서 쓴 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이태백의 시 한 수를 가지고 놀면서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발견하는 놀 거리는 어떤 것은 시인들이 거의 모두 공유하는 특성일 것이고, 어떤 것은 이태백 개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특성일 것입니다. 우선 시를 찬찬히 들여다 보시기를 권합니다. 한문에 익숙하시지 않아도, 제 번역과 대조하면서 천천히 읽으시면 이 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흥미있는 일들을 찾으시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李白,“訪戴天山道士不遇” 犬吠水聲中,桃花帶露濃。 樹深時見鹿,溪午不聞鍾。 野竹分青靄..

죽서 박씨, "봄날 부질없이 읊조립니다"

竹西朴氏 春日謾咏 燕子歸來春已深,新愁偏與病相侵。 過雨溪橋迷柳色,微風庭院動花陰。 數杯薄酒聊成醉,一幅新詩謾寄心。 若使清閒元有價,人間誰復惜南金。 (〈過雨〉,敬修堂藏本作〈過兩〉,據手抄本改之。) 죽서 박씨 "봄날 부질없이 읊조립니다" 제비 돌아오니 봄이 깊었고 새로 얻은 근심 기어이 오랜 병과 함께 쳐들어 옵니다 시냇가 다리를 지나가는 비 버들잎 색을 가리고 정원에 산들 부는 바람 꽃 그늘을 흔듭니다 싱거운 술 몇 잔에 취기가 오르고 새로 쓴 시 한 폭에 부질없이 마음을 담습니다 맑고 한적한 삶에 가격을 매길 수 있다면 사람 사는 세상 그 누구가 다시 금덩어리를 귀하게 여길까요 (반빈 역) Bak Jukseo "Chanting Idly on a Spring Day" Swallows have come back To..

"시인의 머릿속"

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5) "시인의 머릿속" 나는 시 읽기가 꼭 시인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고 확인하는 등의 작업을 시 읽기와 동일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뭐 그리 특별한 주장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시를 읽은 사람이 많습니다. 시인의 의도가 정말 의미 있게 파악될 수 있는지도 문제이지만, 꼭 시인을 끌어다 대지 않아도 시를 읽으며 할 수 있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정서와 시인이 구사하는 시적 언어, 심지어 시인의 의도 또한 흥미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시의 원천이라고 해도 좋을 《시경詩經》의 〈대서大序〉는 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詩者,志之所之也。在心為志,發言為詩。情動於..

죽서 박씨, "당신께 올립니다"

竹西朴氏 寄呈 暫見何如未見時,一宵還似一年遲。 鷰非薄俗來如約,鵲是靈姿報有期。 轉輾寒衾難就夢,沉吟殘燈強裁詩。 慇懃為語雲端月,願借餘輝照別離。 죽서 박씨 "당신께 올립니다" 왠지 뵙지 못할 때는 잠시라도 뵙고 싶고 하룻밤이 한 해처럼 느릿느릿 갑니다 제비는 야박하지 않아 언약한 대로 오고 까치는 영험해서 님 오실 날을 알려준다고 하지요 차가운 이불 속에서 뒤척이니 꿈결에 들기 어렵고 꺼져가는 등불 아래서 깊이 읊조리며 싯구를 억지로 꿰어보려 합니다 구름 가장자리 달에게 간절히 이야기합니다 남은 달빛 나누어 주시면 헤어진 님을 비추고 싶어요. (반빈 역) Bak Jukseo "Presented to You" When I am unable to see you for some reason I hope to be wi..

죽서 박씨, "즉석에서 짓습니다"

竹西朴氏 即事 高城西北政黃昏,蜀魄聲中獨掩門。 枯草惟應為藥物,殘燈猶可辨詩論。 且將後約須謀醉,縱有深懷未肯言。 雨過疎簾風乍起,澗聲來自隔山村。 죽서 박씨 "즉석에서 짓습니다" 높은 성 서북쪽으로 뉘엿뉘엿 땅거미 지고 소쩍새 소리 속에서 홀로 문을 닫아 겁니다 마른 풀일 지언정 약재로 쓸 수 있고 깜박이는 등불이라도 시를 쓰고 논하기에 족합니다 훗날을 약속하려면 우선 취해야겠지요 마음 깊이 품었지만 기꺼이 말하지 못했습니다 비가 그치면서 성근 발에서 언뜻 바람이 일고 시냇물 흐르는 소리 산 저쪽 마을에서 들려옵니다 (반빈 역) Bak Jukseo "Composing Instantaneously" Over the northwest walls of the city The sun sets in the gathering..

"놀기와 살리기"

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4) "놀기와 살리기" 한편으로는 "시하고 놀라"고 해놓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노는 사람(독자)이 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혼란스럽다는 불평이 있을 겁니다. "놀기"와 "살리기" 사이에 쉽게 메꾸기 어려운 거리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겠지요. 게다가 시를 지은 시인은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지은 시를 살려낼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니 더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정리해 두기로 합니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시는 독자가 읽으며 놀아야 살아납니다. 시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독자가 실천하는 영역이라는 이 말을 이해하는 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시인이 써서 발표하고 시집이나 잡지 등의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