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이 무엇이고 거기 살게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기 쉽지 않으니 설명하기는 물론 더욱 어렵다. 그게 이 세상이 끝나고 나서 그 다음에나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사고나 언어, 설득과 공감의 근본을 이루는 많은 개념과 방법들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전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지하는 지혜와 논리로는 천국과 지옥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이 이 세상의 삶을 의미있게 해주는 중요한 방편임에 또한 틀림이 없다. 천국과 지옥에 현세적인 의미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해하고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아마 이러한 구조적인 모순때문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담론에는 온갖 비유와 수사가 동원되는 것 같다.
지난 주일미사에서 본당신부가 농담이라며 천국과 지옥에 대해 다소 엉뚱한 정의를 소개했다. 천당은 "주방장은 불란서사람, 경찰은 영국사람, 자동차 정비사는 독일사람, 연인은 이태리사람이고, 세상의 나머지 일에 대한 조정을 스위스사람이 담당하는 곳"이고, 지옥은 "주방장은 영국사람, 경찰은 독일사람, 자동차 정비사는 불란서사람이면서, 사랑은 스위스사람이, 일정의 조정은 이태리사람이 맡아 하는 곳"이라고 했다. 교우들이 모두 한바탕의 웃었다. 공감한다는 반응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신사로 알려진 영국사람들이 경찰이면 예의바르게 시민들을 대할 테니 좋겠지만, "영국요리"라고 하면 생각나는 게 "Fish 'n Chips"라는 생선튀김뿐일 정도이고 그 멋도 맛도 없는 음식을 늘상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그들이 주방장 노릇을 하면 참 답답하겠다; 불란서 음식이라면 음식인지 예술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 훌륭하지만, 불란서 사람은 좀 얼렁뚱땅이라는 느낌을 주니 자동차 수리를 맡기기에는 불안하다; 벤츠자동차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독일사람들이 기계를 다루는 솜씨나 태도는 참 믿음직하지만, 딱딱하기 그지 없는 그 사람들이 경찰 노릇을 하면 시민들이 숨막힐 정도로 답답할 것 아닌가; 열정적인 이태리사람은 사랑을 나눌 상대로는 더없이 좋으나, 사랑에 빠지면 무슨 다른 일에도 마음이 가지 않을텐데 그런 사람들에게 일상의 일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기면 그 결과가 혼란뿐일 것이다; 째깍째깍 잘 돌아가는 스위스 시계처럼 모든 일을 참 빈틈없이 잘 조정할 능력이 있는 게 바로 스위스사람들이나, 사랑을 그렇게 나누어야 한다면 그게 무슨 사랑이겠느냐, 뭐 이런 정도의 생각을 담은 농담이고, 공통체의 교우들이 함께 웃은 것도 바로 그런 생각에 수긍을 한 때문일 것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 농담은 정형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실 농담이건 진담이건 이런 생각이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이게 모두 스테레오타입 (stereotype)을 만든 결과인데, 우리 모두 경계해야 할 행태이다. 한 무리의 사람을 개개인의 특성이나 자질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형화된 틀 속에 밀어 넣는다면, 그 과정과 결과에서 억울한 사람이 양산될 것이다. 영국사람중에 소질이 있고 창의적인 훌륭한 주방장이 없을 리 없는데 모든 영국사람의 요리솜씨를 싸잡아 폄하해서야 되겠는가. 이태리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을 빼면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주위의 친구들이 비슷한 오류에 빠질 때 꼭 지적하곤 하는 나조차도 본당신부의 농담을 들으며 사람들과 함께 웃었다. 그걸 아마 주위의 사람들이 공감의 표현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 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잘못한 것이다. 우린 그런 오류를 참 쉽게 범한다. "셋째 딸은 선을 볼 필요도 없이 혼인해도 좋다"느니, "엽전은 별 수 없다"느니, "부잣집 외동딸이니 분명 공주병을 앓고 있을 것이다"라느니 하는 말이 모두 빈약한 근거 위에 만들어진 정형화의 결과이다. "왜놈"이니, "뛔놈"이니, "문디이(문둥이) 자슥"이니, "하와이"니 하는 말들도 같은 이유에서 피해야 한다.
그러나 "농담"이라고 했으니 용서하고 지나가 보자. 나도 공범이었으니 용서를 청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떻게 하겠는가. 그걸 용서하고 나면 "농담" 삼아 거론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본당신부의 정의는 천국과 지옥의 현세적 의미를 생각하기 아주 쓸모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농담이 늘 그렇지만 이 농담도 찬찬히 읽다 보면 중요한 문제가 떠오를 수 있고, 그런 문제를 통해 좋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예컨대 이 농담을 듣고, 어떻게 천국에도 자동차 고장이나 무질서 같은 "문제"가 있고 그래서 정비사나 경찰이 필요한 것이냐고 질문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냥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제껴 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농담의 의도와 전혀 방향이 다른 질문이기는 해도 우리가 소위 "문제"라고 일컫는 것들이 꼭 나쁜지 생각해 볼 단서를 제공한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천국을 생각하는 데 아주 쓸모있을 수 있다. 천국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겪는 온갖 문제가 순조롭고 원만하게 해결될 때 느끼는 안도와 보람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는 걸 시사한다. 아무 문제도 없어야 천국이 아니라, 어떤 어려운 문제도 잘 풀 수 있는 곳이 천국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지옥은 힘들이지 않고도 풀 수 있는, 사실 문제랄 것도 없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천국이나 지옥이나 모두 누군가가 다 만들어 놓은 다음에 우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천국에서 옆에 목마른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 목을 축여주는 건 하느님의 몫이라고 하면서 모른 체 하겠는가. 어떻게 천국에 목마른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냥 문제의 존재 차제를 부정하고 수수방관하겠는가. 아예 목마름이 없는 것 보다, 서로 서로 목마른 사람들을 찾아 보살피기 때문에 누구도 목마를 틈이 없는 것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이 생각을 한 걸음 더 끌고 나가보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논리와 지혜, 이 세상의 언어로 천국을 이룰 수 없다면, 무슨 자격이 있어 다음 세상에서 천국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을 채우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서로 힘을 합해 원만하게 해결하면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지혜로 이해할 수 있는 천국을 만들고 가꾸어야 다음 세상에서도 천국을 누릴 희망이 있지 않겠나. 서로 아귀다툼을 하면서 우리의 논리와 식견으로 보아도 참 딱한 세상을 만들어 살고 난 후라면 우리가 갈 곳이 어찌 천국일 수 있겠나.
이 "농담"을 들으며 할 수 있는 어리숙한 질문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천국에도 지옥에도 사람사이의 차이가 여전히 존재하는가 물어 볼 수 있겠다. 시계의 부속품이 착착 맞아 돌아가듯이 모든 일을 그렇게 조정해낼 수 있는 사람, 정열적인 노래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멋드러지게 그릇에 담아 내는 솜씨가 있는 사람, 뜀박질을 좋아하는 사람, 내로랄 만한 솜씨는 없어도 남이 잘 하는 걸 보면 힘차게 박수를 잘 치는 사람…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의 차이가 없어져 모두가 똑 같은, 그래서 모두가 특별히 잘 하는 것도 특별히 모자란 것도 없는 곳이 천국인가. 그래야 "공평"하고, 그렇게 "공평"해야 천국인가.
모든 사람이 키도 똑같고, 몸무게도 똑같고, 생긴 것도 똑같고, 능력이나 단점이 똑같고, 습관이나 기호도 똑같으면 분명히 공평하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는 두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공평할 수 있는 방법이 모두가 모든 면에서 똑같아야 하는 것 말고는 없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모두가 똑같으면 거기에 "천국"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또 하나를 더한다면 구성원이 서로 다르다는 게 왜 그리 두려움이나 조바심의 원인이 되어야 하는가 이다. 요컨대 구성원 사이에 갖가지 차이가 있다는 게 천국을 이루는 데 전혀 문제가 없고, 만일 거기 문제가 있다면, 그건 그 차이를 문제 삼는 행태가 바로 문제가 아닌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그 남다른 특징을 모두를 위해서 쓰고, 그런 모습에 모두 박수갈채를 하면, 그게 바로 아름다움이고 천국의 모습이 아닐까. 반면에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질시하고 윽발질러, 그 사람에게 다른 어떤 일을 시켜도 좋지만 노래만은 부르게 할 수 없다고 한다면, 혹은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노래를 나처럼 잘 부르게 되기 전에는 사람 대접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지옥의 모습이 아닐까.
다음 세상에 있다는 천국은 내 지혜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게 분명하니, 거기 들어가는 문제는 일단 하느님께 맡겨 놓을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 나름대로의 천국을 만들고 가꾸어 보는 게 다음 세상에서의 천국을 준비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해결할 문제가 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찾아서 해결하고, 주위에 박수쳐 감사하고 응원해야할 특별한 재주꾼들이 많다는 걸 은혜로 생각하고, 별 재주없이 박수만 잘 치는 사람에게도 박수 잘 친다고 박수를 보내다 보면 천국에 가까워지는 것 아닐까.
(2011년 7월)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명박박"이라는 꼼수 (0) | 2011.11.11 |
---|---|
"길(道)이라는 메타퍼" (0) | 2011.09.09 |
"각력(脚力)발전" (0) | 2011.07.26 |
"일기가성 명박상득" (0) | 2011.01.06 |
"습유(拾遺)"라는 직책 (0) | 2010.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