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길(道)이라는 메타퍼"

반빈(半賓) 2011. 9. 9. 19:32

"길(道)"이라는 메타퍼

 

동아시아의 사상전통에서 "()"은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하는 여러 학파와 다양한 사상의 전통이 모두 기꺼이 사용하는 용어이다.  선진(先秦)시대뿐 아니라, 한나라 후반에 중국으로 유입되어 철저하게 중국화의 과정을 거친 불교 역시 수련으로 얻는 높은 경지를 가리키는데 "()"이라는 용어를 차용한다.  따라서 그만큼 의미의 범위가 넓고 불확실하여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심지어 한 학파 안에서 사용된 용례도 서로 상충하는 듯한 상황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의 뜻과 이 말에 담은 은유적 가능성은 동아시아 사상전통의 이해를 위해 반드시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어려운만큼 그 의미를 깊이 깨달았을 때 우리들의 수양과 실천에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형규 ﷽﷽﷽﷽﷽﷽﷽﷽﷽ to talk about thatstripsts can we imagine from this unique pattern of rhyming? in.

이 글에서는 유가 did not get to talk about that(儒家)의 예를 들어 ""이라는 메타퍼의 의미를 보기로 한다.  유가의 중요한 경전인《중용中庸》은 제1장 첫부분에서 유가 가르침의 가장 높은 경지라고 할 ""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道也者,不可須臾離也,可離非道也。

길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잠시도 떠나면 안된다.  떠날 수 있으면 길이 아니다.

 

""에 대한 이 설명은 그 길이 우리에게서 가까운,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에 있음을 확인한다.  멀고 어려운 곳이어서 이르기 어려운 경지라면 잠시도 떠나면 안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논어論語》〈이인里仁〉편은 그러한 뜻과 상충하는 듯한 설명을 하고 있다.

 

子曰:「朝聞道,夕可死矣。」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침에 길에 대해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을 배워 알 수 있으면 바로 죽어도 헛되지 않다는 말이니, ""은 알고 실천하기 지극히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유가 전통의 핵심 경전인 《중용》과《논어》가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말로 ""을 설명하고 있으니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 수수께끼는 무슨 뜻이고, 거기서 우리는 무얼 찾아 알 수 있을까.

 

유가사상은 인식론적 낙관(epistemological optimism)에 근거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우리가 만나는 하나 하나의 상황이나 관계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는 것을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움은 그 ""이는 메타퍼에 담겨있다.  ""이 어려운 것은 그 위에서 만나는 하나 하나의 상황이나 문제가 해결할 수 없을만큼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길이 계속된다는 실천의 연속성에 있다.  다시 말해서, 늘 실천하면서 잠시라도 떠나지 말아야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 어려움인 것이다.  "완성"이란 개념을 상상할 수 없는 과정이니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이라는 메타퍼는 미래지향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목표를 향해 그 "" 위를 걸어가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늘 만나는 사람, 늘 마주하는 맥락 속에서 한 시각 한 시각을, 하루 하루를 잘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의 실천을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 역시 ""이라는 메타퍼에 합당하게 이해해야 한다.  ""을 그냥 "인자함", "사랑" 따위로 해석한다면 그건 유가 가르침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를테면 나는 ""의 영어번역으로 "혜택이나 덕()을 베푼다"는 뜻을 지닌 "benevolence"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유가사상의 형성기라고 할 수 있는 기원전 5-6 세기부터 기원전 2 세기까지의 지성사 맥락에서는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은 누가 누구에게 친절하게 혜택을 주는 게 절대로 아니다.  ""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합당한 행동의 내용과 방식이다.  ""에서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 합당하게 대하라는 것이 유가 가르침의 근본인데, 그 관계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매번 다를 수밖에 없다.  소위 "오륜(五倫)"은 사람 사이의 그러한 관계 중에 흔히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중요한 다섯가지를 고른 것으로, 부모와 자식(父子)의 관계, 임금과 신하(君臣)의 관계, 남편과 아내(夫婦)의 관계, 형과 아우(長幼)의 관계, 친구 사이(朋友)의 관계 등을 포함한다.  ""을 걸으며, 즉 우리의 생활 속에서, 늘 이 다섯 가지 관계를 만나게 되는데, 그 때 마다 그 관계에 합당하게 만나는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모두 ""의 세부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관계는 이 다섯가지를 훨씬 넘어서 아주 복잡하고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그 때마다 그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관계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의 실천이고, ""의 계속적인 실천이 ""이라는 메타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의 가장 적확한 번역은 "사람됨"이나 "사람다움" 정도이겠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 관계에 합당한 실천을 모두 모은 합집합을 "사람다움()"이라는 용어에 담은 것이다.  ""의 끝이 어디인지, 거기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은 어떤 목적지로 향하고 있지 않다.  그 길을 걷는 모습과 과정이 그 때 그 때 중요할 뿐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건 《논어》〈안연顔淵〉편의 첫귀절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淵問仁。子曰:「克己復禮。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仁由己,而由人乎哉。」淵曰:「請問其目。」子曰:「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淵曰:「回雖不敏,請事斯語矣。」

안연이 "사람다움(인仁)"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다움"이다.  하루동안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모두 "사람다움"으로 돌아온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자신()에게 달렸지, 남에게 달렸겠는가."  안연이 말했다.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영민하지 못하나, 이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이 대화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몇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는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담당하는 역할이다.  우선 "자신"은 극복의 대상이다.  자신을 극복하고 "()", 즉 관계에 합당한 덕목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사람다움"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주체 역시 "자신"이다.  다시 말해, "인간" "권리"를 행사하며, 권리가 유린되었을 때 자신의 권리가 유린되었음을 "주장(claim)"함으로써 권리를 찾고 행사하는 주체라는 자유주의 도덕철학의 기본전제와는 정반대에 있어, "자신"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억제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결국 "사람다움()"을 행하는 주체 또한 개개의 인간인 "자신"이다.  "사람답고자" 하는 동기의 부여에서부터, 내 자신을 중심으로 한 판단이 아닌 "사람다움"을 행하는 대상이 되는 사람과의 관계에 근거한 실천의 방법을 결정하는 것, 상대방의 행위나 반응에 좌우되지 않고 관계에 합당하게 그를 대하는 것까지, 이 모든 행위의 주체가 "자신"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다움"은 개념의 정의(定義)에서나 실천에서나 모두 "일방적"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천할 덕목이 이해되고 결정되기는 하지만, 상대방의 반응이나 자격과는 관계없이 "자신" "자신"을 절제하고 억제한다는 뜻에서 "일방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실천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면서 깊은 의미에서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모두 합당하게 하라는 가르침에서 "사람다움"의 철학이 "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의 철학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루를 그렇게 살면 천하가 "사람다움"으로 돌아온다는 공자의 말에서 확인된다.  문제는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같은 길을 걸으며 봐야 할지, 들어야 할지, 말해야 할지, 움직여야 할지를 결정하고 실천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천하의 사람들이 "사람다움"으로 돌아오게 하는 삶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이것이 ""이라는 메타퍼가 가지는 매력이면서 어려움이다.

 

어쩌면 유가사상이 ""이라는 메타퍼를 통해 우리들에게 아주 새롭고 긍적적인 "개인주의"를 제시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겠다.  "개인주의"를 남으로 인해 유린될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고 향유하겠다는 입장을 가장 앞세우는 사고나 행동의 방식이라고만 이해하면 그 개인주의는 사회의 평화와 행복을 저해할 가능성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개인의 권리는 서로 상충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 질서있게 대처하기 위해서 복잡한 규범과 법률을 만들어 사람들의 행동을 제한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권리가 상충함을 증명한다.  "개인의 권리(individual rights)", "인권"의 보호를 중시해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가치라고 믿으면서, 한편으로 "누구누구는 개인주의적이라"는 말이 그 사람에 대한 비판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재미있는 대조를 이루지 않는가.

 

이런 이유에서 유가사상이 ""이라는 메타퍼를 통해 제시하는 가르침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개인" 또는 "자신"을 극복의 대상이라고 보지만, 그 극복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도 바로 그 개인이다.  주체와 객체가 모두 "개인"뿐인 것이다.  이 새로운 정의(定義)의 개인주의는 가치의 상충이 없는 평화로운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서양 자유주의 도덕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개인주의와 근본적으로 달라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을 걸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과 평화롭고 적절한 관계를 실천하기 위해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걸 느껴 알고 실천하는 것도 자신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 그 가르침을 깊이 사색하고 늘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묻는다.

 

(20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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