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일기가성 명박상득"

반빈(半賓) 2011. 1. 6. 22:31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1년 1월 5일자에 실렸다고 합니다.]

 

 

"일기가성, 명박상득"

 

청와대가 새해를 내다보며일기가성’(一氣呵成)이라는 성어를 내놓았다. 마음이 서늘해지는 낙담을 느낀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사자성어가 유행한다. 연말연초에는 시의적절한 한자성어를 선택하고 사색하는 일이 약방의 감초 같은 이벤트가 됐다. <교수신문>이 한 해의 성어를 발표하면, 이제 그 소식이 중국의 매체에까지 소개된다.

 

<교수신문>이 발표한올해의 사자성어를 보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첫째, 교수들은 거의 매년 흔히 접할 수 없는 성어를 찾아낸다. 중국 고전문학과 사상사를 전공한 나조차도 출전이 막막한 경우가 많다. 2010년의 성어 역시 그랬다. “머리를 숨기기에 급급해 미처 꼬리를 감추지 못한다는 뜻의장두노미는 출전이 아주 편벽하다. 글자 뜻대로 해석하면 별로 틀릴 일이 없으니 어디서 본다고 해도 기억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꼭 출전을 알아야 할 필요도 별로 없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꼭 들어맞는 성어를 원나라 희곡의 노래가사라는 외진 구석에서 골라냈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둘째, 선택의 과정이 민주적이다. 여러 사람이 건의한 여러개의 성어를 바탕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선택한다고 한다. 더 민주적일 수 없을 정도이다. 적당한 성어를 찾을 여유와 능력이 되는 교수들이 골라낸 것을 후보에 올린다. 또 여러 교수가 투표를 해서 선택했다니 결국 자발적 참여라는 민주적 절차가 절묘한 선택의 뒷심이다.

 

이런 민주적인 절차의 또다른 형태가 누리꾼들의 지혜와 익살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이어쓰면서 한자 하나를 조금 비틀어서명박상득’, 명이 박하면(짧으면) 서로에게 득이라는 급조된 성어가 추천됐다. 자유롭게 이야기하도록 내버려두면 훌륭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힘있는 증거이다. 누리꾼이 만든 이 성어는 출전이 없어 고사성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게 무슨 대수랴. 출전이란 말 자체가 가방끈 긴 먹물들이 따지는 것 아닌가. 또 없긴 왜 없나. 21세기 첫 10년 한국의 사회상이 바로 출전이 아닌가.

 

그런 절차 없이 참모 몇 사람이 끙끙대며 고른 듯한 결과가일기가성이다. “어떤 일이 큰 숨 한 번 내쉬는 듯한 거칠 것 없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말하는 성어이다. 딴에는 나랏일을 일사불란하게 하겠다는 각오를 담은 듯하다. 이 선택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첫째,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성어는 명나라의 한 평론가가 두보의 시를 읽으면서 한숨에 이뤄진 느낌이지만 한 글자 한 글자가 다 적절하다는 뜻으로 썼다. 두보가 한숨에 이루리라는 생각으로 시를 썼다는 뜻이 아니다. 읽는 사람이 받는 느낌을 말했을 뿐이다. 이 성어는 나랏일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할 말이 아니다. 그 성어로 평가해줄지 말지는 국민들의 몫이다.

 

둘째, 오만하다. 시쓰기에서 성인의 품에 올랐다는 두보에게 지금 청와대의 능력과 마음을 비교하다니. 두보에게는 준비하고 공력을 쌓는 일이 처음이고 끝이었다. 책 만 권을 독파한 뒤에야 비로소 붓이 신명나게 움직이는 듯했다고(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 고백했다. 시어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은 뒤에도 포기하지 못한다며(語不驚人死不休) 한 글자 한 글자의 완성에 마음을 쏟았다. 청와대가 뒤도 옆도 무시하고 앞으로만 가려는 생각을 접고 두보처럼 힘써 공력을 쌓으면 훗날의 평가에일기가성이라는 표현이 쓰일지 모른다. 빨리 가면일기가성이 되리라는 건 처음부터 빗나간 생각이다.

 

셋째, 밋밋해서 재미가 없다. 중국 문학이나 예술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면 다 아는 평범한 구절을 골라다 놓고 무슨 심장한 결의를 하는 듯한 모습에 마음마저 차디차다. 참모 몇몇이 며칠을 끙끙대며 찾아낸 결과라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몸도 마음도 바쁜 연말에 참모에게 그런 책임을 주는 것은 졸병 한둘을 벌거벗긴 채로 전쟁터에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건 세금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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