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습유(拾遺)"라는 직책

반빈(半賓) 2010. 11. 10. 18:14

"습유(拾遺)"라는 직책

 

중국의 시인 두보(杜甫) "시성(詩聖)"이라고 불린다.  일생의 한가운데 안록산의 난을 겪은 기구한 삶, 그 난리통에 미관말직을 하며 산 가난한 삶의 번민을, 또 그 번민에 투영되는 나라의 쇠퇴를 보는 회한을 시에 담았고, 그 주옥같은 작품으로 깊이 사색했으니 참으로 두보의 삶에 걸맞는 칭호라고 하겠다.  두보는 또 사실(寫實)적인 태도로 시를 통해 시대의 참상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고 해서 "시사(詩史)"라고도 불린다.  "시성"이든 "시사", 모두 두보의 업적에 어울리는 적절한 칭호이다.  그러나 그런 칭호는 그의 시를 기려 훗날 세워진 중국문학사의 기념비일 뿐이다.  그런 칭호에 비하면 두보의 삶 속에서 실제로 사용된 이름표는 소박하기 그지없다.

 

() "자미(子美)"라고 한 건 논외로 치는 것이 좋겠다.  그건 이름() "()", "좋은 남자", "아름다운 남자"라는 뜻을 다른 표현에 다시 담아 자를 짓는 중국의 오랜 관습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이름표는 하나 같이 소박하다.  예를 들어 조상이 살던 곳의 지명을 따른 "두릉(杜陵)"이나 그 부근의 작은 언덕에 살았다는 사실을 담은 "소릉(少陵)"이 모두 그렇다.  이런 표현의 뒤에는 늘 출사를 하지 못한 미욱한 사람이라는 뜻의 "포의(布衣)", 한데에 사는 늙은이라는 뜻의  "야로(野老)" 등 자조에 가까운 자칭이 따랐다.  초라한 초가집에 살았다고 해서 붙인 "초당(草堂)"이라는 이름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공부(工部)의 원외랑(員外郞)이라는 6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했다는 연유로 붙여진 "공부"가 그 중 체면을 세운 칭호처럼 들리니, "시성"이나 "시사"라는 칭호와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그 중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름표가 "습유(拾遺)"이다.  "습유" "주울 습()" "남길 유()"이니 글자의 뜻대로 하면 "남긴 걸 줍는다"는 뜻인데, 당나라 때 관직의 하나이다.  문하성(門下省)에 속한 직책을 좌습유라고 하고, 중서성(中書省)에 속하면 우습유라고 했는데, 둘 다 그리 높은 직책이 아니어서 8품에 해당했다.  그런데 누가 무얼 남기길래 그걸 주우라고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이 직책은 참으로 장난이 아니었다.  임금이나 임금의 뜻을 담은 문서에 무언가 부족한 점, 빠뜨린 것이 있는지 살피고 그런 게 발견되면 고칠 수 있도록 지적해야하는 직책이었고, 그래서 "간관(諫官)"의 하나였다.  이 벼슬은 송()대에 이르러서는 "정언(正言)" 으로 개칭되었으니 바로 "바른 말을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습유" "Reminder"라고 번역한다.  임금이 빠뜨린 것, 잘못한 것을 찾아 일깨워 주는 직책이라는 뜻으로 상당히 합당한 번역이라고 평하고 싶다.

 

임금의 말이나 행동이 무언가가 부족하고 잘못될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직책이니 참 그런 제도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고, 나아가서는 부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어마어마한 책무를 겨우 8품에 해당하는 하급 벼슬아치의 어깨에 얹어놓았다는 걸 생각하면 실제로는 구색을 맞추려고 했을 뿐 정말로 "남긴 걸 찾아 주우라"는 뜻은 아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두보같은 충직한 사람이 그 직책을 맡게 되는 경우이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만든 제도라는 설명이 그에게 먹힐 리 없었겠기 때문이다.

 

두보는 상당한 곡절 끝에 좌습유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다.  안록사의 반란군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진입하는 상황이 되자 임금은 소위 "몽진(蒙塵)", 즉 피난을 하게 된다.  임금이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의 어휘로 표현한 걸 보아도 총총망망 떠난 황망한 길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실제로 너무 서둘러 떠난 피난길이라 많은 신하들이 임금의 몽진에 동행하지 못하고 장안에 남아있다가 안록산 반란군에게 붙들렸고, 그 중 작지 않은 수가 그 반란정부에서 직책을 맡기도 했다.  상당한 위협 아래 불가피하게 맡은 관직이라고 해도 그걸 응낙했다는 사실로 해서 지조나 기개를 의심받게 될 상황이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두보 역시 장안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두보가 안록산 아래서 벼슬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물론 그게 꼭 두보의 절개 때문이었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 때까지 두보는 정말로 하급의 관리에 불과했고, 안록산이 그에게 관심을 두어 데려다 억지로 관직을 맡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숙종이 즉위한 이듬해, 즉 지덕(至德) 2 (757)년에 이르러 피난 중인 당의 정부는 영무(靈武)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봉상(鳳翔)에 이르렀으니, 바로 오늘날의 섬서(陝西)성 봉상현이다.  이 때 두보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해 봉상으로 가서 당 정부에 합류했다.  전투지역을 통과해 임금이 있는 곳으로 간 충심을 인정받았는지, 두보는 그 피난정부에서 좌습유라는 벼슬을 받게 된 것이다.  8품에 불과한다고 해도, 그 벼슬을 받은 경위나 벼슬이 요구한 책무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

 

두보가 습유라는 직책을 그냥 조정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형식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무언가 임금이 떨어뜨리고 빠뜨린 것을 주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조정이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했다는 이유로 방관(房琯)을 처치하려 하자, 두보는 그것을 임금이 "남기는" 실수로 판단하고 주워 들었다.  사실 그 때의 조정은 전임 황제인 현종(玄宗)의 사람들과 재위하고 있는 숙종(肅宗)의 사람들 사이의 알력으로 긴장되어 있었고, 그래서 두보는 방관을 처치하려는 것이 패전의 책임을 묻기보다는 전임 황제의 사람을 제거한다는 새로 득세한 사람들의 의중에서였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방관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그게 임금의 심기를 거스렸는지, 두보는 그 일로 "습유"의 직책을 떠나있게 되었다.  좋은 말로 하면 긴 휴가를 얻은 것이고, 조금 나쁘게 이야기하면 직위해제가 되어 백수가 되었던 것이다.

 

숙종의 입장에서 볼 때는 충직한 신하를 잃은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중국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보가 벼슬을 잃어 생긴 그 시간을 이용해 가족들을 찾아 멀리 여행했고, 그 길에서 목격한 참담한 현실을 바탕으로 "북쪽으로 향한 여행(北征)"이라는 작품을 포함해 중국문학사의 기념비를 여럿 더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남긴 실수를 줍는 직책" "습유", 참으로 부러운 제도이다.  오늘날 우리 정부에 "습유"라는 자리가 있고, 그 자리를 두보와 같은 사람에게 주어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남기는 일을 줍는다"면 그건 어떤 일들일까?  작게는 정부가 바뀌었다고 임기가 멀쩡하게 남은 사람들을 몰아낸 걸 지적하고, 크게는 민의를 취합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긴 안목의 검토를 거절한 채 큰 강들을 파헤치는 걸 지적하지 않을까?  주울 것이 너무 많을테니 "왼쪽 습유(左拾遺)" 하나, "오른쪽 습유(右拾遺) 하나, 그렇게 둘만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지 않을까?  백 명, 천 명에 달하는 큰 무리의 습유가 필요한 건 아닐까?  대통령이 그들이 주워 올리는 자신과 정부의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고, 당나라 숙종처럼 습유들을 모조리 면직시킨다면 얼마나 많은 좋은 문학작품들이 만들어질까?

 

(20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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