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생생하게 살아계신 허세욱선생님"

반빈(半賓) 2010. 9. 24. 17:39

<에세이문학>이라는 수필전문 문예지의 청탁으로 지난 7월초 돌아가신 허세욱선생님을 추모하는 글을 또 하나 썼습니다.  2010년 가을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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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하게 살아계신 허세욱선생님"

 

    선생님께서 영면하시던 저녁 나는 빈소에서 입맛 소주를 많이 마셨다. 그냥 소주가 아니었다. 6 고문헌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으로 가는 길에 잠시 귀국해 전화로 인사를 드리면서 찾아뵙겠다고 했었다. 편치 않으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뵙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선생님께서는 오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은 와도 소주 같이 없으니, 회복한 다음 소주 있을 오라고 하셨다. 학회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고대병원에서 뵙게 되었을 때는 이미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잔을 나누는 고사하고 얼굴을 보며 흐느끼시는 모습에 메어 오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결국 그게 끝이었다. 그래서 병마를 툴툴 털고 소주 함께 하자던 약속은 어찌하고 이렇게 가시느냐며 원망과 사죄의 사이를 왕복하다 보니 연거푸 마시게 것이다. 말하자면 저녁 마신 소주가 아니라 회한이었다.

 

    그게 탈이었을까? 나는 그날 밤이 후회스럽다. 추모의 글을 쓰는 몫이라는 사모님의 말씀과 쓰려면 그냥오호통재(嗚呼痛哉)로만 가지 말고 가신님의 업적을 소개하라는 담당기자의 조언을 따라 덜컥 선생님을 기리는 글을 것이다. 경계를 허무는 이었다고 정리한 글이 그날 밤에는 그럴듯했다. 그러나 일간지 손바닥만한 지면에 선생님의 삶을 담는다거나 선생님의 발자취를 요약해 갈무리할 있다는 미욱한 생각까지 회한의 소주로 인한 술기운 때문이었던 듯하다. 대학에 들어가초급 중국어작문이라는 강의에서 처음 만난 40 가까운 세월을 제자로 따르는 동안 선생님께서 내게 주신 가르침과 응원은 아주 구체적이고 아주 생생한 모습이어서 갈무리해 어딘가 넣어 대상이 아니다.

 

    1986 가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불붙는 붉은 색으로 변하고 있는 떡갈나무 단풍을 따라 미국 동해안 지역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여행하는 길이라며 우리집에 들르셨다. 말하자면 망중한의 유람길이었지만, 마음 조마조마하게 하는 어리숙한 제자를 응원하는 일을 빼놓을 없으셨던 듯했다. 테니스도 치고, 공원에 가서 고기도 굽고, 저녁에는 모시고 술도 하며 오랜만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공부이야기도 많이 했다. 19세기 동광체(同光體) 연구하는 학위논문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아주 편벽한 주제였기에 소위국학 쇠퇴하면서 함께 무너져 내리는 중국 고전시가의 전통을 살리려 안간힘을 쓰던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작업이라고 설명드렸다. 말을 들으신 선생님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어색할 만큼의 시간이 흐른 비로소 입을 여셨다.

 

    지도교수 까오() 선생이 그걸 허락하던?”

 

선생님이 중국문학의 구석구석을 모두 섭렵하셨다는 확인되던 순간이었다. 사실 시도하는 자체가 무모하다고 생각될 만큼 어려운 주제였고, 그래서 연구가 되지 않은 채로 작품이 남아 있을 주석서조차 거의 없는 실정이었으니 심히 걱정이 되실 만했다. 지도교수가 논문 계획을 허락했다는 말은 능력을 대단히 신뢰하고 있거나 아니면 나를 아예 희망이 없는 학생으로 제껴 놓았다는 뜻일 텐데, 어느 쪽인지 판단이 되지 않으셨던 같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런 사실을 아셨다는 정말로 중국문학사의 구석구석을 모두 섭렵하고 읽으셨다는 뜻이었다. 어려운 주제네 아니라지도교수가 그걸 허락하던?하신 선생님의 반응에서 느낀 애틋한 애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전부터 추사 김정희의 한시를 연구하고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 과정에 희귀한 필사본에서 코골며 자는 사람에 대한 미움을 장편의 오언고시(五言古詩) 풀어낸 작품을 찾아 흥분 속에 즐거워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필사본은 어느 선비댁 사랑방 식객의 필체인 듯해서 읽을 없는 글자, 자신이 없는 구절이 여러 군데 있었다. 틀린 글자도 있고 지금은 쓰이지 않는 속자(俗字) 섞여 있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기댈 있는 선생님들은 이제 남아계시지 않는다. 102 510자를 모두 읽어내고 우리말 번역과 영어 번역의 초고를 준비한 선생님께 원본과 함께 보내드렸다. 잘못 읽은 글자나 이해가 부족한 구절이 있는지 검토해 달라는 숙제라고 말씀드리는 편지를 동봉했다. 보내 드린 자료를 받아 검토하셨을 시간이 지난 전화 드렸을 하신 말씀에는 선생님 특유의 등록상표가 찍혀 있었다.

 

     평생 숙제를 하면서 살았지만, 이것처럼 어려운 숙제는 처음이야.

 

간단한 말씀에서 나는 좋은 작품을 읽게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 일차 자료와 씨름하며 어려운 작업을 하는 모습이 뿌듯하다는 응원, 선생님도 자신 없는 부분이 있다는 솔직한 고백 등이 섞인 깊은 뜻을 읽을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신 , 선생님은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구먼 하며 껄껄 웃으셨다. 자조(自嘲) 자학(自虐) 등의 유머가 담긴 작품을 편애해 기호를 지적하신 것인데, 말씀에는 선생님의 입맛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기꺼운 수긍의 뜻이 담겨 있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공부와 관계된 일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를테면 선생님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군복무를 마치고 바로 출국해 계속 객지생활을 하면서부모가 살아 계시면 멀리 여행하지 않는다(父母在, 不遠遊)”는《논어(論語)<이인(里仁)> 편의 말씀조차 지키지 못한다는 부담을 마음에 안고 있다는 헤아려 주셨다. 90년대 중반 안식년을 서울에서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게 되었을 , 선생님은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자주 드나들어야 한다 하셨다. 마음을 편하게 주시려고 논어의 말씀을 조금 비트셨던 것이다. 그리곤 마디를 보태셨다.

 

 그래야 덕에 우리도 만날 있지 않겠나.”

 

    , 선친의 장례를 마치고 출국하면서 인사를 드리자, 그때 말씀을 기억하고 계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음을 고향에 묶어 끈이 끊어졌다고 느끼겠지만, 그래도 자주 와야 .”

 

나는아직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지 못했다. 그러던 지난 설날 전화로 세배를 드리자 저녁내기 탁구를 치러 오라고 하셨다. 승부에 관계없이 저녁은 제가 모시겠다고 하면서요즈음 생계가 그렇게 어려우시냐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럼, 퇴직한 벌써 10년인데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스승이 제자에게 자주 보고 싶다는 말씀을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런 기억들은 하나하나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직접 경험할 때도 그랬고, 나중에 추억 속에 기억할 때도 그렇다. 살아 있는 그러한 가르침을 요약해 갈무리하려 내가 미욱했다는 것은 돌아가시고 주가 지난 , 서재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생각해 보기 위해 댁에 갔을 더욱 분명해졌다. 선생님은 평소에 묵은 달력종이를 손바닥 정도의 크기로 반듯하게 잘라 놓으셨다가 강의나 집필을 위한 생각을 떠오를 마다 뒷면에 적어 두는 습관이 있으셨는데, 바로 거기서 병마에 고생하시던 마지막 순간의 육필 메모가 나온 것이다.

 

바람벽을 뚫고

마침내 팔을 잡았다

 

나는 아니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깊은 밤이었다

 

누군가여보 여보

아내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육신의 통증과 싸우고, 놓지 않으려 해도 자꾸 희미해지는 정신과 싸우시느라 그랬는지, 평소처럼 힘과 맵시가 함께 들어 있는 글씨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선생님 글씨에서 느껴 숨결이 물씬 풍겼다. 혼백을 모두 붙들고 병마와 싸우신 그냥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문학에 기대고 사모님께 기대신 분명했다. 그리고 순간은 오려 달력 종이 뒷면에 그대로 포착되어 영원히 살아남았다.

 

    선생님의 삶은 요약해서 갈무리할 없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하나씩 둘씩 계속 추구하는 과정에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게 간직하고 키워 나가는 노력은 살아남은 제자와 후학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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