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2)
"시하고 놀아요"
제목이 조금 엉뚱한가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제목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이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 보시지요. "시하고"는 "시와 함께"라는 뜻, 즉, 여기서 "하고"는 무슨 일을 함께하는 동반자를 나타내는 조사로 쓰였습니다. 어법 술어로 말하자면 부사격 조사입니다. 그러나 "시하고"는 또한 "시를 하고," 또는 "시를 하면서"라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고"는 원형이 "하다"인 동사로 들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등록된 어휘는 아닐 수 있지만 어쩌면 "시하다"를 "시를 하다"라는 동사로 읽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에 대해 내가 지적재산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뉴질랜드의 음악가 크리스토퍼 스몰은 20여 년 전 쓴 음악이론서에서 "musicking"이란 용어를 만들었고 제목으로도 사용했습니다. "음악(music)"이라는 명사에 동사의 기능을 더해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음악하기" 정도가 되겠지요. 스몰씨는 이 용어에 작곡이나 연주 뿐 아니라 음악을 들으면서도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담았습니다. 참 흥미로운 책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음악전공자가 아니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합니다. (Christopher Small, Musicking: The Meanings of Performing and Listening, Middletown: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8) "음악하기"가 가능하다면 "시하기"도 가능합니다. 가능할 뿐 아니라, 시를 즐기면서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넓은 영역의 활동을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시를 한다는 것은 시와 논다(遊)는 뜻도 되겠습니다. 그런 개념이 성립되기 위해서 시를 쓰고, 평론하고, 출판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시를 읽는 일반 독자들이 시를 가지고 하는 많은 활동이 포함되면 좋겠습니다. 시를 뚫어지라 들여다볼 수도 있고,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있고, 붓글씨로 써볼 수도 있고, 곡을 붙여 노래할 수도 있고, 들으며 강가나 호숫가를 거닐 수도 있겠습니다. 그림이라는 특별한 언어를 하시는 분들은 시를 읽고 일어나는 감흥을 그림으로 그려볼 수도 있겠습니다.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무언가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보아도 좋겠습니다.
고백부터 하지요. 이런 주장을 펴려는 것은 시가 대학의 학과과정에서 겪는 좌절이 뼈아플 정도로 심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를 전공하겠다는 대학원생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줄고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시를 가르치기 위해 개설하는 과목이 학부학생들에게 외면당하고, 그러다 보니 학교 행정 당국이 교육과정이나 예산배정의 심의에서 시에 관련된 과목을 홀대하는 정도가 매우 심각합니다. 어쩌면 시가 없어지거나, 살아 남는다고 해도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에서 소외되어 극히 일부 사람들의 마음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시가 공부할 가치가 있는지는 개인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과목을 개설해도 학생들이 외면한다는 건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류는 역사를 통해 슬프면 슬퍼서, 기쁘면 기뻐서 시를 찾았고, 무언가 기억해둘 것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에도 기억하기 위해서 시에 의지했습니다. 외로울 때 곁에 둘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시가 인류에게 위안을 주고 즐거움을 나누는 장터 같은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시를 지켰으면 하는 소망이 있기도 합니다. 그걸 소명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인지 슬픈 사실인지 모르나, 인생 황혼에 들어선 후 친구들 사이의 대화를 보면 시가 어느덧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생 나름대로의 삶을 열심히 살며 "시"의 "시옷"도 생각하지 않다가, 퇴직해 한가해질 나이가 되면 시가 친근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그러나 그게 꼭 시에 대한 축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실용"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시에 대한 홀대는 인생 다 살고 난 후에 다시 관심사가 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 정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만 해진 후에야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시가 삶에 직결된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가 인류의 역사에서 축복이었다는 주장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으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림도 그랬었다고 보입니다.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나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보이는 석기시대의 그림이 취미활동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명하기 어렵다고 해도 인류의 조상이 가졌던 삶에 대한 치열한 생각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을 것임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인류의 삶과 원천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활동을 뒷방에 버려 두어도 되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시를 홀대하는 사회의 시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 탄식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혹시 그렇게 되는 과정이 시를 아끼고 중시한 사람들에 의해 가속되고 더 심해지지는 않는지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시를 전공하는 사람들, 시에서 생계를 얻는 사람들은 시를 읽고, 이해하고, 감상하고, 분석하고, 나아가서 비평하는 대상이라고 규정하고, 그래서 시를 읽는 행위에서 마치 엄숙함과 치열함을 찾으려 합니다. 그런 태도를 다른 사람들이 시를 읽을 때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이름 붙여진 활동의 결과는 반복되는 시험을 통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 평가된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시하기가 결코 즐겁지 않게 되고 맙니다. 시가 일반 독자들에게서 점점 멀어진 것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옛말로 음유시인, 요샛말로는 싱어송라이터인 랜디 뉴먼(Randy Newman)의 노래가 이런 결과를 잘 보여줍니다. 유튜브에서 뉴먼이 직접 부르는 이 노래를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fH-2bD260o)
"Maybe I'm Doing It Wrong"
Maybe I'm doing it wrong
Maybe I'm doing it wrong
It just don't move me
The way that it should
Maybe I'm doing it wrong
There ain't no book you can read
There ain't nobody to tell you
But I don't think I'm getting
What everybody's getting
Maybe I'm doing it wrong
Sometimes I throw off a good one
At least I think it is
No, I know it is
But I shouldn't be thinking at all
I shouldn't be thinking at all
Maybe I'm doing it wrong
Maybe I'm doing it wrong
It just don't move me
The way that it should
Maybe I'm doing it wrong
"아마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내가 잘못하고 있은 것 같아요
내게 감동을 주어야 하는데
감동을 주지 않아요
아마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첫 연과 마지막 연에서 재미있는 문제점을 볼 수 있습니다. 내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건 시인데, 그게 "내 잘못"인 것 같다고 자신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시를 읽지만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경험이 계속되면서 주눅이 들고 만 독자의 당혹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셋째 연에서는 무언가 그럴 듯한 해석이 떠 올라도 그게 맞을 리 없으니 아예 생각이란 걸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시와 사람 사이의 관계가 서먹서먹함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무시와 소원함으로 움직여 가면 시에는 희망이 없어집니다. "시하고 놀자"는 주장을 하는 이유입니다.
미국의 현대시인 중 영향력이 있고 사랑을 받는 윌리엄 까를로스 윌리엄즈(William Carlos Williams)의 시 한 수를 읽고 시하고 놀아 보시지요.
"This is Just to Say"
I have eaten
the plums
that were in
the icebox
and which
you were probably
saving
for breakfast
Forgive me
they were delicious
so sweet
and so cold
이 작품은 영어와 우리말의 어순이 달라서 잘 번역이 되지 않습니다. 평이한 영어이니 한 번 읽어보시고, 제 번역도 평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씀 드리려는 건 단지"
내가
아이스박스에 있던
자두를
먹어버렸다는 것
그건
아마 당신이
내일 아침으로 드시려고
잘 보관하고 있었겠다는 것
참 달고
참 시원해
맛있게 먹었으니
용서하시라는 것 뿐입니다
이 짧은 작품을 보고 우선 이 작품이 행과 연을 나누지 않고 그냥
"말씀 드리려는 건 단지 내가 아이스박스에 있던 자두를 먹어버렸다는 것, 그건 아마 당신이 내일 아침으로 드시려고 잘 보관하고 있었겠다는 것, 참 달고 참 시원해 맛있게 먹었으니 용서하시라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되어있다면 그걸 읽는 내 반응이 달라질까, 달라진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질문해 보았습니다. 행과 연을 이어 쓰고, 구두점 몇 개를 더했을 뿐 있는 말을 같은 순서로 모두 옮겼으니 내용이 그리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시인은 왜 행을 나누고 연을 나누었을까 다시 묻게 되겠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행과 연을 나누어 배치하여 이건 "내가 당신이 넣어둔 자두를 먹었다"고 포스트잇에 써서 냉장고 문에 붙여두는 메모가 아니고, 시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시라고 생각하고 읽어보라는 권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하고 놀아요"라는 초대장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시하고 놀까요? 한번 해보세요. 나는 우선 몇 번 소리내 읽었습니다. 행이 자주 바뀌어 그런지 조금 천천히 읽게 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천천히 읽으니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는 일인칭 화자가 아마 부인으로 생각되는 이인칭으로 등장하는 독자에게 하는 말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읽을 때와 내가 읽을 때 이 시의 내용이 어떻게 다를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번 놀이에서는 전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를 찾아보았습니다. 별 고민없이 "용서"를 골랐습니다. 단어 본래의 뜻과 이 시에서 담고 있는 뜻과의 사이의 거리가 가장 멀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스스럼없이 표시하는 사랑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내일 아침 먹으려고 보관해 둔 자두를 먹은 걸 용서하라고 한 게 아니라, 참 맛있게 먹은 걸 용서하라고 하고 있으니, 그 스스럼없는 사랑의 표현은 익살에 가깝습니다. 부인은 이 작품을 읽으며 짜증을 냈을까, 웃었을까, 그럴 줄 알았다고 했을까, 아니면 당신 드시라고 거기 넣어둔 거라 했을까. 나는 "용서"에서 익살을 읽었지만, 부인도 그랬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시하고 놀기"는 내 머리 속, 가슴 속에서 계속되는 것 같았습니다. 맛이 오래 지속되는 작품이니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윌리엄 까를로스 윌리엄즈의 이 짧은 시를 가지고 여러분들은 어찌 노실지 궁금합니다.
(2021.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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