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1)
"시는 무엇이고 어떻게 읽나요?"
시를 읽는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써서 올려보라는 학장님의 분부에 가까운 권유에 못이기는 척하고 글을 써 올리기로 했습니다. 학장님은 편박사님 음악이야기를 배워 매일 하나씩 올리라고 하셨지만, 일주일에 하나 정도가 좋을 것 같아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정도의 제목으로 시작해 보기로 합니다. 서양음악사를 꿰뚫고 계신 듯한 편박사님처럼 아는 게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미국에 산다는 이유로 백수 자격이 무한정 보류된 처지라 매일 글을 하나 더 쓴다는 게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시를 공부하며 살고 있지만 돌이켜 보면 엉뚱하게 들어선 길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동시 몇 수 잘 썼다고 상도 받고 칭찬도 들은 후 그 의미를 제멋대로 해석해 시를 읽고 쓰는 데 하느님이 주신 재주가 있다고 생각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눈물의 씨앗이었는지, 풍요로운 인생 여정의 시작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중에 천체물리학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외교관이 되면 어떨까 궁리해 보기도 했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별 번민없이 계속 시를 공부하며 살아온 셈입니다.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까지 낳아 길렀다는 게 신기합니다. 평생을 시와 함께 살았으니 크고 작은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께 내놓고 들려드릴 이야기를 찾아보니 또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재미있으면 재미있다고 해 주시고, 별 재미 없으면 그냥 지나치시든지, 아니면 솔직하게 "됐다, 고마해라" 그렇게 말씀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여러 해 전의 일이지만,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시에 대한 일반론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구글검색을 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영어와 중국어로 검색한 결과까지 보태니 시의 정의(定義)라는 설명이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다른 설명이 있다는 말을 붙들고 고민해 보니, 어쩌면 시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게 아예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시가 무엇인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인생경험에서 시라는 게 있다고 어렴풋하게라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도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 전경자시인이란 분의 시집을 소개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조그만 시집에서 시가 살아남아서 우리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이유를 본다. 시는 특별한 생각과 그 생각을 담아내는 적절한 언어가 만나서 생기는데, 시의 감동은 그 적절한 언어로 해서 시인의 특별한 생각이 너도 나도 함께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생각으로 다가올 때 일어난다. 전경자시인의 시는 섬세한 눈과 열어놓은 마음으로 삶을 관조하며 얻은 참 귀한 생각을 누구나 즉시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태연스럽게." 그 짧은 소개의 글에서 나는 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셀 수 없이 많은 대답에 하나를 보탰습니다. 시인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생각이나 관찰, 행동이 적절한 말로 그걸 풀어낼 수 있는 시인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 독자들 안에서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때, 그에 관련된 메카니즘을 모두 일컬어 시라고 한다는 내 나름대로의 정의입니다. 정리하면 특별한 생각, 적절한 언어, 공감의 가능성이라는 세 가지 요인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바로 반문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읽는 시의 언어는 전혀 적절해 보이지가 않지요? 무슨 말인지 어렵기만 하고?" 그건 공평하고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사용되는 언어가 적절하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있는 경우를 많은 시에서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비판적인 반문에 대해 우선 쉽게 두 가지 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첫째,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처럼, 시는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정의가 모든 시를 다 만족시킬 수 없을 겁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뚜우푸(杜甫)는 "사용하는 시어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쉴 수 없다 (語不驚人死不休)"고 말했습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언어와 적절해서 특별한 생각이 나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생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언어와의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언어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겠습니다. 주제에 따라, 전달하려는 느낌이나 이야기에 따라, 심지어는 읽는 사람의 나이나 읽을 때의 기분에 따라 이 쪽이 좋을 수도 있고 저쪽이 좋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이 두가지 언어의 사용이 모두 독자의 수용이나 반응을 전제한다는 사실입니다. 놀라는 것도 독자가 놀라야 놀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아무리 놀라게 하려 해도 독자가 놀라지 않으면 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적절한 언어로 표현된 특별한 생각을 독자가 수용할 때 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읽는 사람은 내가 시를 읽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해 왔는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미당 서정주선생이 미국 여행을 할 때 어떤 교민이 평소 존경해 왔다면서 저녁을 모셨다는 일화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저녁을 함께 하면서 좋아하시는 내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국화 옆에서"라고 대답했답니다. 서정주라는 시인이 있고 상당히 유명하다는 건 알았지만 학생 때 교과서에서 읽은 것 외에 한 수도 읽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정말 존경한 것인지, 아니면 서정주선생 저녁을 모셨다는 훈장을 갖고 싶어한 것인지 묻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를 읽을 때, 그 시의 언어가 그리 적절한 언어라고 생각되지 않을 때, 놀라게 하려고 쓴 언어가 놀랍지 않을 때, 그럼 나는 시의 언어를 가지고 잘 놀 수 있기 위해서 무얼 어떻게 해 왔는지를 돌이켜볼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가만히 있을 테니 시인 네가 내게 와서 내 입맛대로 나를 만족시켜라, 뭐 그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 시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겁니다. 시를 난해하게 쓰는 사람을 변호하자는 게 아니라, 읽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준비운동을 해 두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에 언급한 전경자시인의 "아무리 아니라 하여도 혹시나 그리움 아닌가"라는 시집에는 다음과 같은 단 세 줄의 짧은 시가 있습니다.
"실직자"
교통정보 방영을
골똘히 시청하는
갈 데 없는 사람
이 시를 읽고 좋은 시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나는 참 재미있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이라는 연재에서 거론하는 첫째 작품으로 고르지 않았겠지요.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가지는 첫번째 질문은 대부분 "이게 무슨 뜻이지?"인 듯합니다. 물론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시작해서 이 질문으로 끝나면 그 시 읽기는 시인이 이 시를 쓰면서 가졌던 생각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혹시 "이 시는 내게 무얼 하고 있지? 무슨 영향을 주고 있지?"라는 질문으로 한 걸음 더 내 딛으면 그 시 읽기는 시인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읽는 사람이 자신을 들여다 보는 과정으로 옮겨갈 수 있고, 그를 통해 시 읽기라는 활동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공감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앞에 소개한 "실직자"라는 시를 읽으면서, 정말로 무언가 하고 싶은데 교통정보를 경청해야 할 정도로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는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둘러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연락해서 냉면이라도 한 그릇 같이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공감의 실현도 시라고 지칭하는 활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주장합니다.
전경자시인의 시를 한 수 더 소개하면서 첫 꼭지를 마칩니다. 이 시가 무슨 뜻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가 내게 무엇을 하는지에 관심을 가져 보시길 권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시를 두 번 읽는다면 두 번의 읽기에서 얻는 대답이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 재미있게 감상하고 공감하세요.
"사촌 언니"
청계천 딸라장수 사촌언니는
평생 처음 와본
공항에서
눈물까지 보이며 우물거리다
접고 또 접은 백불짜리를
내 손에 꼬옥 쥐어준다
뭐가 그리 서럽고 뭐가 그리 좋은지
평생 처음 와본
창공에서
주위사람 몰라라 펑펑 울면서
사촌언니를
생각한다
(202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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