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이야기 #2: "수직경험(Vertical Experience)"
가을이 깊어가던 지난 시월, 로스앤젤레스까지 자동차로 여행을 하면서 치코라는 곳에서 하루 저녁을 지냈다. 나 사는 곳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는 길을 재촉해 열 대여섯 시간을 내리 운전한다면 하루에 다다를 수도 있는 거리이다. 그러나 그건 젊어 힘이 넘치던 시절에나 어울리는 일, 어디선가 하루를 지내고 가는 게 지금의 내 처지에 어울리는 무리없는 일정으로 보였다. 어디서 하루를 쉬고 갈 것인지를 정하는 일이 있었을 뿐, 하루에 내쳐 간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여행일정을 정하는 방법은 대개 둘 뿐이다. 특별한 이유나 사정이 없을 땐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가면서 해 떨어질 때쯤 적당히 잠자리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빠듯한 일정을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단지 어디서 어떻게 자게 될지 모르는 채 여행을 떠난다는 부담이 조금 있게 마련이고, 경우에 따라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낭패를 보는 수도 없지는 않다. 언젠가 캐나다에서 프린스턴까지 내려왔던 여행길이 바로 그랬다. 미국 북동쪽 끝 메인주에 있는 아르케디아 공원이 아름답다고 해서 거기 어디쯤 에서 하루 저녁 머무리르라고 생각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움직이니 끝이 없어 보이는 깊은 수풀이 참으로 좋았다. 그런데 저녁 늦은 시간에 근처에 도착해 보니 적당한 잠자리가 없었다. 숙박시설은 모두 예약이 된 후여서 도시 두 개를 되돌아 나와야 했다. 겨우 모텔을 하나 찾고 나니 벌써 새벽 두 시가 되었다. 아예 대책없이 그렇게 하기로 작정한 여행이었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두 아이가 어릴 때여서 고생이 되긴 했지만 지나고 나면 그런 것도 모두 추억이다.
계획을 좀 세워야 하는 여행도 있기 마련이다. 우선 지나는 길 부근에 어디 재미있는 곳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하고, 필요에 따라 예약을 해야한다. 좋은 구경도 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미리 확보할 수는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꽉 짜인 일정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게 부담이다. 지난 시월의 여행을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근처에 쉬어갈만한 좋은 곳이 많이 있다. 예컨대 애쉴랜드는 일부러라도 가 며칠 머무를만한 곳이다. 우선 오레곤주 남부, 그러니까 캘리포니아주와의 경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안성맞춤이다. 셰익스피어연극으로 유명해서, 늘 공연이 여럿 있으니 미리 레파토리를 알아보고 표도 구해둔 후 하루 저녁을 쉬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렇게 세부사항을 찬찬히 준비하고 그 실행을 위해 착착 움직이자면 즐거움을 상쇄하고도 넘칠 부담이 따른다.
그렇다고 치코가 그냥 가다보니 해떨어질 때쯤 발길이 다다른 곳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잠자리를 예약하는 등 부산을 떨지는 않았지만, 치코까지 가리라는 건 미리 작정을 했다. 치코라는 동네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거기서 하루 저녁을 지냈다고 하면 왜 하필 그런 깡촌이냐고 묻는 친구들도 있었다. 캘리포니아 북부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로 별로 볼 게 없는데다가, 오레곤과 캘리포니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5번 고속도로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야 하니 서둘러야 하는 긴 여행의 첫 기착지로는 그리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다. 날이 밝으면 되돌아와야 하는 길을 자청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딱 하나 뿐이었다. 거기에는 시에라 네바다라는 맥주양조장이 있다.
시에라 네바다라는 양조장은 소위 "프레미엄" 맥주를 생산하는 소형 양조장(micro-brewery) 치고는 상당히 잘 알려져 있고 규모도 커서 거기서 생산되는 맥주는 미국 각지의 왠만한 수퍼마켓에서 찾을 수 있다. 내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맥주를 고르라고 하면 기꺼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좋은 맥주의 한두 종류가 바로 거기서 생산된다. 조금 오버한다면 맥주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순례의 의미가 있지 않느냐고 우겨볼만한 곳이다.
5번 고속도로를 벗어나니 길이 좁고 가로등도 별로 없어 기듯 걷듯 찾아가며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그날 저녁의 즐거움에 비하면 그 정도의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여기 보이는 생맥주 꼭지가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다. 물론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두세 잔 마시면 취할 정도로 알코홀 농도가 높으니 하루 저녁 지내고 가는 여행객에게는 종류의 많고 적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한두 가지 좋은 게 있으면 그만이다. 기호가 사람마다 다르니 꼭 한가지를 골라 제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내 입맛을 기준으로 한다면 맨 오른쪽에 보이는 셀레브레이션 에일은 최고 맥주의 반열에 올리기에 자격이 차고 넘친다. 나는 맥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걸 모르면서 맥주를 안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계절맥주(seasonal beer)이기 때문에 늦가을부터 두어 달 수퍼마켓에 나왔다간 사라진다. 또 일년을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을 남기면서 작별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내 주위의 술친구 중에는 이 녀석을 사재기 하는 사람이 많다. 성탄절 부근에 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서너 케이스를 사서 지하실 시원한 곳에 보관하고 일년 내내 야금야금 꺼내 먹는 맛이 그만이다.
양조장에서 직영하는 음식점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걸 순례객의 마음이라고 하면 조금 오버이겠지만,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시월이라 아직 조금 이르긴 했지만, 웨이터에게 올해 셀레브레이션 에일은 언제쯤 출고되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물으면서도 바로 그럼 작년 것을 맛볼 수 있느냐고 물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가 도착한 바로 그날이 2011년 셀레브레이션 에일이 출고된 날이라고 했고, 물론 주문이 가능하다고 했다. 싱숭생숭 들떴던 기분이 날으는 듯 고조되었다. 바로 이 녀석들이다.
사실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늦가을은 참 즐거운 시간이다. 맥주양조장 마다 자신들이 정성들여 빚은 겨울맥주를 앞다투듯 소개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조금씩 사다가 맛을 본다. 올해 나온 걸 서로 비교해 볼 뿐 아니라 작년의 맛과도 비교한다. 물론 작년에 마신 맥주맛을 혀끝이 기억할 수 없으니 과거와의 비교는 결국 올해 나온 맥주의 맛에 대한 평가와 다르지 않다. 작년에도 별로였는데, 올해도 역시 이건 아니라는 둥, 역시 이 양조장 맥주가 그만이라는 둥, 어어 작년에 비해 월등히 좋아 하며 감탄을 하는 둥, 가을의 한 중간부터는 올 겨울 마실 맥주를 정하느라 즐겁게 분주하다.
시에라 네바다 셀레브레이션 에일 역시 많은 겨울맥주의 하나로 출고될 따름이다. 그러나 판매전략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해마다 호프(hop)나 효모(yeast)의 배합과 첨가시기를 달리해 맛에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애주가들의 기다림이 남다르다. 그런 심리를 더욱 자극하기 위해서인지 셀레브레이션 에일은 맥주병에 생산년도를 명기하고 레이블의 디자인도 매년 조금씩 바꾼다. 자동차에 2010년식이라느니, 2011년식이라느니 생산년도가 따라 붙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 동네의 술 가게에서는 매년 셀레브레이션 에일이 출고되기를 기다려 확보하고 있던 지난 4-5년치와 함께 파는 이벤트를 한다. 신문에 광고도 내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행사여서 많은 맥주애호가들로 붐빈다. 5년치 셀레브레이션 에일의 맥주통을 나란히 걸어 놓고 조금씩 맛을 보면서 품평하고,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워한다. 그게 바로 "수직경험"이다. 꼭 시간이 수직선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서 위로 흐른다고 보는 건 아니지만, 지난 몇 년의 맥주를 한꺼번에 쌓아놓고 맛을 본다는 뜻이겠다.
제일 오래된 건 5-6년 동안이나 보관되었으니 수직경험을 위해 지불해야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런 분위기를 몇 년 경험하면서 살다보니 "수직경험"은 꼭 술가게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사재기한 셀레브레이션은 늘 아껴 마셨고, 어느새 우리집 지하실에 5년치 셀레브레이션 에일이 보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12월 초순 가까운 술친구 부부를 불렀다.
말하자면 부산을 떤 것이지만, 그럴만하지 않은가. 보시다시피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맥주를 늘어놓는 술상을 차릴 수 있었던 게 뿌듯했다. 그날 저녁의 수직경험은 또한 2007년분의 은퇴식이었다. 2008년분은 아직 상당히 있으니 내후년쯤에는 6년치를 늘어놓을 수 있겠다.
먹자고 사는 세상, 마시자고 사는 세상, 이렇게 부산을 떨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갈무리한 5년치 셀레브레이션 에일을 한 줄로 세워놓고 마셨으니 말하자면 수평경험을 한 셈이다. 레이블을 가리고 제일 좋은 순서대로 배열해보자 했다. 미묘한 차이었지만 새 것일수록 더 좋다는 게 거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아무튼 수평이라도 좋고, 수직이라도 좋았다. 다섯가지 모두 참 좋은 맛이었다.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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