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이야기 #1: "진짜 맥주"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얻어들은 우스개소리 한 마디로 맥주이야기를 시작하자. 세상의 주요 맥주회사 사장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아침 내내 회의를 하고 나서 점심 시간이 되자 그 사장들은 모두 근처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장 한 사람이 점심을 시키면서 서둘러 말했다.
"왜 있지? 로키산맥 눈이 녹아들었다 솟아나오는 샘물로 빚은 세계 최고의 맥주, 쿠어스, 그거 한 잔 줘."
두번째 사장 역시 질세라 앞다투어 이렇게 주문했다.
"거 있쟎아, '아! 우리는 잊지 못해, 버드와이저.' 물론 그걸로 해야지."
세번째 사장의 말엔 냉소하는 태도가 들어있었다.
"무슨 소리들을 하는지 모르겠구먼. 난 물론, "Great Taste, Miller Lite," 바로 그거야."
그러는 사이에 아일랜드에서 온 기니스 맥주회사의 사장이 주문할 차례가 되었다. 그 사람은 샌드위치와 코카콜라 한 잔을 주문했다. 사람들이 당신은 맥주를 마시지 않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명했다.
"맥주회사 사장인데 어떻게 맥주를 마시지 않을 수 있겠어요?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오늘 점심은 아무도 맥주를 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 나도 그냥 콜라를 마시기로 한 겁니다. 나만 맥주를 시키기가 민망해서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맥주라고 다 맥주가 아니다. 나 역시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마신, 지금 생각하면 맥주라고 불러주어야 하는지 그리 내키지 않는 맥주가 얼마인지 모른다. 70년대 생맥주가 유행하던 때, 명동에선 오비스 캐빈이라는 대형 주점에서 양희은, 송창식 같은 가수들이 통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를 안주삼아, 무교동에서는 오비선장이니 그린골드니 하는 생맥주집에서 그 때 유행하던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들의 친절한 미소를 즐기며, 그렇게 퍼마신 맥주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타이완에서 유학하던 시절에는 "타이완 피이지어우"—중국어로는 맥주를 "피이지어우 啤酒"라고 한다—를 "타이피이"라고 간편하게 줄여 부르면서 수도 없이 마셨고, 미국에 온 후에도 쿠어스니 미켈럽이니 하는 걸 맥주라고 생각하고 마셨다. 물론 어쨌든 분명히 마시면 취하는 술이었고, 마실 때 기분이 좋았으니 지금에 와서 불평을 하는 게 그리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느 프로 기사가 바둑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두어도 한 판의 바둑"이라고 하듯, 그냥 그런 걸 맥주로 치고 마시며 살아도 하나의 인생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포틀랜드까지 흘러와 살게 되었고, 와보니 여기가 마침 세상 맥주의 참피언이라고 해도 좋을 곳이다. (물론 이 사실 조차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뿐 아니라 내가 와서 산 지난 이 십여 년의 세월이 바로 이곳의 소형맥주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어쩌면 나 자신도 그 문화의 형성에 한 몫을 한 건 아닌지 모른다.
어쨌든 나는 포틀랜드의 많은 소형 양조장에서 생산한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지난 세월 맥주라고 생각하면서 밋밋한 맥주를 그렇게 달고 살았다는 게 꼭 인생을 속아 산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좋다고 생각했으니 당연히 가끔 다녀가는 친구들에게 소개했고, 그 친구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이렇게 긴 세월을 속아 살아왔는지 모르겠다고 억울해 했다. 물론 맥주는 기호품이니 사람마다 입맛이 다를 수 있다. 오비맥주, 하이트맥주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걸 탓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기호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다른 선택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기호라면 문제라 할 수 있다. 갖가지 종류가 골고루 갖추어져 나의 기호를 테스트하면서 확인할 수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우선 이 글에서 거론한 맥주는 기니스 하나만 빼면 모두 "라거"맥주라는 점이 문제다. 물론 라거맥주에도 참 좋은 게 많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맥주는 라거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밋밋하다. "오비라거"라고 아예 상품명에 "라거"를 넣은 맥주도 라거의 깨끗하고 짜릿한 맛을 전하지 못한다. 언제부터인지 맥주가 소주나 양주를 섞어 마시는 폭탄주 제조재료로 전락한 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심지어 얼마전부터 서울시내 몇 곳에 생기기 시작한 "유럽식" 맥주를 직접 양조해서 제공한다는 음식점의 맥주도 크게 분류하면 거의 모두 라거에 속한다.
맥주는 크게 나누어 라거(lagers)와 에일(ales)의 두 종류로 나뉜다. 물론 양조방법의 차이인데, 그건 우선 사용하는 효모(yeast)의 차이에서 시작한다. 에일을 양조할 때 사용하는 효모는 표면 근처로 떠올라 발효하고, 라거의 효모는 가라앉아 발효한다. 에일의 효모는 발효되는 온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그래서 발효가 끝난 후 숙성시키는 기간이 짧다. 반면 라거는 저온에서 몇 달을 숙성시키야 한다. 그래서 라거는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색이 맑고 깨끗하다.
"둥켈(Dunkel)"이라는 색이 비교적 짙은 맥주, 체코지역에서 발전되어 톡 쏘는 맛으로 유명한 "필스너(Pilsner)", 맥아의 양을 늘리면서 생겨난 달콤한 맛을 쌉쌀한 호프의 맛으로 균형을 잡은 "바크(Bock)" 등이 모두 라거에 속한다. 하이네켄, 벡스, 스텔라 아르투아, 필스너 어르퀠 등이 잘 알려진 라거맥주이다.
맥주의 재미는 에일을 두루 맛본 후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두루" 맛본다는 게 말은 쉬워도 사실 장난이 아니다. 종류가 무척 많기 때문이다. 우선 조금 크게 분류해 보면 "에일"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맥주뿐 아니라, "포터(Porter)"와 "스타우트(Stout)"도 에일에 속하는 맥주이다. 포터는 색과 맛이 아주 짙으면서, 쌉쌀하다기 보다는 구수한 맛의 맥주이고, 스타우트는 색이 짙다 못해 불투명에 가까우면서 크림처럼 부드러운 맥주이다. 에일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높은 온도에서 발효하는 효모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효와 숙성의 시간이 짧다. 그래서 맥아를 볶는 정도나 방법, 어떤 호프를 어떻게 배합해서 첨가하는지 등에 따라 아주 복잡하고 미세하게 분류된다. 예를 들어, 첨가하는 호프의 품종도 중요하지만, 호프를 말려 사용하느냐, 아니면 수확한 싱싱한 호프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맛이 아주 다르다.
에일의 이름에는 색깔을 나타내는 단어가 많이 들어있다. 예를 들자면, "앰버에일(Amber Ale)"은 활활타는 장작불 속의 달아오른 잿빛, "카퍼에일(Copper Ale)"은 구리색, "브라운에일(Brown Ale)"은 갈색, "레드에일(Red Ale)"은 물론 붉은 색이다. "너트브라운에일(Nut Brown Ale)" 같은 이름은 분명 색깔이기는 하지만 이 이름이 붙은 맥주의 색은 양조장에 따라 상당히 큰 폭으로 다르다. 에일의 색과 맛 사이에 일정한 원칙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색이 짙다고 해서 에일이 더 쌉쌀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에일 중 특기할만한 건 "페일에일(Pale Ale)"이라는 종류이다. 페일이라는 단어가 붙었다고 해서 "창백하다"는 느낌의 색깔과 연결시킬 필요도 없고, 맛이 밋밋할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더욱 없다. 페일에일은 맥아를 볶을 때 장작불 대신 석탄불을 사용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장작보다 조절하기 쉬운 화력 덕분에 색과 맛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고, 그래서 에일 맥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맥주의 종류라고 할 수 있다. 페일에일의 한 종류로 "인디아 페일에일 (India Pale Ale)"이 있는데, 줄여서 IPA라고 부른다. 내 개인적인 기호로 말한다면 제일 만족스러운 맥주이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는 경우, 잘모르는 현지의 맥주 중 한둘을 골라야 한다면 우선 아이피에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본다. 이 종류는 식민지였던 인도에 보내기 위해 영국에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기온차 때문인지 현지에서 맥주를 양조할 수 없었고, 영국에서 만들어 보내려니 적도를 지나면서 부패해 마실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패를 피하기 위해 많은 양의 호프를 넣었고, 그 결과 생겨난 아주 쓴 맥주가 바로 아이피에이이다. 이 맥주를 가득 싣고 영국을 떠난 배가 항구를 나서기 무섭게 큰 파도에 휩쓸려 회항하는 사고가 생기고, 그래서 싣고 있던 맥주가 영국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아이피에이가 맥주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집 지하실에 저장되어 있는 맥주 중에서 IPA를 몇 개 골라보았다.
포틀랜드 근처에는 지금 약 100개의 소형 맥주 양조장이 있다. 한 양조장에서 라거 한두 종류, 에일 두세 종류, 포터, 거기에 계절 맥주 한 두 종류가 나온다고 하면 최소한 5-600 종류의 맥주가 동네 근처에서 생산된다. 하루에 한 종류씩 마신다고 해도 다 맛을 보려면 한 2년 걸린다는 계산이다. 물론 조금 규모가 큰 양조장에서는 10여 종의 맥주가 나온는게 보통이다. 그래서 두루 맛본다는 건 어쩌면 끝이 없는 과정이라고 하는 게 적당하다. 이렇게 이야기해서 마치 그게 고난의 과정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물론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나 하나하나가 즐거움이다. 그러나 한 삼십년을 맥주아닌 맥주를 마시며 그게 맥주인줄 알았다는 생각을 하면 장난스러운 회한이 없는 건 아니다.
앞에 이야기 했지만, 결국은 기호의 문제이다. 물론 자신의 기호를 한두 가지로 제한 할 필요는 더욱 없다. 그러나 맥주의 분류방법에 더하여 선택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지수가 상당히 있다. 그중 내가 제일 먼저 참고하는 게 바로 IBU라는 지수이다. International Bitterness Unit를 줄인 말로, 쌉쌀한 정도를 정량적으로 평가하여 1부터 100까지의 숫자를 매긴 게 이 지수인데, 100은 이론적으로는 이 이상 더 쌉쌀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에일의 경우 4-50정도의 IBU이면 만족할 만큼 쌉쌀하다. 75정도까지 올라가면 아주 만족스럽다. 그러나 만족의 추구는 끝을 모른다.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요즈음엔 "100+", "102"라고 IBU를 표기한 맥주가 눈에 띄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가짜 맥주도 많았지만, 진짜 맥주는 더욱 많다. 기회를 만들어 하나하나 시음하면서 내게 제일 진짜인 맥주는 어떤 것인지 찾아보기 바란다.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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