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날 돼지꿈"
섣달 그믐날 돼지꿈을 꾸면 그 아침 솟아오를 새해에 재물운이 있다고들 한다. 새해벽두에 하필이면 상서롭지 못한 돼지가 꿈에 나타나냐는 불만을 위로할 작정으로 꾸며낸 극적인 반전인지, 아니면 통통하게 살진 모습이 정말로 복스러워 재물의 형상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을 그런 이야기에 담은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돼지꿈 꾸셨습니까?"하는 말이 듣기좋은 새해인사가 된지 오래다. 임진년이니 용의 해이지만 나는 늘 그랬듯이 돼지꿈 꾸었느냐고 새해인사를 할 작정이다.
사실은 나도 한 번 꾸어보고 싶은 게 바로 그 꿈이다. 뭐 꼭 재물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건 아니다. 생각나면 목을 축일 좋은 술을 지니고 살면서 또 재물을 탐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믐날 꿈에 돼지를 한 번 보는 것은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섣달이면 늘 한두 번 떠오르지만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꿈을 잘 꾸질 않으니 꼭 돼지를 골라 꾸기가 어디 쉬우랴. 사실은 꿈을 고를 수 있다면 돼지보다는 형제들을 보고 싶다. 아들딸 여섯을 두신 부모슬하에서 그야말로 바글거리며 살다가 나만 고향을 떠나 벌써 30년이 지났으니 꿈에서라도 볼 수 있으면 그 형제들을 볼 일이다. 몇 년 전부터는 그믐날 동생들에게 전화를 해서 오늘 밤 꿈에 좀 나타나라고 부탁하면서 "그러면 일석이조 아니냐. 한꺼번에 돼지꿈과 형제들 꿈을 꾸는 셈이니 말이야" 하고 껄껄대기도 한다. 그러면 질세라 "돼지도 돼지꿈 꾸냐"고 되묻는다.
동생들이 말을 듣지 않아 올해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준비를 했다. 설날 준비하면서 장을 보다가 튼실한 보조수단이 보이길래 구비해 둔 것이다. "돼지와인" 정도라고 해둘까?
오늘 밤에는 이 와인을 마시고 잠들어 꼭 동생들 꿈을 꾸어야지 하며 샀다. 함께 와서 마시고 서로의 꿈에 들어가줄 수 있으면 물론 더욱 좋겠지만 하고 혼자 낄낄대며 산 것이다.
그런데 사들고 와서 자세히 보니 효험이 있을지 벌써 의문이다. 스페인 와인인데 병 뒤에 붙어있는 설명이 내 의도에 대해 깔깔대고 있는 듯하다. 하늘을 날고 있는 조그만 돼지는 스페인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에서 왔는데, 거기 어린이들은 누군가가 실현될 수 없는 꿈을 꾸거나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면 날으는 돼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꿈에서 형제들을 만나는 게 허황되고 황당한 꿈이냐는 질문이다.
그래도 이 녀석 한 병은 오늘 해 치울 작정이다. 계속되는 설명에 돼지고기 요리와 어울린다고 했는데, 마침 준비한 그믐날 저녁이 돼지안심 덩어리에 겨자소스를 바른 후 베이컨으로 둘둘 말아 구워내는 요리이니 안성마춤 아닌가?
돼지고기 요리를 잔뜩 먹고 돼지 와인을 마시고 잠을 자면 동생들이 꿈에 와줄까?
(2011년 섣달 그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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