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과거시험은 원래 '없는집' 등용문이었다

반빈(半賓) 2010. 1. 28. 09:17

과거시험은 원래 '없는집' 등용문이었다


북송의 과거제도를 조선은 핵심을 뺀 채 도입했다. 빈한한 집의 자제를 선발하겠다는 정치적 의지로 잘나가는 집안에 적극적 불이익을 줬다. 부유층 자제를 일류대 입시에서 배제한다면 위헌결정 뻔하지만 돈이 없다고 교육기회 불이익 주는 일 또한 있어선 안되는 거 아닌가.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한 조선의 제도는 북송에서 받아왔고, 지금까지도 대학 입시로 이어져 그 큰 틀이 유지되고 있다. 우리 사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 과거시험과 비슷한 몇 가지 시험이 결국 출세의 열쇠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 단지 대학입시 때문에 사회전체가 몸살을 앓는다는 건 교육이 그때보다 보편화되었고, 시험을 통해 출세하려는 인구가 전보다 훨씬 많아졌기 때문일 뿐이다. 노력해서 자기 발전을 꾀하자는 제도인 만큼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입시가 우리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느낌은 그냥 느낌에 그치지 않는다는 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북송의 과거제도를 자세히 뜯어보면 조선이 그 제도의 핵심을 뺀 채 배웠고, 그게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진 건 아닌가 생각된다. 북송 과거제도 중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은 요체는 빈한한 집의 자제를 선발하겠다는 정치적 의지였다. 그런 의지는 종종 잘 나가는 집안의 자제에게 적극적으로 불이익을 주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어, 송나라 태조는 한림원 승지 도곡의 아들이 진사시험에 급제하자 중서성에 시험을 다시 보도록 명령하면서 “녹을 먹고 있는 집안의 사람이 급제하면 반드시 시험을 다시 치러야 한다”고 말했고, 태종은 재상 이방의 아들, 참지정사 여몽정의 종제, 염철사 왕명의 아들, 탁지사 허중선의 아들 등이 진사시험에 급제하자 “세력가의 자제가 가난한 집안의 자제와 경쟁하여 급제하면, 사람들이 짐과의 사사로운 인연 때문이라 할 것이니 모두 불합격시켜라”고 명했다고 전한다. 이런 소식에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고관의 자식들이 시험을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는 기록이 여기저기 보인다.

 

몇 대에 걸친 군주의 이러한 의지로 가난한 집 자제가 과거제도를 통해 많이 등용됐다. 태종 때의 재상 장제현은 “고아로 가난했으나 열심히 공부했다.” 명망있는 시인이며 관리였던 왕우칭은 “세세로 농사를 짓던 집안의 자제로 아홉살에 비로소 글을 읽었다.” 범중엄은 “두살 때 고아가 되었고 그 어머니는 장산 주씨 집안으로 재가했다.” 당송팔대가의 하나인 구양수는 “집이 가난하여 대풀로 땅바닥에 써가면서 글을 익혔다.”

 

우리와는 참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한 집안에서 몇 명의 재상이 났느냐에 따라 그 집안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를 따졌다. 재상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리가 되는 일이 많았고, 그런 집안의 세력이 왕권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커진 경우도 있었다. 아직까지도 법관은 자식이 사법고시에 합격하기를, 의사는 자식이 의사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게 상식인 것은 그런 전통의 잔영이 아닌가. 물론 전문적인 지식을 효율적으로 축적할 수 있을테니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겠지만, 기회의 편중이 심각하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의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게 한 송나라의 조처를 지금 우리 대학입시에 적용하기 위해 번역한다면 어떻게 될까? 권력이 편중되어 세습되는 걸 막자는 뜻이었고 오늘날의 권력은 바로 경제력이니, 재산이 많은 집안의 자제는 일류대학에 갈 수 없다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물론 과거시험을 통해 빈한한 집안의 자제를 뽑은 북송의 제도에는 황제의 권력을 넘볼 수 있는 세력의 형성을 근본에서 막겠다는 정치적 속셈이 있었다. 그런 정치적 속셈은 오늘날도 필요하지 않은가. 일류대학 교육의 혜택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부 계층에 독점되고, 그 결과로 경제력의 편중과 세습이 더욱 심해지며, 그 힘을 바탕으로 국가의 권력을 넘보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이 생기고 있다면 그냥 방관하고 있을 일만은 아니지 않은가.

 

부유층 자제를 일류대학 입시에서 배제한다는 조처가 발표된다면 물론 당장에 헌법소원이 있을 것이고, 위헌 결정이 날 게 뻔하지만, 그냥 꿈 속에서라도 그런 조처가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인 변화를 그려본다. 일류대학은 아니라도 대학에 가겠다는 부유층의 자제들이 다닐 대학이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학원이 밀집해서 사교육의 기회가 많고 그래서 부동산 값도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일부지역의 문제도 스르르 해결되지 않을까. 아니, 꼭 대학에 가지 않아도 사회에 기여하며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씩 우리사회에 자리할 수 있지 않을까. 꿈이라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부유층의 자제에게 일류대학의 문을 닫아버리지는 않더라도, 대학입시에서의 성패가 부모의 경제력이나 경제적 희생에 따라 결정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돈이 많다고 차별하지는 말아야 한다면, 돈이 없다고 교육의 기회에서까지 불이익을 주는 일은 더욱이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겨레신문, 2008년 2월 22일,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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