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음식 기행

"원조(元祖) 북경오리구이"

반빈(半賓) 2011. 6. 28. 19:15

"원조(元祖) 북경오리구이"

 

 

중국 대학가의 뒷골목에 가면 종종 "라오띠팡(老地方)"이라는 옥호를 단 음식점이 눈에 띈다.  그 이름에서 "띠팡(地方)"은 "장소" 또는 "곳"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문제는 "라오(老)"라는 글자의 뜻이다.  그냥 이름만 얼핏 듣고 쉽게 생각하면 개업한지 오래되어 역사가 있다는 뜻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옥호를 단 음식점의 꼴을 보면 바로 그런 이해가 적절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 충청도 사투리로 "그이(게)딱지만한" 장소에 탁상 몇 개를 놓고 영업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대부분 역사고 뭐고 따질 게 없어 보인다. 말이 그럴 듯해 "옥호"지, 사실 옥호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어울리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식당이 아니면 그 이름이 잘 붙지 않는다.  심지어 그 옥호에서 보잘 것 없는 장소라는 뜻을 읽는다고 해도 그리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곳에서 마음이 푸근해지고, 그래서 정을 붙이고 사는 것도 우리네 인생이다.  특히 여유없이 각박하게 사는 학생 시절에는 더더욱 그런 곳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노"자는 "늘 다녀 친숙한" 정도의 뜻으로 읽어야한다.  말하자면 "라오띠팡"은 "거기", "우리 늘 가는 그 집", 심지어는 "거기 말고 어디 딴 데가 있겠어?" 정도의 뜻으로 번역할 수 있는 옥호이다.  예컨대 두 연인이 늘 학교 정문의 왼쪽 기둥에서 만나 데이트를 시작한다면 그 둘 사이에는 바로 그 기둥이 라오띠팡인 것이다.  물론 음식점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옥호에는 음식의 맛이나 서비스가 한결같은 곳이라는 주장, 그렇게 해서 늘 한결같이 와 줄 고객을 확보하겠다는 마음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오랜 시간동안 한결같다"는 뜻 때문인지 음식점이름 앞에 첨가된 "노(老)" 자가 전혀 다른 뜻일 수도 있다.  대부분 "라오즈하오(老字號)"라는 표현으로 붙어 있는데, 거기서 그 "노"자는 우리 사회에서 보이는 "원조(元祖)"라는 주장과 닮은꼴인 경우가 많다.  중국어에서 "즈하오(字號)"가 바로 우리말의 "옥호"라는 뜻이니, "노자호"는 오래된 식당이나 상점에 붙일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중국의 "노자호"와 우리나라의 "원조"의 사이에 상당한 차이도 발견된다.  청진동이나 약수동처럼 해장국집이나 족발집이 모여 성업중인 곳엘 가면 하나 같이 "원조"라는 말이 달려있다.  원조 아닌 집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로 집집마다 모두 "원조"라고 주장하는 간판을 내 걸었지만, 중국 "노자호"의 경우는 그 말이 붙어있으면 대부분이 정말로 오래 영업을 한 집들이다.  역사가 얼마나 되어야 그렇게 부를 수 있는지를 꼭 정확한 숫자로 꼭 집어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노자호"라고 부르는 상점이나 음식점은 최소한 19세기 말 무렵에는 개업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말 원조다운 원조라야 "노자호"라고 부른다.

 

중국요리에서 내로랄 수 있는 "베이징카오야(北京)", 즉 "북경식 오리구이"로 유명한 "취안쥐더(全聚德)"는 명실상부한 노자호이다.  우선 옥호부터 잠깐 보고 넘어가자.  이 옥호는 어법이 조금 이상하다.  꼭 틀리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어색한 건 사실이다.  중국지성사에서 "더(德)"라는 용어가 "도덕적 수양의 결과로 이룬 힘"이라는 제한적 의미로 쓰이는 건 북송때부터 발전한 신유학의 영향이라고 해도 좋다.  그 전에는 여러 종류의 "힘"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적당하다.  사실 성리학이 발전한 다음에도 중국어에서 "덕"은 꼭 도덕의 범주에 제한을 받지 않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냥  "힘" 또는 "장점" 정도의 뜻을 가진 술어로 보면 된다.  그렇다면 "전취덕(全聚德)"이라는 옥호는 글자의 뜻대로 "전부 모아들인 장점" 정도로 읽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건 우리말의 어순에선 그럴 듯해도 한문의 어법구조가 아니다.  어순을 바꾸어 "덕취전(德聚全)" 또는 "덕전취(德全聚)"라고 해야 "좋은 점을 모두 모았다" 또는 "장점이 모두 모였다"라는 뜻의 말로 어법이 어색하지 않다. 

 

옥호의 어법이 어색해진 내력을 찾으려면 북경시의 "치엔먼(前門)"이라는 지역에 이 음식점이 생긴 청나라 퉁즈(同治, 1856-1875)년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북경의 한 가운데에 자금성이 있고, 그 남쪽 끝에 티엔안먼(天安門)이 있다.  그 남쪽으로 "천안문 광장"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공간이 펼쳐진다.  광장을 가로질러 남쪽 끝을 지나 조금 가면 "쩡양먼(正陽門)"이라는 대문이 있는데, 이 대문은 북경 내성 남쪽 성곽의 한가운데 있어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티엔탄(天壇)으로 갈 때 통과했다고 한다.  이 문의 다른 이름이 "치엔먼(前門)"인데 자금성의 "앞"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짐작된다.  이 문을 중심으로 하는 상당히 넓은 지역 역시 "치엔먼"이라고 부른다.  이 곳은 일찌기 명나라 때부터 상업지역으로 발전했다.  이 치엔먼의 밖에 "러우스후통(肉市胡同)"이라는 길이 있었는데, 이름으로 보아 아마 고기종류를 파는 상점이 모여 있었던 모양이다.  이 고깃간골목에 상호를 "덕취전(德聚全)"이라고 한 건과류상점이 있었는데,  "좋은 건 다 모았다"는 상호가 무색할 정도로 장사가 시원치 않아서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상점을 양서우산(楊壽山)이란 사람이 사서 개업한 것이 바로 오늘날 국제적인 북경오리구이 전문점 전취덕(全聚德)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닭과 오리, 돼지 등을 통구이해서 소매로 팔기도 하고 여기 저기 식당에 대기도 하는 상점에 불과했다.  망해 나간 상점의 상호를 그대로 사용하기 거북했는지 상호 세 글자의 순서를 거꾸로 해서 만든 이름이 바로 전취덕이다.  그런데 옥호를 그렇게 고치고는 "이전취덕(以全聚德)"을 줄인 말이라고 그럴 듯하게 설명을 달았다.  여기서 "이(以)"는 어법으로 이야기하자면 수단이나 태도, 원인 등의 뜻을 가지는 개사(介詞), 즉 전치사이다.  그러니까 "전(全)"은 그 전치사의 목적어라고 보면 된다.  "빠진 것 없이, 소홀함이 없이(全)"라는 태도로(以) 좋은 점(德)을 모은다(聚)는 의지를 담았다는 설명인 것이다.  하긴 그 편이 지난 번 영업하던 가게의 이름에서 글자의 순서를 뒤집어 만들었다는 설명보다 훨씬 그럴 듯하다.  그게 꼭 자기 상점 물건의 품질관리에 적용할 원칙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해서 돈을 긁어 모으겠다는 소리인지는 분명치 않다.  물론 이 둘이 상호배타적이 아닌 이상  이 설명이 꼭 둘 중 한 가지에만 해당해야 할 필요는 없겠다.

 

주인 양씨의 생각과 철학이 이 음식점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쑨(孫)씨 성의 주방장이 그 발전에 큰 몫을 했다.  그가 청나라 궁중요리에서 오리를 굽는 비법인 "꽈루(掛爐)"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한 후로 장사가 끝은 모르고 발전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커다란 화덕 안에 오리나 돼지를 걸어서(掛) 굽는 방식을 말하는데, 화덕의 안에 불을 피울 때 나무재질이 단단하고 태울 때 연기가 나지 않는 대추나무나 살구나무 등 과실나무의 장작을 쓴다.  센 불길이 직접 오리에 닿지 않아야 하고, 때때로 오리를 돌려 매달아 모든 부위가 골고루 익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렇게 구워낸 오리는 우선 껍질이 잘 익은 대추색을 띈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면서 통통하고, 껍질은 바삭바삭하지만 살은 부드럽고 촉촉하다.  기름기가 적당히 느껴지면서 느끼한 기분은 없게 구워낸 것이 제 맛이다.  그래서 이 오리 통구이는 세 번 먹는다고 한다.  다 구운 오리를 쟁반에 받쳐들고 나왔을 때 우선 눈과 코로 음미하는 것이 첫째이고, 그 다음 저며낸 살과 껍질을 채썬 파와 달콤짭짤한 "티엔미엔쟝(麵醬)"과 함께 면병으로 싸서 먹는 것이 두 번째, 살을 저며내고 남은 뼈로 육골즙탕을 끓여 다시 한 번 먹는 게 세 번째이다.

 

이 맛은 벌써 오래 전부터 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신촌에 있다가 수송동으로 위치를 바꾼 "베이징코야"가 전취덕 북경오리통구이집의 기술지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맛이 북경에 못지 않다.  강남에도 한 군데 연지 벌써 여러 해라고 들었는데 내가 직접 가 시식해 본 일은 없다.

 

전취덕 북경오리구이집이 이렇게 국제적인 음식점으로 성장을 하게 된 데는 창업주인 양수산과 주방장 손씨의 힘이 컸지만, 사실은 또 하나의 북경오리구이집과의 경쟁을 통해 부단히 기술과 서비스, 음식메뉴를 개발, 개선했기 때문이다.  전취덕이 경쟁해야 했던 라이벌 북경 오리구이집은 "피엔이팡(便宜坊)"이다.  이집이야 말로 전취덕보다 더 긴 역사를 자랑하는 노자호이다.  옥호중의 "피엔이(便宜)"라는 말은 "간편하다", "편리하다"는 뜻이 아니라 값이 싸다는 뜻이다.  "경중제일(京中第一)", 즉 "북경에서 일등"이라는 수식을 서슴없이 붙일 정도로 오랜 역사와 맛을 자랑한다.  듣기에는 이 집이 처음 열린 것은 명나라 영락(永樂)년간의 일이었다고 하니, 전취덕보다 한 이백년 앞선다.  전취덕의 화덕이 청나라 궁중비법을 사용했다면, 편의방의 방식은 명나라 궁중방식이라고 한다.  옥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집 역시 처음부터 거창하게 궁중요리를 한 것은 아니다.  이 집은 "쉬안우먼(宣武門)"밖의 "미스후퉁(米市胡同)"에 있었다.  앞에 언급한 정양문은 북경 내성의 남쪽 성곽의 한 가운데 있고, 선무문은 그 성곽의 서편에 있으니 북경 내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  선무문 밖에 있던 미스후퉁이란 이름은 쌀을 포함한 곡류를 거래하는 상점이 모여 있다는 뜻으로 오늘날까지 그렇게 불린다.  "편의방"이 그 골목에 처음 문을 연 명나라 영락년간에는 옥호조차 없이 닭과 오리를 잡아 팔면서 한편에서는 오리와 닭을 통구이 하는 조그만 가게였다고 한다.  "값이 싸다(便宜)"는 걸 주무기로 삼았음 직하다.  일설에는 값이 싼 집이라는 고객들의 입소문을 재빠르게 옥호로 채택해 "편의방"이 되었다고도 한다.

 

장사가 무척 잘 되었던지 청나라 중엽에 이르러서는 벌써 "치엔먼" 지역에 "편의방"이라는 옥호로 오리구이를 파는 크고 작은 상점, 음식점이 여럿 생겼다고 한다.  말하자면 옆 동네에 짝퉁 음식점이 문을 연 것인데, 그건 본래의 음식점 입장에서 볼 때 꼭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다.  이름 세 글자를 그대로 "편의방(便宜坊)"이라고 한 집도 있지만, 그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의(宜)"자를 "이(易)" 이나 "의(意)"로 바꾸어 간판을 내건 집도 있었다고 한다.  성조(聲調)가 다른 경우는 있으나 중국어의 음이 모두 "이"로 나는 동음이기 때문에 그리한 모양이다.  그러나 함풍(咸豊)년간에 치엔먼에 가게를 열면서 "편의방(便意坊)"이라는 옥호를 내건 사람은 아무래도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편(便)"자는 우리말에서도 "편"과 "변"의 두 가지 발음이 있지만, 이 차이는 중국어에서도 "피엔"과 "비엔"이라는 두 가지 발음으로 확인된다.  "편"이라 읽는 경우는 "간편하다"는 뜻이지만 "변"이라 읽으면 "대소변(大小便)"의 "변"이다.  발음에 따른 의미의 구별은 중국어에서는 약간 다르게 나타난다.  "싸다"는 뜻일 경우에는 "피엔"이라 읽고, "비엔"이라 읽으면 "편리하다"는 뜻과 "대소변"의 뜻을 모두 가진다.  아무튼, "편의(便意)"를 우리말 발음에서 "변의"로 읽거나 중국어 발음으로 "비엔이"로 읽으면 "대변이나 소변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라는 뜻이 된다.  음식점의 이름이 "똥오줌이 마려운 곳"이라는 뜻으로 읽히는 건 피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나라에도 어떤 유제품에 "쾌변"이라는 이름을 붙인 걸 보았다.  그건 그냥 실수가 아니라 그 제품이 소화를 도와 시원스럽게 변을 볼 수 있다는 뜻을 담은 듯한데, 나는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걸 사 마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많은 유사한 이름의 오리구이집 중에서도 처음 시작했던 선무문밖 싸전골목(米市胡同)의 "편의방"이 가장 성업을 했는지 계속 가게를 확장했고, 소위 "차별화"를 시도하려던 것인지 옥호 앞에 "노(老)"자를 붙여 아예 옥호를 "노편의방(老便宜坊)"으로 달았다.  우리로 치자면 "원조"라는 주장을 담은 간판을 내 건 셈이다.  이 집은 앞에 언급했듯이 오리를 굽는 방식이 전취덕과 아주 달랐다.  전취덕은 화덕 안에 불을 피우고 오리를 걸어 가끔 돌려주며 요리하는 청나라 궁중의 방식이었던 반면, 편의방은 "먼루()"라는 화덕을 이용하는 명나라 궁중의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벽돌을 쌓아 만든 화덕에 오리를 넣고, 불을 화덕의 밖에 피워 달구어진 벽돌벽의 열로 오리를 구워내는 간접가열방식이다.  불빛이 직접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 화덕을 "암로(暗爐)"라 부르기도 한다.  전취덕 북경오리구이에 익숙한 사람들은 불기운이 직접 닿아 껍질이 바삭바삭한 맛을 즐기겠지만, 편의방의 간접가열방식으로 조리한 오리도 찾아 맛볼 만한 음식이다.  이 간접가열 화덕은 열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고, 운영비용도 경제적이지 못해 이미 대부분 전기구이식 화덕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원래의 "노편의방"은 이미 문을 닫았다.  치엔먼의 "어물전골목(鮮魚口胡同)"에 있는 본래의 분점이 아직 먼루()방식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피엔이팡카오야띠엔(便宜坊鴨店)이라는 옥호를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다. 

 

전취덕과 조리의 방식이 다른 오리구이를 권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북경의 전취덕은 이미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듯한 영업방식때문에 이제 식도락을 즐기기에 그리 즐겁지 않은 장소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작년 여름 북경에 들른 길에 거기서 공부하고 있는 제자 열 명을 데리고 저녁을 했는데, 식사 후 전취덕 오리구이집을 추천했던 학생이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전취덕이 관광명소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내가 처음 거기서 오리를 맛본 것은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었는데, 그 당시에도 치엔먼의 전취덕은 관광버스를 타고 온 단체손님으로 넘쳐났다.  나도 처음 북경에 간 길이었기에 물어물어 전취덕을 찾아 들어가 4인용 식탁을 차지하고 앉았다.  종업원은 단체손님이 아닌 한 사람의 고객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  북경에 처음 오는 길인데 전취덕 오리구이를 뺄 수 없지 않느냐고 했더니 특별히 오리 반 마리를 준비해 주었던 게 기억에 새롭다.  어쩌다 그랬던 집이 겉만 번지르르한 그저 그런 음식점이 되었는지 아쉽기도 하다.  결국 문제는 관광명소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윤추구에 얼마나 길이 들여졌느냐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렇다고 북경오리구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어쩌면 서울의 "베이징코야"가 정답인지도 모를 일이다.   2-300년 전 사람들이 먹던 오리구이라고 상상하면서 "편의방"을 찾아보는 것도 물론 재미있는 경험이겠다.

 

(20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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