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어도 준치"?
좀 익살스러운 표현을 쓰자면 원시적 채집경제라고 해도 좋았다. 이십여 년 전 포틀랜드에 이사와 보니 여기 교민들은 철마다 산으로 바다로 다니며 이것 저것 먹거리를 구했다. 먹을 게 없어서 그런 건 물론 아니었다. 신선하고 맛있는 먹거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고, 일상에서 벗어나 소풍 다니듯 놀며 하는 일이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기의 끝나가는 4월 경 상당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딸 수 있는 고사리로 시작해서, 바다 속으로 허리가 잠길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가 걷어내는 미역, 물 빠진 개펄에서 부삽으로 그냥 떠내는 어른 주먹만한 조개, 거기다 철에 따라 곳에 따라 크기와 모습이 다른 온갖 게에, 건기가 끝나는 초가을 무렵 비가 두어번 내리기 시작하면 돋아나오는 송이버섯까지, 무진장한 산해진미가 따라다니기 버거울 정도로 우리들을 바쁘게 했다. 여름 내내 따다 먹는 갖가지 산딸기까지 합하면 출근하는 주중보다 주말이 더 바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 때 그 때 먹는 정도가 아니라 말리고 얼려 일년 내내 먹겠다고 갈무리하는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심지어 멀리 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그렇게 따다 말린 미역을 처남댁 해산할 때 쓰라고 보낸 적도 있었다. 생소한 길을 더듬으며 여기저기 상당한 거리를 싸다녀야 한다는 게 좀 부산스럽고, 진득하게 앉아 책을 읽어야 하는 본업을 소홀히 하는 건 아닌가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이번엔 여기 다음번엔 저기를 다녀오자고 제의해 오면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먹거리의 맛도 맛이었지만, 잡으러, 주우러, 따러 다니는 재미가 매혹적이기 때문이었다.
그중 둘째 가라면 서러울 게 준치 낚시였다. 준치는 영어로는 shad라고 하는데, 오월 하순에서 유월 초순까지 한 삼 주 동안 산란을 위해 제 고향 콜럼비아 강을 거슬러 헤엄쳐 오른다. 그 수가 상상을 초월해서 구름처럼 몰려드는 낚시꾼이 드리우는 유혹을 이기고 지나가 산란하는 숫자만도 이백만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준치는 우선 낚시의 재미가 그만이다. 어린시절 우리나라에서 보던 놈들보다 두배는 되어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작다는 숫놈도 어른 팔뚝만하다. 그 큰 몸집이 용트림하면서 펄떡거리는 힘이 장난이 아니다. 그 몸부림이 낚싯줄을 통해 팔목에 전달될 때의 짜릿함은 중독증세를 부르기에 충분하다. 준치가 힘에 비해 아가리가 약하다는 점은 낚시의 재미를 더해준다. 자칫 너무 세게 당기면 주둥이 부분이 찢어지면서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어쩌다 강약이 잘 조절되었는지 그 미물 하나가 끌려 나오면 세상을 얻은 듯 즐거워했다.
처음 준치낚시를 갔을 때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하수의 낚시바늘인 줄 어찌 알았는지 처음 한 두어 시간은 입질도 한 번 없었다. 어쩌다 한 번 물면 금세 떨어져 나가고, 어찌 어찌 끌어당겨진다 싶으면 옆 사람 낚싯줄와 엉켜 버렸다. 아버지의 낚시 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은 동생이 멀리 서울에 산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수확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옆에 서서 낚시를 하는 미국사람들은 늘 자기가 잡은 준치를 옆에 있는 나같은 동양인에게 양보하곤 했다. "Do you want it?" "Sure." 그렇게 간단한 대화가 지나가면 그 때마다 준치가 한 마리씩 내 발 아래 쌓였다. 내가 겨우겨우 한 마리를 낚아 끌어냈을 때는 내 발치에 벌써 대여섯 마리가 쌓여있었다. 연유를 물으니 미국사람들은 준치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잡는 게 재미있어 낚시는 하시만 잔 가시가 너무 많아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긴 미국 동료들 중에는 자기들이 즐겨먹는 송어 낚시를 가서도 잡는대로 다 놓아주고 한두 마리만 가져가는 사람도 많다. 아무튼 그렇게 하루 종일 낚시질을 하고 나니 내 손으로 잡은 놈은 예닐곱 마리뿐이었지만 옆사람들이 던져놓은 녀석들 스무 마리를 합하니 커다란 아이스박스로 한 가득이었다. 이집 저집 너댓 마리씩 나누어 주고도 열마리가 남았다. 고추장 발라 버터구이를 해 먹고, 무우를 넣어 졸여 먹고, 뱃속 가득한 알만 따로 빼 알탕을 끓여 먹고, 그렇게 며칠을 먹고도 남은 몇 마리는 냉동고에 갈무리했다.
그러나 그렇게 가만히 서 있다가 옆사람이 잡은 준치를 수확하는 건 이제 옛말이 되었다.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준치를 확보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준치가 더 이상 콜럼비아강으로 올라오지 않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동유럽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하게 됐는데 그 여파가 난데 없이 준치 낚시터에 미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듣자하니 우리가 즐겨 부르던 노래 "아름다운 푸른 도나우강"의 도나우강에도 준치가 살아 그 강이 굽이굽이 지나가는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준치맛을 알고 즐긴다고 한다. 바로 거기 그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준치 낚시터에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것이다. 동유럽사람들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온 이민들까지 몰려들면서 준치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절대수가 대폭 증가했으니 우선 낚시를 간다해도 낚시할 적당한 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아졌고, 준치의 몸부림은 아예 멀리 달아나 버렸다는 느낌이다. 미국사람들의 입맛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하긴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피부색과 모습이 전혀 다른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낚시를 하는 걸 보면서, 나도 한 번 먹어보자는 생각이 날만도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 번 맛을 보고나면 가시를 발라먹어야 한다는 정도의 불편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게 준치 아닌가. 그런 연유로 준치확보에 빨간불이 켜졌다. 아무튼 이제는 더 이상 옆에 선 낚시꾼이 잡은 준치는 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됐다.
중국사람들도 준치를 잘 안다. 중국어로는 "시어(鰣魚 스위)"라고 하는데 양쯔쟝(揚子江)에서도 나지만, 쩌쟝성(浙江省)의 푸춘쟝(富春江)에서도 난다고 한다. "기이한 산과 물이 천하에 하나뿐(奇山異水, 天下獨絶)"이라는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 강은 아름다운 풍광으로 많은 문인 시객이 애송했는데, 물이 맑아 조그만 자갈 위로 노니는 고기를 다 볼 수 있다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 고기가 혹시 준치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준치는 중국에서도 맛이 좋아서, 그렇지만 또 가시가 많아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소소록(笑笑錄)》이라는 청나라 때의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제목 자체가 "웃자고 모은 이야기" 정도이니 아마 연구에 필요해서 읽은 책은 아니고, 아마 도서관 서고를 들락거리다가 눈에 띄어 별 뜻 없이 뒤적인, 말하자면 망중한에 스쳐 지나간 책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본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한량의 이야기인데, 그는 평생 별로 한스러운 일이 없었으나 꼭 다섯 가지를 섭섭해 했다고 한다. 그 섭섭한 다섯 가지의 첫번째로 준치가 등장한다. 금귤의 맛이 너무 신 것(金橘太酸), 순채라는 물나물의 물성이 찬 것(蓴菜性冷), 해당화에 향기가 없는 것(海棠無香), 송나라 때의 문장가로 소위 당송팔대가의 하나인 쩡꿍(曾鞏)이 시를 쓰지 못했다는 것(曾子固不能作詩) 등 네 가지 불평의 맨 앞에 준치에 가시가 많다는 (鰣魚多骨) 점을 든 것이다. 맛있을 것으로 보이는 과일이 너무 시어 먹을 수 없는 것, 맛있는 나물이 배를 차게 하는 성질이 있어 먹으면 속이 편치 않는 것, 예쁜 꽃에 향기가 없는 것, 좋아하는 문장가가 시를 남기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 했다는 건 자신이 어찌 해볼 수 없는 사실이니 투덜거리더라도 들어줄 만하다. 그러나 준치에 가시가 많다는 불평은 성가신 일은 마다하면서 좋은 맛만 찾겠다는, 그야말로 게으름뱅이의 심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준치를 잡아보고 먹어보니 그게 단순히 게으름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랫것들"에게 잔가시를 뽑아내고 조리하라고 시키면 됐을 터이고, 실제로 많은 가시를 모두 제거해서 조리하는 생선도 있다. 준치를 그렇게 요리하지 않는 건, 그렇게 휘저어대는 순간 준치의 맛이 반감한다는 생각에서였다고 짐작한다. 예컨대 중국사람들은 준치을 요리할 때 비늘을 긁지 않는다. 다른 물고기에 비해 비늘이 커서 어른 엄지손톱만하니 발라가면서 먹을 수 있다는 뜻도 있겠지만, 긁을 수 있는 걸 긁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늘과 몸통 사이에 준치맛의 정수가 있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아무리 많다고 해고 그 가시를 바르는 건 먹는 사람의 몫이었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한 게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다. 물론 정말 맛이 있는 생선이니 잔 가시 많다고 투덜대지 말고 고맙게 먹으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면 문제될 게 없기는 하다. 그러나 비늘을 긁지 않고, 가시를 건드리지 않은 채 바로 요리한다는 건 준치를 싱싱하게 먹어야한다는 생각과 통하니 "썩는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생선의 싱싱함을 살아있을 때와 식탁에 올랐을 때의 사이에 걸리는 시간을 척도로 계산하곤 한다. 해안가 회집에 가면 산 놈을 잡아 상에 올리면서 아직 입을 뻐끔거리는 머리를 식탁에 올리곤 하는데, 그건 싱싱한 생선을 잡아 상에 올렸다는 증거쯤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싱싱함을 그렇게 재는 건 그리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두 시점의 한 가운데 요리를 하는 시점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준치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바다에 살다가 산란을 위해 잠깐 회귀하는 것이니 잡히는 기간이 무척 짧아 귀하고, 강이라고 아무데서나 잡히는 게 아니니 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강에서 잡은 준치를 상당히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이 먹는다고 할 때, 싱싱함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생긴 요리가 "사과시어(砂鍋鰣魚)"로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뚝배기 준치탕" 정도가 되겠다. 양쯔쟝에서 백리 길이 떨어진 안후에이(安徽)성의 퉁청(桐城)에 살던 문인들이 시작했다고 하는 이 조리법은 싱싱하다는 말의 또 다른 정의를 보여준다. 백리이면 하루 종일 걸어야 갈 수 있는 길이니, 생선을 가져다 조리하면 싱싱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 먼길을 여러 사람이 몰려갈 수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 조리법이다. 하루이틀 전 강가에 도착한 조리사와 하인은 아침 일찍 준치를 구해 깨끗이 씻어 두 토막을 낸 후, 뚜껑 있는 뚝배기에 물, 술, 간장, 식초, 소금등의 조미재료를 넣고, 대파와 생강, 마늘을 넣은 후 준치를 넣어 한 소끔 끓인다. 그런 연후에 약한 불의 풍로에 뚝배기를 얹은 채로 천천히 백리 길을 걸어 돌아온다. 물론 문인 친구들은 아침 나절에 모여 하루 종일 시를 쓰고, 술마시면서 쓴 시를 나누어 읽고, 히히덕 거리고 박수치면서 준치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저녁 나절쯤 조리사 일행이 도착할 때면 뚝배기 속의 준치탕은 약한 불에 오래오래 익은 탓에 진한 국물의 맛이 하루 종일 마신 술로 가득한 배를 쓰다듬어 준다. 양념을 강하게 하지 않은 탓에 맛은 진하면서도 담백하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준치의 싱싱한 맛을 즐긴다. 비늘이나 가시를 발라 먹어야하는 성가심을 불평하는 사람은 물론 없다. 백리 길을 오고간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뚝배기 준치탕"은 지금도 안휘성의 명채(名菜)로 손에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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