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빈(半賓)의 "시와 함께 맞이하는 주말" (15)
"매화와 시"
매화의 계절입니다. 여기저기에서 꽃구경 가자는 말, 매화를 구경하기 좋은 곳, 좋은 때에 대해 주고 받는 대화가 자주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매화와 한시에서 만나는 매화의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봄이 왔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꽃인 듯한데, 중국사람들의 시에서는 봄이 올 것을 예고하는, 그래서 추운 날씨, 눈 덮인 가지와 와 더 잘 어울리는 꽃입니다. 춥고 바람이 센 계절의 꽃이라 그런지 가지에 잘 피어있는 꽃 뿐 아니라 흩날려 떨어지는 꽃잎을 노래하는 시도 많이 있습니다. 며칠 전 내가 속해 있는 대화방의 회원이 임포(林逋, 967-1028) 가 매화를 "그윽한 향기(暗香)"라고 노래한 표현을 소개했습니다. 참으로 사랑을 받는 절창입니다.
사실 그 시인은 이름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포(逋)는 "도망치다", "달아나다"라는 뜻의 한자입니다. 왜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합니다. 빚을 갚으라는 독촉일 수도 있고, 허리를 휘게 하는 세금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책임지라는 성화일 수도 있겠지요. 이런 저런 이유로 달아날 수 있겠지만, 속세에 대한 전체적인 부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포객(逋客)이라는 말은 산속에 은거하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온갖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송나라 때 사람 심괄(沈括,1031-1096)이 쓴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임포가 "매화를 마누라 삼고, 학을 자식 삼았다(梅妻鶴子)"고 적혀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포객이라는 말과 공명합니다. "그윽한 향기 노란 달무리 아래 두둥실 떠 다닙니다 (暗香浮動月黃昏)"라는 구절은 "산속 뜰의 작은 매화(山園小梅)"라는 제목으로 쓴 두 수의 작품 중 첫째 수입니다. 우선 그 작품을 읽어 보시지요.
林逋 (967-1028)
山園小梅二首
I.
眾芳搖落獨暄妍,
占盡風情向小園。
疏影橫斜水清淺,
暗香浮動月黃昏。
霜禽欲下先偷眼,
粉蝶如知合斷魂。
幸有微吟可相狎,
不須檀板共金尊。
임포(林逋, 967-1028)
온갖 향기로운 꽃 흩날려 떨어져도
홀로 밝게 미소 지으니
작은 뜰 풍류의 멋을
모두 차지합니다
성긴 그림자 맑은 시냇물 위에
가로로 걸렸고
그윽한 향기 노란 달무리 아래
두둥실 떠 다닙니다
서리 내린 새가 내려와
먼저 훔쳐보려 하니
꽃가루 덮인 나비가 안다면
애간장이 끊기겠지요
다행히 이 작은 노래를 지어
드릴 수 있습니다
백단나무 조각으로 박자를 칠 건 없으니
그냥 잔을 드시지요
(반빈 역)
Lin Bu (林逋, 967-1028)
"A Little Plum Tree in the Mountain Garden: Two Poems"
I.
All fragrances scatter and fall
For you alone to shine and smile,
And to take all the elegance
In this small garden.
Sparse shadows hang aslant
Over the clear shallow water;
A surreptitious fragrance drifts
Under the golden haze of the moon.
A frosty bird wants to come down
To steal the first glance;
Powdered butterflies, if they know,
Would have their hearts broken.
Fortunately, I have these little songs
To offer you, my friend,
There's no need for the sandalwood clappers—
Let's just raise our cups.
"그윽한 향기(暗香)"라는 표현은 보시다시피 네째 구절의 첫 두 글자입니다. 이 작품은 형식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칠언율시인데, 율시의 매력은 가운데 두 연에 등장하는 댓구에 있습니다. "그윽한 향기"라는 말로 짝을 맞춘 세째 구절의 표현은 "성긴 그림자 (疏影)"입니다. 말하자면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비친 성긴 꽃 그림자"와 "노란 달무리 아래 떠도는 그윽한 꽃 향기"라는 두 가지 표현을 병렬시켜 매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지요. 노래의 대상인 매화를 직접 거론하지 않으면서 그 꽃의 매력을 노래하는 감동적인 표현입니다.
임포의 이 시가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작품, 특히 "그윽한 향기(暗香)"와 "성긴 그림자(疏影)"라는 표현이 매화의 다른 이름으로 쓰일 정도로 인구에 회자된 것은 남송의 시인 강기(姜夔, c. 1155-1221)의 덕분이기도 합니다. 강기는 특히 사(詞)에 능했습니다. 사(詞)를 잘 지었고, 특히 그 시형식의 기초가 되는 음악을 잘 알고 있어서 스스로 지은 곡조(自度曲) 에 노랫말을 붙이는 작품을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소영"과 "암향"이라는 두 곡(詞牌)은 매화를 노래하는데 널리 쓰였을 뿐 아니라 여러가지 주제를 담을 수 있는 사패가 되었습니다. 남송 말엽의 시인 장염 (張炎, 1248-1302) 은 이 두 곡에 연꽃을 노래하는 시를 지어 붙이면서 사패의 이름을 "붉은 사랑 (紅情)"과 "녹색 마음 (綠意)"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중국에서 매화를 노래한 것이 송나라(960-1279) 때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남북조시대 양(梁, 502-557)나라 때의 하손 (何遜, d. 518)이 지은 "이른 매화를 노래함 (詠早梅)"이라는 작품은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한나라의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전고가 들어있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매화를 통해 이루어진 문학적 상상의 한 측면을 보여줍니다. 세심하게 한 번 읽어 보시지요. 매화의 계절이니까요.
何遜
詠早梅
兔園標物序,
驚時最是梅。
銜霜當路發,
映雪擬寒開。
枝橫卻月觀,
花繞凌風臺。
朝灑長門泣,
夕駐臨邛杯。
應知早飄落,
故逐上春來。
하손
"이른 매화를 노래함"
토끼정원에는 사물에 순서가 매겨져 있는데
계절의 변화에서 가장 놀라운 건 매화입니다
서리를 무릅쓰며 길과 마주서서 꽃망울이 터뜨리고;
눈에 비친 차디찬 빛을 안고 꽃을 피웁니다
가지는 각월관에 가로 걸리고
꽃잎은 능풍대를 에워 쌉니다
아침에는 장문궁에 눈물로 뿌려지지만
저녁이면 임공의 술잔에 머뭅니다
흩날려 떨어질 것을 일찍부터 알기에
이른 봄과 앞을 다투며 오는 것이겠지요
주:
일곱째와 여덟째 행은 탁문군(卓文君)과 사마상여의 유명한 사랑이야기를 사용합니다. 장문(長門)은 한나라의 황후 진씨가 황제의 총애를 잃은 후 갇혀 살던 궁전이면서 그 애틋한 심정을 황후의 목소리로 사마상여가 썼다고 알려진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고, 임공(臨邛)은 탁문군의 고향이면서 사마상여가 그와 함께 사랑을 나눈 장소입니다
(반빈 역)
He Xun
"Early Plum"
In Hare Garden, the order of objects is marked,
The most startling of the seasons is the plum tree.
Braving the frost, buds burst forth across the road;
Shined on through the snow, flowers bloom in the chill.
Branches hang over the Moon-retreating Lookout;
Flowers surround the Wind-riding Terrace.
Sprinkles in the morning like tears at the Changmen Palace;
Heaped up at night in the wine cups in Linqiong.
They must know that they'll soon fall,
Followed soon after by the spring.
*Notes: Lines #7-8 allude to the celebrated love story of Zhuo Wenjun(卓文君) and Sima Xiangru(司馬相如). Changmen is the name of the palace in which the empress, née Chen, was confined after falling out of the emperor's favor. It is also the title of a poem, attributed to Sima Xiangru, written in the voice of the disfavored empress. Linqiong is the native place of Zhuo Wenjun, and the place where she and Sima Xiangru had their love.
(H. Rhew, tr.)
이 작품에 사용된 전고는 대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첫 행의 "토끼정원(兔園)"이 그 첫째 종류인데, 한나라 양효왕(梁孝王)이 지었다는 정원입니다. 이런 종류의 전고는 알아도 좋고 몰라도 그만입니다. 사실 사물이 계절과 함께 변화하는 것이 그 정원 하나일 수 없으니 그냥 꽃나무도 동물도 많이 있는 정원으로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둘째는 다섯째와 여섯째 행이 보이는 각월관과 능풍대입니다. 이 두 명사는 하손이 이른 매화를 노래한 이 시를 쓴 양주(揚州)에 있는 명승으로 보이니 모른다 해도 별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곳의 이름에 등장한 두 개의 동사는 그냥 지나칠 수 없네요. "물러나다"라는 뜻의 "각(卻)"과 "타고 넘다"는 뜻의 "능(凌)"은 매화의 아름다움과 관련해 상상할 수 있는 시각적 효과를 지녔습니다. 물러나는 것이 달이니 달의 그 움직임 때문에 매화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매화의 아름다움에 수줍음을 느끼고 달이 물러나는 것인지, 대답은 할 수 없어도 시하고 놀 수 있는 질문이 있겠습니다. 타고 넘는 것이 바람이라는 것도 그냥 지나치기엔 아깝습니다. 매화 꽃잎은 바람에 지겠지만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꽃잎의 아름다움도 즐거운 상상일 것 같네요.
세째 종류의 전고는 일곱째와 여덟째 행에 등장하는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이야기입니다. 일곱째 행의 한무제의 황후였던 진황후는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장문궁에서 외롭고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마상여가 쓴 것으로 알려진 〈장문궁의 노래(長門賦)〉로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진황후의 관점에서 그 목소리로 쓴 이 작품을 읽고 황제가 다시 황후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는데, 정사(正史)에는 그런 이야기가 전혀 전해지지 않습니다. 사마상여가 이 작품을 쓰고 진황후의 후한 보답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황후가 황제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당시 제일가는 문인을 고용해 〈장문부〉를 썼는지, 그로 인해 정말로 황제가 다시 황후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두 알 길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없는 것을 있다고 상상하여 마음 속에서 해결하는 것이 문학의 주요한 본령임이라는 것을 웅변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여덟째 행의 임공은 사마상여와 탁문군(卓文君)이 사랑을 나눈 장소로 유명합니다. 탁문군은 미모와 재능으로 잘 알려진 여인입니다. 그가 지은 〈흰 머리 노래(白頭吟)〉가 전합니다. "한 마음인 사람을 만나 머리가 희게 될 때까지 서로 떨어지지 않겠다 (願得一心人, 白頭不相離)"는 구절은 그녀와 사마상여의 절절한 사랑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마상여의 이야기가 전고로 쓰인 일곱째와 여덟째 행의 장문과 임공은 매화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전고를 사용해 꽃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 후 떨어지는 매화꽃잎에서 장문궁에서 흘린 황후의 눈물을 연상하고, 다시 사랑스럽게 마주 앉아 마시는 술잔에 매화 꽃잎이 떨어지는 낭만적인 장면을 연상한 것은 시인 하손의 재능입니다. "이른 매화를 노래함"은 사랑을 받아도 좋을 작품입니다.
매화꽃 구경을 어디로 가실지 모르겠지만, 홍쌍리 매화마을 같은 곳에 가셔서 꽃 구경하고 광양근처 맛집도 많으니 그 지방 음식도 드시면 좋겠습니다. 옛 시인들이 노래한 매화를 몇 구절 기억하고 가시면 어떨까 합니다. 가능하면 여인의 눈물보다는 술잔에 떨어지는 꽃잎을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02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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